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유근택/ YOOGEUNTAEK / 柳根澤 / painting.installation

2023_1025 2023_1203 / 월요일 휴관

유근택_반영_한지에 수묵채색_144×101cm_2023

 

유근택 홈페이지_www.geuntaek.com

인스타그램_@yoogeuntae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 본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삼청로 14(사간동 82-1번지)

Tel. +82.(0)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유근택, 또는 회화의 반투명성에 관하여 유근택의 회화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이따금 방문하는 교외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젊은 모색 2000-새로운 세기를 향하여(2000)라는 그룹전에 전시된 6점의 수묵화 연작 긴 울타리(2000)가 그것이다. 나는 기민한 감식안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이때만큼은 굉장한 작품을 보았다고 즉시 생각하였고 고양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후 이 화가에 대한 극찬하는 내용을 담은 평론을 세 번이나 썼다. 이번에 쓰면 네 번째가 된다. 외국 작가에 대해 여러 번 글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글쓰기 취향을 조금 바꿔 반세기가량 한국의 바로 옆 나라에서 비평 활동을 지속해 온 나의 비평의 배경과 기준을 다시금 표명하면서, 왜 유근택의 회화가 나에게(우리에게) 특별하고 귀중했는가를 밝히고 싶다. 기억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는데 반세기를 되짚어 보는 일이므로, 사실관계가 어긋난 내용이, 마치 대나무 바구니에서 낱알이 쏟아지듯 등장한다 해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유근택 _ 창문 _ 한지에 수묵채색 _146×103cm_2022
유근택 _ 말하는 정원 _ 한지에 수묵채색 _149×101cm_2020

내가 미술비평가 활동을 시작한 1970년의 일본은 구질서를 비판부정하는 전위적인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두 가지 쟁점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쿄비엔날레 '70의 기획을 맡은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1960년대부터 전개되어온 복잡다단한 반예술의 동향을 동시대 서구의 최첨단 경향을 참조하면서 탈감정화탈지역화하여 전통예술의 방법론에 따르지 않는, 물질적 무질서의 논리화로 정리해 제시하여 비평가로서 유례없는 명망을 얻었다. 다른 한편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예술사상의 문명적 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나카하라가 참조한서구 최첨단 경향의 예술 상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도, 도리어 서구 근대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그 자체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모노하(もの)' 의 중심축을 지탱한 존재로 평가받는 한국 태생 이우환의 활동이 있었다. 이리하여 나카하라 유스케도 이우환도 일본의 1970년대 이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셈인데, 두 사람에게는 각각 시대 특유의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주도했던 개념주의적 이론의 공격을 받고 주춤하였고, 마지막까지 '회화'와 진지하게 다시 대면할 수 없었다. 이우환도 다시 한번 회화를 서구 근대와 동일시하여 단죄한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의 내면의 유연한 예술가 자질 덕분에 1973년경부터 붓질의 반복으로 화면을 화가의 자유로운 움직임이나 물질의 단순한 드러냄에서 구해내는 양가적인 작품세계를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카하라의 도쿄비엔날레 '70에 협력했던 나는 이우환의 극단적인 반서구근대주의에 동조하기 어려웠고 다소 반감마저 느꼈으나, 본디 회화조각에 강한 정열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이우환이 보여준 양가적 회화의 개안에는 일찍이 공감하였고 금세 그의 비평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우환의 이러한 근사한 전진에는 당시 내가 줄곧 주창한 예술 실천의 반복성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더 확실한 것은 같은 시기(1970년대 초) 서울에서 이방인 이우환과 깊이 교유한 박서보의 작업방식, 즉 캔버스 바탕에 한지를 덧바르고 밑칠한 뒤 반복적인 긋기로 충돌과 간섭을 동일한 양가적 화면으로 구축해온 이른바 '묘법(描法, Ecriture)' 회화와의 동질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 후 박서보와 이우환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단순한 추상화가에 그치지 않은, 의미 깊은 양가적 회화의 수행자로서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그들의 진가는 오늘날 한국 특유의 회화표현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단색화의 집단적 양식성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로 나타났고, 회화의 현대적 의의를 단둘이서 선도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유근택 _ 거울 _ 한지에 수묵채색 _150×104cm_2022
유근택_말하는 정원_한지에 수묵채색_146×203cm_2019

