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파일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몇 장을 찾았다.

그 중 한 장면은 윤락녀가 발로 적음을 가로막는 사진인데, 잠시 놀다 가라는 장난스러운 호객행위였다.

적음은 특유의 사람살려~”를 연발하며 오히려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돈 한 푼 없는 땡초스님이란 것이 뒤늦게 알려지며 적음을 향한 일체의 호객행위는 사라졌지만,

은근히 즐기던 적음은 한편으로 서운한 것 같았다.

 

적음 최영해시인

서울의 대표적 홍등가를 기록하기 위해 청량리588에 방을 얻어 살던

 85년도 사진을 보니 당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항상 빵모자를 쓰고 다녔으니, 동내 사람들이 스님인줄 알 리가 없었다.

아가씨가 "당신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월간 빠주간으로 청량리 특집 취재로 잠입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적음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전농동으로 짐을 옮긴지 며칠되지 않아서다.

함께 머물며 글을 쓰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동반자가 생겨 힘이 생겼는데, 그것도 잠깐일 뿐 허구한 날 글은 안 쓰고 민폐만 끼쳤다.

단골식당의 밥값이야 당연히 감당하지만, 내가 준다며 외상 진 술값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화대는 외상이 되지 않는 점이다.

 

전농동588을 방문한 김용복, 유성준 사우와 한담을 나누고 있다.

적음 외에도 나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동료들이 가끔 방문하면, 술집으로도 활용하는 찻집에 안내했다.

그곳은 윤락업소에 바로 가기 민망한 남정내들이 잠시 들려 차 한 잔 마시며

탐색하는 장소로 활용되는데, 유일하게 적음만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돈이 없는 걸 알기도 하지만, 장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월간사진편집장으로 근무할 무렵이라 낮에는 없을 때가 많았다,

그 역시 인사동이나 다른 곳에서 술 마시며 떠돌다 밤 늦게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술이 취해 새벽녘에 들어오기도 했다.

약 한 달 가까이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봉화 청량사로 훌쩍 떠나버렸다.

 

방에 모셔둔 원고지 뭉치는 그대로 두고 떠났는데, 글 한자 쓰지 않은 백지였다.

 좋은 글을 기대했으나, 연이 닫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을 떠난 지금 생각하니, 그런 기행마저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신촌이나 인사동에서 벌인 기행의 연장선인 셈이다.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작품 / 조문호의 '홍등가'

내가 청량리를 찾게 된 것은 1983년 어느 날 동아일보에 실린 동아미술제공모 요강을 보면서다.

당시 '동아미술제'의 사진부문 공모는 2년 전에 주제를 공고해 합당한 작업의 시리즈로 출품하는 형식인데,

그 때 내걸었던 주제가 바로 직업인이었다.

당시는 직장 때문에 자유로이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퇴근 뒤 찍을 수 있는 대상을 찾다보니,

밤일하는 직업여성 청량리 윤락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찍은 사진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으나, 난감했다.

실상도 제대로 모른 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찍었기 때문이다.

마침 상금에다 대상 작품까지 팔아, 빈 집에 소 들어 온 격이었다.

그 돈으로 588에 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88로 들어가 작업한 몇 년 동안 가족은 물론, 경제적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과 친해지고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밖에 없었다.

성병으로 '청량리 보건소'를 드나들었고, 때로는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기도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전농동588'; 전시 팜프렛 표지

그렇게 작업한 사진을 모아 90년도에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열었으나 실망했다.

당사자들이 전시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벌떼처럼 달려든 언론의 폐해였다.

사회 멸시에서 벗어나 사람대접 받으려 작업에 동참했으나, 그들의 삶보다 선정적인 기사로 도배했다.

청량리 윤락가가 사라질 때까지 기록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요즘 동자동에 살며 철저하게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서랍에 잠들던 필름을 꺼내 사진집으로 엮은 것이 눈빛에서 발행한 청량리588’이다.

적음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588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으나 사진만 남은 것이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절 여인들의 안녕을 빈다.

 

사진, / 조문호

 

눈빛사진가선 시리즈 11호 '청량리588'사진집 표지 / 가격12,000

 




"몸을 팔아도 사람거치 팔라“는 말은 청량리588의 맏 언니 격인 정숙이가 동생들이 잘못하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는 윤락녀뿐 아니라, 국회의원에서 부터 밥벌이 하는 모든 직업을 몸파는 일로 본다.

몸을 팔아도 사람거치(같이), 사는 것도 사람거치, 하나같이 사람이 먼저다.

입이 거칠어 욕쟁이지만, 가치관이 분명하고 생각이 앞선 걸 보면 일찍 철든 것 같았다.


