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밤의 폭우로 강물이 넘쳐 다리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잠수교라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높은 다리를 만든 다음부터는 다리가 잠겨 고립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10년 전에는 정선 읍내 장 보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강변길이 침수되어

이틀 동안 정선읍내 여관에서 물 빠지기만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물가에 산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옛 귤암분교를 빌려 레프팅업을 운영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서둘러 다리를 건너다 차가 물에 떠밀려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산길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급해 목숨까지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물이 빠지도록 집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이튿날이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정영신씨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틀 전부터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다.

 

윗만지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있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20여 년 동안 살며 한 번도 폭우나 태풍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몰아 닥쳤을 땐, 이변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산에서 돌이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밤을 지샜는데, 새벽에 나가보니

서낭당 앞 공터가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덩이가 개울과 도로 따라 굴러 우리 집 주변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집 터에 절을 짓겠다며 땅을 팔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 여건이 자기가 찾던 곳이라지만, 살고 있는 집을 팔수야 없지 않은가?

아마 명당인 것을 알아본 듯 했다.

 

첫날은 비 때문에 일을 못하고, 둘째 날은 땅이 질퍽거려 일을 못했다.

방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려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지산에는 티브이도 인터넷도 없어 책 볼일 밖에 없는데,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도 오래보지 못한다.

 

무료한 마음을 아는듯, 아랫만지 사는 최연규씨가 찾아왔다.

집에 술안주가 없는 것을 눈치 챘는지, 윤인숙씨가 사는 옆집으로 오라고 했다.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술꾼을 모으러 온 것 같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를 타고 아랫만지로 넘어갔다.

아랫만지 가는 도로도 물에 잠겼으나 사륜구동이라 산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랫만지 아낙들이 물 구경하느라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최연규씨 댁은 농지가 많은 대농이라 일반 농작물만 아니라 사과나 배 등 과일도 없는 것이 없다.

소도 여러 마리 키우는데, 그 많은 일을 두 내외가 맡아, 농사철에는 한가하게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었다. 고추도 과일도 주렁주렁 달렸다.

 

그 날 아낙들은 깻잎을 땄지만, 남정네는 냉동실에 있는 홍어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홍어가 부족한지, 이번엔 매운탕 끓인다며 물고기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넘쳐 고립되면 항상 즐기는 놀이지만, 대개 조그만 피라미들만 잡힌다.

그물 채를 급조하여 물가로 나가보니, 아까보다는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강변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리는 그 때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심어 둔 농작물들은 휩쓸렸고, 떠내려 온 쓰레기들만 나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는 고구마가 능쿨채 떠내려 와 걸려 있기도 했다.

밤 늦게는 물이 빠져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해버렸다.

고기를 잡은 후 계속 술을 마신다면 나중에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깨기 위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옆집의 윤인숙씨가 데리러 왔다. .

손사래를 친 후, 밤 열시쯤 출발해 보니 길가의 물은 빠졌으나 진흙 투성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힘들게 뚫고 나갔으나, 다리가 막혀있었다.

 

다리에 물은 남았지만 갈 수는 있었는데, 떠내려 온 나무둥치가 다리 중턱을 가로막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의 도움은 물론 기계 톱도 빌릴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영신씨에게 전화 걸어 아침 약속을 저녁약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 계속 헛바퀴를 돌렸다.

핸들을 돌려가며 계속 페달을 밟았더니,

차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뒷 범퍼가 돌벽을 치고 빠져 나왔다.

범퍼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기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돌아 와 버렸다.

 

그 이튿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도 솎아내고

지난번에 수확하고 남겨 둔 옥수수대와 무성한 잡초들도 제거했다.

마른 땅이라면 옥수수뿌리는 괭이로 캐야 겠지만, 땅이 질어 손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점심 때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 때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겠더라.

한번 일에 빠지면 힘든 것조차 잊어버리는,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정선만 갔다 오면 그 다음 날 곤욕을 치루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라면으로 허기를 메운 뒤, 수확한 농작물과 짐을 싣다보니, 차가 엉망진창이었다. 

간밤에 진흙탕에서 씨름하였으니 깨끗할리야 없지만, 뒷 범퍼 모서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문짝이 망가져 중고 문짝을 60만원이나 들여 교체했는데,

차주인 정영신씨에게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 받아, 정선 오가는 기름 값과 차 유지비에 대부분 소모하는 편인데,

더 이상 수리할 여력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내년에는 땅도 쉴 겸,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을 했다.

길에 돈 뿌려가며 농사 지어도 모종 값과 비료 값이면 사먹고도 남는다.

 

정선 만지산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1시 무렵이었느데,

언제 물난리가 났느냐는 듯, 도로와 다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게 일해 손가락은 깨졌고 팔목은 삐었지만, 운전을 마다 할 수 없었다.

 

오다보니, 강변 도로에 아스팔트 조각들이 떠 내려와 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된 산길을 모두 아스팔트로 덧 입혔더라.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좋아하는 주민도 있어 입을 다물었는데,

이게 토목업자와 군의원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멀쩡한 포장길에 왜 날림공사 하느라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다.

정선군은 돈이 남아돌아 탈이다.

 

매번 정선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고, 올 때는 한 밤중에 출발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정체를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 날은 하는 수 없이 한 낮에 출발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양평을 경유하는 국도는 늦어도 네 시간이면 충분한데, 이 날은 일곱시간 걸렸다.

 

양평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퇴근 시간과 마주친 서울에서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하는 정영신씨가 기다려줄지 걱정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밥상은 차려 놓고, 아들 햇님이 내외와 손녀 하랑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있으니 가족들이 나타났는데, 예쁜 하랑이 덕분에 지친 피로도 잊어버렸다.

생일케익까지 사와 복에 없는 생일잔치까지 열게 된 것이다.

 

생일밥 먹기가 이리 힘들다면, 다시는 생일을 맞지 않으리...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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