때는 1970년대였다. 미국 회화에서는 미니멀리즘의 한계를 극복해낼 만한 전망이 부재하였고 여전히 '불투명성의 회화' 등이 거론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마오주의(Maoism) 영향으로 표현과 물질의 모순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는데, 회화 그 자체의 고유성을 모색하는 자세는 드물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든 회화는 임의로 시도된 적이 있더라도 추상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도 이우환과 박서보의 귀중한 주도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추상 바깥으로나아갈 수 없었다. 20세기라는 시대, 그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인데, 이런 '회화 빙하기'가 한창이던 19774월 나는 잡지 미술수첩(美術手帖)편집부를 설득하여 회화에 관한 특집을 마련했고, 거기에 회화에 관한 10(絵画する10)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회화가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고 그 대신 '평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동시대 시류'라고 여겼다. 편집부가 타협해서 특집 타이틀을 회화의 평면과 평면의 회화(絵画平面平面絵画)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평면은 어떤 의미로든 추상을 뜻한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회화' 또한 형상이나 이미지를 전제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선 제압하는 태도로 '회화의 본질은 반투명성이다'라고 밀어붙였다. 좌담회는 기묘하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도쿄비엔날레 '70의 성공 이후 위세가 당당했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뜻밖의 화제(회화의 부활)에 의기소침한듯싶었고, 젊은 두 명의 비평가는 딴청 부리며 쓸데없는 잡담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대의 난적이라고 생각했던 후지에다 데루오(藤枝晃雄)가 쉬는 시간에 옆에 있던 나에게 "회화가 반투명이라니, 괜찮은 말이군요"라고 말을 건넸다. 늙은 평론가의 감상적인 옛날 얘기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회화 부재의 30년 동안 구상을 제외한 '회화'를 놓고서 이런 논의를 진행했던 것 자체는 지금 돌이켜보니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는 형상과 이미지를 결여했다고 해도, 회화의 본질을 반투명이라고 보는 논의의 근거가 조금도 낡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범속한 것을 좋아하는 비평가라서 예언자적 부류를 믿지 않는다. 허나, 회화의 반투명성은 바로 지금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반투명성'이라는 말로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후 10년이 흐른 뒤 19866, 박서보의 도쿄화랑 개인전에 도록 평론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00×205cm_2023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45×102cm_2023
유근택 _ 반영 _ 한지에 수묵채색 _146×102cm_2023
유근택_봄 - 세상의 시작_한지에 수묵채색_242×206cm_2023
유근택_봄 - 세상의 시작_한지에 수묵채색_250×206cm_2023 "

뛰어난 회화는 왜 반투명인가. 마티에르(매체의 물질성)의 불투명한 벽이 드러내는 물자체의 발현을 실존적으로 긍정하는 즐거움과 그 벽의 저편에 혹은 바로 앞에 시각이 투명하게 비쳐지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비전이 생기는 즐거움을 둘 다 향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회화는 이 양극단의 어느 쪽이든 한쪽에만 치우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모노크롬 회화는 불투명성에 치우친 예이며, 삽화나 개념도 같은 그림은 투명성에 치우친 결과다그 중간의, 반투명성의 애매함을 견뎌야만 한다. 그애매함,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이 지닌 양가성에야말로, 회화의 깊이, 예측 불허(변덕스러움), 리얼리티, 허구성, 요컨대 회화의 풍요로움의 일체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쓴 다음에도 일본과 한국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서브컬처의 성공에 가려진 회화를 점점 잊어버린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 그래픽 디자인계의 인기 스타였던 요코오 다다노리(橫尾忠則)1982년 갑자기 피카소나 피카비아를 모방하며 창조적 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려고 의욕을 보였는데, 그 본령이 발휘되기까지 1988다원우주론, 나아가서는 2000년 이후의 Y자형 골목길시리즈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과감하게 고전미술의 성과를 끌어들여 형상과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요코오의 회화 영역안에서의 횡단은 일본 현대미술계의 기이한 풍경이었다. 희귀종이었던 요코오를 예외로 놓고 생각해보면, 일본은 여전히 이우환의 양가적 추상회화 이상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이미 아셨을 것이다. 2000년 가을, 유근택의 작품과 만난 일이 내게 어느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나. 이우환과 박서보에 의해서 가까스로 견지되어 온 회화의 반투명성이라는 미적 요소가, 그와 맞먹는 수준의 의미 있는 붓질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한층 솔직한 구상 표현의 붓질로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서 성취된 것이다. 당시의 유근택 그림은 앞서 박서보 평론에 서 언급했듯이, 필시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이 지닌 양가성"으로 살아 숨쉬었다. 작업실 창문을 통해 정점관측하듯이, 매일 관찰하는 숲속 오솔길과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시시하고 밋밋한 것들은 화가와, 화가가 매일 산책길에서 관찰하는 풍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창틀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울타리에 의해) 이원화되며, 그 이원성이 작가와 대상세계와의 말소하기 어려운 시간의 엇갈림산 자와 죽은 자의 엇갈림에 이르는 거리으로서구조화되고 있음을 정감 있게 보여준다.