사창가에서 일하다 보면 시간은 돈이나 마찬가지라, 다투는 일의 대부분이 시간 싸움이다

'롱 타임'을 끊은 손님도 한번 일보고 나면, 그 다음은 강원도 포수다.

밤새로록  다른 손님받다 새벽녘에 얼굴이라도 삐끔 내밀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만큼 시간이 돈이다 보니, 다들 손님이 시간 끄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오죽하면 상대방 이름이라도 물어보면 촌놈이라고 꼬겠나?


"혜련아! 밖에 손님 기다리는데, 왜 나올 생각 안 하냐? 영복이 오빠 기다린다

나까이 아지매가 찾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야이! 씨발 새끼, 술이 취해 연애는 안하고 좆지랄로 시간끄내. 용팔이 오빠 있으면, 좀 끌고 나가라 해요"

이야기가 그쯤 나가면, 취객은 쫄아버린다. 보지도 못한 용팔이한데 겁먹어...

그런 소리 들리면 정숙이가  의례 한 마디 거들고 나선다.


야! 이년아~ 팔아도 제발 사람거치 팔아라



그러나 김정숙은 다르다. 사람이 먼저다. 아무리 손님이 추근대도 다독여준다.

기다려 주고, 장난도 받아주며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들어주고 신세타령까지 하는 여자다.


자기 몸이 섹스머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독 정숙이만 단골이 많다.

아무리 풋사랑이지만, 연애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보다 적게 벌지만, 다른 애들처럼 쓸데없는 사치하지 않으니,

시골 엄마한데 공장에서 받은 월급이라며 꼬박꼬박 송금도 했다.

모두 인간적으로 대하니 동생들도 따르고, 심지어 포주도 정숙이 말은 믿었다.


나 역시 정숙이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여기 살며 제일 힘든 것이 사람 취급 안 한다는 것이다

모두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며 구더기처럼 본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는 세상을 만들자는데 동의한 것이다.



90년초,'588'전시 개막식에 다들 오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가닥 희망마저 쪽 팔리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 하나같이 매춘에 무게 둔, 사람보다 가십거리로 나팔 분 것이다.

다들 마음 아파했다. 욕쟁이 정숙이의 걸죽한 욕설도 터져 나왔다.


"에이~씨발! 세상 좆 같다. ~ 기자들도 국개의원이나 똑 같은 씹새들이구나."



그 이후 정숙이는 그곳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4년전, '588'사진집을 내며 30여년만에 정숙에게 공개 편지를 띄웠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일게다.

정숙이는 어딜 가도 잘 살 거다.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으니...


그 당시  쫓겨 다니던 단속견이나 국개의원들에게 욕해대던 생각도 난다.

"사람 차별하지마라 씨발 놈들아. 우리한테 언제 사람대접 해봤냐?

위안부 할머니만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다. 몸 팔아 부모형제 먹여 살린 것도 죄냐?"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수시로 말 바꾸는 쓰레기들이 우글거리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정숙이보다 못한 덜 떨어진 인간들아~ 부끄럽지도 않냐?"

 

지금 쯤 정숙이도 개판 된 연동형비례대표제에 열받아, 어디선가 욕을 퍼붓고 있을거다. 

야이~ 씨발년놈들아! 정치 좆거치 하지말고 사람거치 해라


사진, / 조문호


































 


 







청량리 588, 그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70~80년대 전통 풍경과 문화유산을 탐구했던 주명덕, 강운구, 김수남의 작업과 달리 당대의 사회적 풍경 속으로 파고 들어간 그의 사진들은 80년대 한국다큐사진의 또다른 성취로 평가된다.

 

홍등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
스쳐가는 남성, 택시·세탁소 등
80년대 풍경 세밀하게 담아

 

회색 입자들이 가득 퍼진 사진 속에 1980년대 ‘청량리 588’의 풍경이 넘실거리고 있다. ‘아가씨들’이 기다리던 588 쪽방들은 무거운 커텐이 둘러처진 무덥고 답답한 공간이었지만, ‘일’을 치르고 나면 얼음장처럼 퀭한 공간으로 돌변했다. 남녀의 체온이 뒤섞이던 그 쪽방으로 사내들은 맥주를 들이킨 뒤 숨가쁘게 달려갔다. 2층 행랑에 들창문, 쪽문이 줄줄이 붙은 홍등가 벽돌건물들과 그 앞 회색빛 거리를 배경으로 천천히 가는 스텔라 택시와 청년,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잡아끄는 여인네들, 실랑이가 각본처럼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 기억의 무대 곁엔 어김없이 음료수, 인삼차 등이 쓰여진 찻집과 미용실, 포장마차 따위가 붙어있었다. 홍등가 건물, 차양 아래 고드름이 매달린 겨울이면 얇은 옷차림을 한 ‘언니’들이 미닫이 문 안에서 연탄불을 쬐면서 남자들을 끌어당겼다

