천상병(1930-1993)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았다.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500원, 1000원씩 받아쓰면서도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것이 중앙중보부의 주장(불고지죄, 국가보안법 위반, 공갈죄)이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고초를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그 날은 새, 1971)이라고 한 바 있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이 연루됐다던 그 사건은 2006년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중앙중보부가 과장한 것으로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고문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마저 파괴했다.

재판정 뒷줄에 서 있는 피고 천상병의 모습이 평소의 그와 같지 않게 비감하다.

다리미에 눌렸던 그는 그의 ‘아름다운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은 후 그는 실종과 정신병원 입원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다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


늦었지만, 사건을 조작했던 당사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물론

천상병선생의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 재판정에 서 있는 천상병 시인, 1967년 12월 13일, 경향신문 사진부]




 




식민지 시대는 그곳을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의 왕궁을 놀이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섰다. 봄날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이를 즐기고자 상춘객들은 대거 몰려갔다. 아, 그런데, 창경원에서 소싸움도 했다고? 금시초문이다. 해방을 맞이한 1948년 여름, 창경원에서는 소싸움을 구경시켜 주었다. 당시 소싸움은 대중용 볼거리였던 모양이다. 창경원에서의 소싸움, 이런 사실을 알려준 것은 고암 이응노이다. 젊은 시절의 고암은 숱한 드로잉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제의 소싸움 그림이었다. 현장에서 속도감 있게 연필로 그린 소싸움 장면이 시대를 증거하고 있다. 현재 창경원은 본명인 창경궁으로 바뀌었고 동물원과 식물원도 이전되었다. 소싸움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술은 시대의 산물인가 보다.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고암 이응노 드로잉 1930-1950년대’(1.27-3.1) 전시, 참으로 획기적이다. 이들 드로잉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발굴 작품이다. 드로잉은 무려 600장 가량, 아니 앞 뒤로 그린 것 까지 포함하면 약 800장 정도의 대량이다. 그것도 1940년대 드로잉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렇듯 많은 드로잉을 남긴 화가가 이 땅에 있었던가. 감동 그 자체일 따름이다. 이들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젊은 시절 고암의 족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암은 치열하게 정진했던 작가였다. 드로잉의 현장은 농촌의 자연풍경으로부터 도시 뒷골목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인 인물화부터 누드 크로키까지 고향 홍성에서부터 일본 명승지까지, 종횡무진 다양한 소재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 고마운 점은 상당수의 그림에 제작일과 제작 장소를 표기했다는 점이다. 이 기록 때문에 우리는 고암의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과거라는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창경원에서의 소싸움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번 고암 드로잉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고암 전시 이외 권진규, 송영수, 김세중, 문신 등의 근대조소작품전과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의 근대 채묵화 4인전, 엘리자베스 키스, 폴 자쿨레, 릴리안 밀러 등 근대기 외국인 판화가가 묘사한 조선의 풍물, 그리고 해외 현대작가 전시 등이 아트센터 전관을 화려하게 꾸몄다. 썰렁한 겨울에 미술 애호가들에게 안복을 안겨준 전시였다. 지난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가나문화재단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의 원력에 의한 산물이다. 화랑과 옥션을 운영하면서 쌓은 미술의 공공재(公共財)를 사회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은 작가레지던시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장흥아틀리에와 파리시떼데자르의 작업장을 작가들에게 무상 제공한다. 벌써 입주작가를 선정하여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전시의 경우, 공립미술관에서 개최했음직한 내용이지만 아직 그런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것들을 다룰 예정이다. 그만큼 컨텐츠의 수준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저러한 문화사업을 위하여 이호재 회장은 자신의 부동산, 주식, 소장 미술품 등을 재단에 출연시켰다. 화상 출신의 이와 같은 문화사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국내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향후 미술관 건립까지 계획하고 있는 바, 가나문화재단의 역할에 기대를 걸게 한다.


고암 대전, 홍성, 예산 …?
이런 분위기에서 마련된 전시, 고암 드로잉 작품의 발굴 전시는 재단의 성격과 향후 진로를 짐작하게 한다. 다시 고암으로 돌아가 보자. 드로잉 가운데 홍성 생가 마을 풍경이 눈길을 끈다. 고암의 고향논쟁으로 홍성과 예산이 서로 싸운 적 있다. 결국 승소한 홍성은 고암 생가를 복원했고 생가기념관까지 건립하여 지역 문화사업으로 가꾸고 있다. 그런데 추정 복원된 생가와 고암의 드로잉과 차이가 있는 바, 행복한 고민거리 하나가 출현된 셈이다. <자택 마을>을 그린 고암은 지명을 ‘예산군 덕산면’이라고 표기했다. 대전시에는 이응노미술관이 있다. 그러니까 이응노미술관은 ‘고암 담론의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이 주요 업무라고 본다. 하지만 이번 발굴 전시를 보고 대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고암 드로잉 전시는 홍성과 대전을 포함하여 고암 프로젝트의 본격적 발진을 재차 촉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국제무대는커녕 국내 미술시장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하는 고암, 하지만 국제 경쟁력 상위권의 작가, 고암을 다시 봐야 한다. 누가 프로 화가인가. 다량의 드로잉 작품은 후학들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그러고 보니 가나문화재단은 초장부터 작가들에게 커다란 숙제 하나씩을 안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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