 

유근택_분수_한지에 수묵채색_258×206cm_2023
유근택_분수_한지에 수묵채색_258×206cm_2023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풍경 사이의 치명적이고 비극적인 거리를 의식하는 것은 이 화가의 타고난 예술적 감성에서 기인한 듯싶다. 우리는 화가가 초년생 시절에 그린 놀라운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에서 그러한 거리의 인식을 이미 명확하게 회화적으로 처리했음 알고 있다. 할머니에게서 매일 들었던 한국 시민의 비극적인 역사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 대형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결코 말해진 이야기(narrative)가 아니다. 이야기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차원을 내포한 사건에 대한 통찰로 구성되어 회화적으로 가공된, 한 편의 창작물이자 비극이다. 이 벽화 같은 작품의 첫 부분과 끝부분이 그리스 비극에 으레 붙는 코러스를 연상시키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로 메워졌고, 더욱이 고문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겹친 부처의 얼굴 등, 사상(事象)의 단일성일원성을 넘어선 핵심적인 필치가 회화 특유의 중층적 생기를 자아낸 것을 놓칠 수 없다. 이 작품 이후 일상생활의 관찰과 공상, 허구에서 포착해낸 다양한 주제형상이미지가 유근택 작업에 엄청나게 중요한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러한 작품들을 나는 비평가로서 이례적이지만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림이 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형상 묘사의 밀도가 뛰어나서 그런것도 아니다. 농밀한 동아시아적인 전통적인 수묵과 과감한 현대적 도시 풍경이 편견 없이 공존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화면에 끌어들인 모든 요소들이 서로 녹아들 수 없는 시제(時制)를 지니며, 말하자면 내재적인 상호 비판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것 사이의 불가피한 시간차를 메울만한, 그러한 붓질의 투입. 그의 회화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끝맺은 적 없고, 끝나지 않는 세계로의 관여로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근택의 작품에서는 그림이 자기 그림을 비판하며, 그 비판의 척력(斥力)으로 화면은 잘 보인다고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반투명의 중간지대로 부유하듯, 가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만 예로 작품을 다뤄보겠다. 2007년 이후 이따금 제작된 자라는 실내시리즈. 사람이 사는 넓은 서양식 거실과 그 거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공간을 다 채운 채로 부유하는 다양한 종류의 자잘한 나뭇가지.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무시하고 끝없이 자라나는 식물의 거대한 군집과 평온한 거실 공간 사이에 기묘한 휴전 상태가 성립한다. 두 개의 공간 표상과 생명 원리가 명 료하게 이층으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의 생존 원리를 위협하면서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인 지배권을 내맡기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어디에 자리 잡으면 좋은가. 어느 쪽으로 리얼리티를 느껴야 하는 것인가. 무언가 보인다는 것의 이중성, 의미를 지닌 공간의 비결정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잠재된 양가적 애매함을 이토록 명확하게 제시해 보인 회화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와 같 은 회화를 앞에 두고 우리는 일원적으로 말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며 세계의 깊은 다양성과 초월성으로 이끌리는 게 아닐까.

 

유근택_자화상_한지에 수묵채색_40×29.5 F 56×45.5×4cm_2018

형상과 이미지를 과감하게 도입한 방식이 유근택의 작품세계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회화의 반투명성을 고양시킨 내재적 비판은 1980년대 이후 이우환의 기상학적 회화나 1990년대 이후 박서보의 이른바 '지그재그' 회화에서 원리적으로 수행된 방식이었다. 유근택의 등장이 세대의 단절이 아닌, 좀더 뜻깊은 발전적 계승을 성취한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이나 일본이 경험할 수 있었던 멋진 역사적 쾌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네무라 도시아키 번역 / 김정복

 