 

80년대 중반 서울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 역 사창가 여성들과 동고동락했던 조문호 (68)사진가는 자신이 지켜본 30여년전 청량리 풍경을 하나하나 렌즈에 새겨넣었다. 필름에 찍힌 채 30년 이상 처박혔던 588의 공간 풍경을 작가가 최근 사진집 <청량리 588>(눈빛)을 출간하며 되살려냈다. 지난해 시작한 ‘눈빛사진가선’의 11번째 결실이다. 작업 일부는 85년 동아미술제에 선보였지만, 책에 실린 사진들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136쪽에 들어찬 사진들은 1984~1988년 청량리 사창가를 세밀화처럼 그려낸 기록이고, 겉과 속이 달랐던 5공화국의 사회적 풍경이기도 하다. ‘정의사회 구현’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거창한 구호 뒤로 온갖 성산업을 부추키며 국민을 우민화하려던 음울했던 시대의 분위기가 서려있다.

 


“윤락녀를 기록한 게 아니라
그 시공간 속 사람을 기록한 것”
25일부터 인사동서 전시회도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곳 인간군상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좇는다. 강퍅한 2층 벽돌 슬라브 쪽방 건물들 속에서 과로와 슬픔에 찌든 사창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과 주름진 알몸, 앳된 초보 성노동자의 단아한 얼굴 등이 휙 문앞을 스쳐가는 남자들의 실루엣과 얽힌다. 접객실에서 여인들은 다 헤진 의자에 앉아 남자들의 주문을 기다린다. 그들의 옆 벽면에 있는 밀대 걸레와 연탄보일러 탱크 등은 구질구질하지만 엄숙한 소품과도 같다. 조 작가는 재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2012년 이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청량리에 30여년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날서지 않은 사람살이 장면들로 보여준다. 평론가 이광수씨는 사진집에 실은 글에서 “작가는 ‘윤락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택시도 지나가고, 세탁소도 보이고, 촌에서 올라온 노인이 길을 묻고 있다. 영락없는 우리가 살던 그 동네다…<청량리 588>은 사라져가는 작은 이들의 세상을 기록한다 …소외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는 사실…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눌변, 그것이 조문호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다. ”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1984~88년 청량리 사창가의 사람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조문호 작가의 사진집 <청량리588>에 실린 주요 작품.

 

 

조 작가는 지난달 부인 정영신(57)씨와 전국 장터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차렸다. 지금도 인사동과 전국 장터들을 오가며 군상들을 담는다. 젊을 적부터 음악다방, 주점 등을 하며 자유인으로 살았고 대가 최민식의 작품에 이끌려 다큐사진에만 탐닉했다. 가산을 거덜내는 댓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투시하는 도리를 배웠다. 항상 바닥을 생각하는 그 겸손한 시선 덕분에 80년대 풍속생활사의 가장 인상적인 기록이라 할 <청량리 588>이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작가는 사진집 사진들을 추려 25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판도 벌인다. 19살 이상만 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눈빛출판사 제공

 

 

 

 

 


 

1985.6 / 전농동588번지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 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전농동을 기록한 오래된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를 잊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되었나보다.

 

참 착하고 예쁜 소녀였다.

그토록 꿈 많은 소녀가 거기까지 가게 된 건, 가난한 부모 만난 죄 뿐이다.

그 때는 나라까지 가난했으니, 시대적 사회적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그녀 이름은 김정숙이었다.

 

그 때 나이 한참 고운 이십대였으니 이제 오십대의 아낙이 되었을 게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몸은 망가져도 살기는 그 곳이 더 편했다고 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돈까지 엄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그냥 산다고 했다.

다 견딜 수 있으나, 변소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견딜 수 가 없다고 했다.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주는 사회인식을 바꾸게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5년 동안 뛰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90년 2월, 그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나와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목소리 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불어재꼈다.

 

그래서 그 전시 이후로 전농동 기록필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집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또 하나의 춘화 같은 이야기 거리로 변질될 것도 두려웠으나,

행여 잘 사는 그녀들의 삶이 발목 잡힐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역사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본인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듯 싶다.

아무튼 이 사진집 출간을 계기로 그 때 못한 그녀들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만나고도 싶다.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보게 되면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께...

디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2014. 12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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