유근택_창문_한지에 수묵채색_146×101cm_2022
유근택 _ 폴과 해변 _ 한지에 수묵채색 _128×140cm

 

그 집

松巖 탄신 100주년 기념展 

2017_0513 ▶ 2017_0701 / 일,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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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토크2017_0531_수요일_07:00pm2017_0628_수요일_07:00pm


참여작가

석지 채용신_우청 황성하_박경종_박종호

양정욱_유근택_이우성_이현호_임택

은희_정재호_한상익_허수영_홍정욱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그 집: 미술관의 된 집 ● 서울 종로의 한복판, 호젓한 옛 골목에 단정한 미술관이 한 채 들어서 있다. 바로 OCI미술관이다. 주변에는 하루가 다르게 마천루가 치솟으며 세상은 이리 바뀌어가는 것이라고 채근하여도, 그래도 세상의 어떤 것은 여전히 가치 있지 않으냐고 되묻듯 빨간 벽돌과 뽀얀 대리석으로 튼튼하게 쌓아 올린 건물이다. 외벽에는 큼직하게 '松巖會館(송암회관)'이라 적혀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여기는 과거 송암 이회림(松巖 李會林, 1917~2007) 선생이 자신의 사저 터를 미술관으로 내어준 곳이다. ● 개성 출신의 송암이 이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동란이 막 끝나 부산 피난길에서 올라왔던 1954년이었다. 이 터를 유난히 아껴 오래된 양옥집에서 직접 살다가, 다시 5층짜리 송암문화재단 건물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 건물을 지을 때는 송암이 손수 나무를 가꾸고, 벽돌을 쌓는 조적공(組積工)까지 직접 데려왔다고 하니 그 정성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된다. 매일 서류를 검토하고, 서예를 연마하던 여기에 그는 1989년 전시장을 만들었다. 자신이 모아온 소장품을 혼자 보는 게 아까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송암미술관'의 이름으로 한학(漢學) 사료와 문인화(文人畫)를, 그리고 고향 땅을 그리며 모아온 북한 유화를 전시하여 연구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 이곳은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OCI미술관'으로 다시 한번 탈바꿈을 하였다


그 집展_OCI 미술관 1층_2017 (Photo ⓒ 박성훈)


한때 송암의 '집'이었던 OCI미술관은 이제 한국 현대미술의 보금자리가 되어 가고 있다. 경쟁과 시장 원리로 각박한 미술계에서 작가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되고,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OCI미술관의 활발한 움직임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것은 'OCI Young Creatives'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해마다 만 35세 이하의 신진 작가를 선발하여 창작지원금 1천만 원을 수여하고 개인전을 열어, 젊은 작가들의 높은 기대를 받고 있다. 공모 때마다 5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고, 개관 이후 벌써 55명의 작가가 배출되었다. 또한, 작업 공간이 없는 작가들을 위하여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도 운영하고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 소재의 사무동 건물 일부를 작업실로 개조한 것으로 매해 8명의 작가에게 '방'을 내어주고 있다. 그뿐이랴, 한 번 이렇게 작가들과 인연을 맺으면 그 정(情)이 행여라도 옅어질까, 작가들을 우리 "OCI 아들", "OCI 딸"이라고 부르며 알뜰살뜰 챙긴다. 수시로 안부를 묻는 건 물론, 격년제 지방 순회 전시인 『別★同行(별별동행)』을 기획해 전국에 알리기도 하고, 해외 교류 프로그램으로 국제무대에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작가들도 미술관을 제집처럼 불쑥 드나들고, 또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니 정말 '집'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집展_OCI 미술관 2층_2017 (Photo ⓒ 박성훈)


송암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특별전 『그 집』은 이렇게 미술관이 된 집에서, 미술품으로 지어보는 상상의 집이다. 송암이라는 한 사람이 뿌린 씨앗이 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는, 그리고 지금은 그 집에서 미술 작품이 어엿이 주인공이 되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보고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OCI미술관이 처음으로 그 집의 '곳간 보물'인 소장품을 내어 보인다. 송암이 모아왔던 고미술품과 북한 유화, 그리고 최근 수집한 현대미술품 중 14점을 엄선하였다. 더불어 OCI Young Creatives와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를 거쳐간, '그 집에 세 들었던' 작가 중 여덟 명의 최근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 전시의 구성은 건물의 1, 2, 3층의 계단을 오르며 바깥에서 점차 집안 깊숙이 들어와, 거기에 사는 사람을 만나고, 살림살이를 구경하고, 또 누군가의 방을 살펴볼 수 있는 순서로 꾸며보았다. 1층에서는 집 안으로 들여온 바깥세상, 즉 풍경화로 이루어졌다. 우청 황성하의 10폭 산수화를 중심으로 박종호, 유근택, 이현호, 임택, 허수영이 바라보는 하늘, 숲과 산, 호수의 풍광을 담았다. 또한 OCI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500여 점의 북한 유화 중 한상익이 그린 금강산 풍경 「삼선암에서」를 출품하였다.


그 집展_OCI 미술관 2층_2017 (Photo ⓒ 박성훈)


2층에서는 전은희와 정재호가 그린 오래된 집으로 거리를 만들고, 양정욱의 「어느 가게를 위한 간판」을 세워 보았다. 거기에 석지 채용신의 「팔도미인도」와 이우성의 'outdoor painting'으로 사람이 북적이게 하였다. 또, 그 집의 물건도 꺼내보았다. 책가도와 도자를, 여기에 홍정욱이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탁자와 작품을 함께 배치하여 세간을 갖추었다. ● 3층은 박경종의 '시공간 나그네'가 우연히 들러 모험을 펼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과거 송암이 사용하던 붓, 지팡이, 골프채 등과 현대의 일상용품이 작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뒤섞여 흥미로운 시공간을 빚어낸다.


 

그 집展_OCI 미술관 3층_2017 (Photo ⓒ 박성훈)


『그 집』은 벽돌 쌓듯 차곡차곡 모아온 시간과 정성, 그리고 인연으로 만들어낸 집이다. 별난 사람, 별난 사건이 넘쳐나는 미술계에서도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이 함께 전시되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전시에서는 과감하게 시대의 경계를 짓지 않았다. 미술품이 주는 즐거움과 상상의 기쁨은 시간에 국한될 수 없기에, 게다가 대(代)를 이어 아름다움을 감상하라고 송암이 내어준 '집'이기에, 형제자매가 많은 대가족처럼 작품 이미지들이 저마다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하였다. 잔칫날처럼 흥겹기를 바라며, 이번 전시는 OCI미술관이 관람객에게 보내는 '그 집으로의 초대'이다. ■ 김소라

 


   Vol.20170513c | 그 집-松巖 탄신 100주년 기념展






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

유근택展 / YOOGEUNTAEK / 柳根澤 / painting

2014_1106 ▶ 2014_1228 / 월요일 휴관

 

유근택_산수, 어떤 유령들_한지에 수묵채색_100×270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506f | 유근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4_1106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또 다른 진화, 유근택의 '끝없는 내일' - 유근택이 다져온 '일상'과 '정서' ● "나에게 일상은 아주 징글징글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런 놀라움이 항상 공존하는 세계, 그게 제가 바라보고 탐색하고 천착해온 삶의 공간이자 그림의 공간입니다." 유근택은 2013년에 『지독한 풍경-유근택 그림을 말하다』의 출판을 기념하는 전시 행사의 자리에서 '일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 혹은 '일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와 같이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 유근택의 작품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주제의 흐름은 '일상', '정서', '교감' 등으로 함축되어 왔다. 이 중에서도 '일상'이라는 주제는 좀 더 각별한 의미의 층이 내재되어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일상이라는 모티프가 창작의 영역에서 흔하디흔한 것으로 여겨지는 요즘의 상황 속에서 유근택의 '일상'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주제가 이처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 되도록 만든 선봉에 유근택이 있기 때문이다.

 

 

유근택_말하는 벽_한지에 수묵채색_200×180cm_2014

 

 

그의 학습기에 해당하는 1980년대 중반기부터 1990년대에 걸친 미술계의 분위기는 민중미술과 수묵화운동이 차츰 소진되어가는 한편,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의미가 거론되면서 창작활동의 주체가 단체에서 개인으로 조금씩 중심 이동을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해 집중했던 민중미술의 거대 담론이 지나가는 와중이었고, 동양화의 정신성에 집중하는 관습화된 시도들이 헛바퀴를 도는 등 전반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유근택은 이러한 과도기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려 자신과 관계 맺은 체험적 깨우침을 통해 시대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창작의 지향점과 표현방법론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역사의 실체라는 것이 결국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의 축적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생생히 깨닫고 '일상' 속 '지금', '여기'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 또한 동양화의 정체 상태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유근택은 지필묵(紙筆墨)으로부터 동양화의 정신성을 끌어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표현 재료로서의 특성과 수묵이 갖는 물성적 효과에 더욱 주목하고자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필묵 이외의 다양한 재료들을 수용하고, 공감각적인 연출 방식을 적용하는 등의 실험과 모색을 통해 시대의 감성에 맞는 매체로의 전환에 매진해 나갔다. ●「할머니」(1995),「냇물 혹은 추억」(1998),「다섯 개의 정원」(2000) 등은 이 시기에 전개된 유근택의 확장된 의식과 방법론을 읽을 수 있는 몇몇 예로, 동시대인의 실재하는 삶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루고 있으며, 동양화에서 추구하는 긴 선 대신 짧은 선을 쓰고 호분을 섞어 형상을 지우듯 모호하게 표현하는 등의 참신한 시도들이 두드러진다. 이와 함께 그가 직접 기획한 1996년의 『일상의 힘』전이나 2002년의 『여기, 있음』전, 같은 해에 박병춘과 공동 기획한 『동풍』전 등의 전시는 개인의 일상 속 이야기들이 갖는 의미와 힘을 공론의 장으로 들고 나온 계기가 되어 미술계에 적잖은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이처럼 역사성, 관념성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시공간의 현실성을 이식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시해 나갔던 그의 행보는 시대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동양화단의 해묵은 과제를 시의 적절하게 풀어나간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되었으며, 그와 같은 관점의 전환을 통해 이후의 동양화단은 개인의 일상 속 현실을 자유자재로 수용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겠다.

 

 

유근택_달밤_한지에 수묵채색_147×139cm_2014
 

유근택은 이후 개인의 삶 속에 누적된 시간성과 정서의 문제를 드러내는 관점으로 진전해 나갔다. 즉, 대상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그 관계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나간 감정의 층위들까지 함께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관계에 대한 관심은 동양미술이 관계 중심적 사고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한 그의 관심이 단순히 주제의 환기나 형식적 틀의 확장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이고 내밀한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이러한 정서의 표현을 위해 자신의 일상을 더욱 세밀히 관찰하면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대상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를 추적하는 등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키고 재해석하는 방식을 병치해 나갔다. 그 결과 화면에는 현실의 장면 위에 또 다른 차원의 정서적 표층이 겹쳐진 것처럼 풍경과 정서가, 현실과 비현실이, 순간과 영원이 서로 이질적인 양상으로 공존하면서 독특한 정취와 수많은 서사를 전해준다.「앞산 연작」(2000~2002),「어쩔 수 없는 난제들」(2002) 등은 대상에 대한 지독한 관찰과 탐구를 통해 시시각각 변모하는 대상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대상과 작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감정, 교감, 에너지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통상적인 표현 방식에서의 비례감이나 원근법 등에 근거하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 하겠다. ● 이와 같이 유근택은 동양화에서 관념성의 무게를 덜어내고, 일상-정서-교감 등으로 이어지는 관점의 심층적 이동을 거치면서 개인의 현실에 연원하는 다양한 감정들의 발현을 재료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표현해왔다.

 

 

유근택_앞산_한지에 수묵채색_72.5×90.5cm_2013
 

다시 만난 길목, '끝없는 내일' ● 유근택은 지난 2년 동안 다시 새로운 시각을 펼쳐 나가는 데에 고심을 거듭해왔다. 이번 전시,『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展은 바로 그러한 고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새로운 발언들로 가득하다. 이는 그가 2011년에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고 돌아온 이후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폭이 보다 넓어지고 깊어진 데에서 연원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들, 예를 들면, 거시적으로는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부터 소통이 부족한 가족, 공동체, 사회의 상황, 그리고 크고 작은 재난에 이르기까지 불합리와 부조리, 모순들이 우리 사회의 체계 속에 버젓이 자생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의 삶의 구조에 맞물려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심도 있게 통찰하고 있다. 바로 그렇듯 전시의 제목인 '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은 현실의 평범함, 비루함이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교차하면서 끝없이 지속되는 우리 삶의 기묘한 순환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첫 선을 보이는 대형「산수」연작과「말하는 벽」연작 등을 비롯하여, 모두 신작으로 출품된「앞산」,「숲」, 실내 풍경 연작 등에서 이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유근택_두 사람_한지에 수묵채색_118×146cm_2014
 

가로 2.7m, 세로 1m 크기의 대형 산수풍경화「산수」연작은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있는 인공호수인 충주호의 풍광을 다룬 것으로, 총 10점이 전시장 1층 공간의 독특한 환경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수'라는 소재는 동양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관념적 대상이자 개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무게가 중첩되어 있는 하나의 장(場)이다. 유근택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이 어려운 화두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관념의 현실적 수용'을 시도하고 있다. ● 그는 학생들과 수학여행으로 충주호에 방문했을 때, 물이 빠져 흉측해진 풍경 아래에서 방문객들이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며 기괴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처럼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통해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치유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와 현실 속 산수풍경의 기대 밖의 모습이 상충하는 상황이라든가, 산 아래에 인위적으로 호수를 만들어 동양의 풍경에 서양의 문물이 밀고 들어와 뒤섞여 있는 듯한 생경한 장면 등이 있는 그대로 실재하는 한국의 산수풍경이라고 설명한다. ● 이 연작들은 호수 위의 하늘과 산수풍경이 수면 위에 투명하게 비춰져 서로의 풍경이 데칼코마니처럼 마주하고 있는 기이한 모습인데,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표현되어 어느 쪽이 진경(眞景)인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그것의 뒤집힌 장면이 동시에 담긴 산수풍경은 마치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숱한 부조리가 밖으로 드러난 것과 같이 실제와 허상, 진실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이 충돌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투사이기도 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양면성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유근택_아침_한지에 수묵채색_104×133cm_2013

 

 

「말하는 벽」연작은 사간동 근처의 담장을 소재로 한 것으로, 도심 속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가는 모양이 모두 다른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긴 벽을 보면서 어느 날 그 돌들이 수군거리는 듯한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연작은 그러한 심상의 관찰을 담은 것인데, 등하교 길의 어린이들이 담장 아래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도 마치 벽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상상으로 이어지고, 벽 속에 갇힌 듯, 혹은 벽이 품은 듯 형상의 구분이 모호한 나약한 어른의 모습이 투영되는 등, 생명을 가진 또 다른 차원의 벽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 이와 더불어 벽이 상징하는 시각을 통해 우리 사회와 개인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중의적 관점 또한 엿보인다. 즉, 개개인이 단위가 되어 저마다의 발언에 집중하면서도 소통에는 무관심한 채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담장처럼 세대간, 계층 간, 사회 간에 벽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연작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순수하지만 나약한 개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며, 벽을 따라 가야 하는 개인의 상황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기이한 동행, 얽힘과 대립의 순환 관계를 가늠하게 한다.

 

 

유근택_아버지의 방_한지에 수묵채색_150×150cm_2010
 

한편, 2000년경에 시간과 호흡의 템포를 실험했던「앞산」연작이 2013년에 좀 더 확장된 시각으로 돌아왔다. 모두 작가가 살고 있는 복도식 아파트 6층에서 바라본 앞산의 다양한 풍광의 변화와 서사를 다루고 있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면의 감정들이 앞산의 표정을 매번 새롭게 결정하고, 이는 어느덧 그의 삶의 두터운 기록으로 남아 개인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는 이처럼 유사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루면서 유기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감성선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작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실내 풍경 연작,「외출」연작,「숲」연작 등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일상의 풍경과 그 위에 덧입혀진 작가의 내면 풍경이 섬세하게 교차되어 있다. ● 유근택의 화폭에는 여전히 다양한 재료의 혼합이 진행되고 있다. 종이 위에 수묵과 호분, 아크릴, 과슈, 콘테, 템페라 등이 형과 색의 원료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구체화하고 수많은 차원의 층위들을 전해준다. ● 유근택은 동양화에 개인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친연적 시선을 담고자 살아 숨 쉬는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어왔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둘러싼 매순간의 상황과 그 상황 속의 대상들을 충실히 읽고 느끼면서 살아있는 감성을 수록하는 구도의 행위를 통해 완성되어온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대처라기보다는 동양화 고유의 가치를 시대의 논리 안에서 가장 적절하게 엮어나가기 위한 고민과 탐색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결과라고 하겠다. 유근택은 이번 전시에서도 멈추지 않는 저력과 뚝심으로 새로운 예술 의지를 가득히 펼쳐 보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의 모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 최정주

 

 

Vol.20141106b | 유근택展 / YOOGEUNTAEK / 柳根澤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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