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태선생


지난11일 원로사진가 황규태 선생께서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올해 가기 전에 번개 밥이라도 한번 해야죠. 정영신씨와 같이요’

난,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보름이나 지나 난감했지만, 정영신씨와 연락해 시간을 잡은 것이다.



지난 26일 약속장소인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가니,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다.

송구스럽게도 돈까스를 사 준다며, 사간동 'GINZA BAIRIN'로 차를 몰았다.

오래 전에 그 곳에 한 번 가보았지만, 잘하는 집이라 예약해야 할 정도다.



과분한 오찬을 즐긴 후 인근에 있는 찻집 'Smoll House'로 갔다.

그동안 뵙지 못한 원로사진가들의 근황을 들었는데,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인사동에서 ‘하당’이란 화랑을 운영한 사진가 윤 옥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인사동 가게를 그만두고 소식이 끊겼는데, 황선생 께서 알고 계셨다.



이야기 중에 지인들이 임응식선생을 '예술원'에 모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철옹성같은 벽을 넘지못해 그냥 넘겼지만, 요즘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궁금했다.

‘예술원’이 폐쇄적인 집단이란 건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끼리끼리 노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무슨 정치 패거리도 아니고 명색이 예술한다는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예술원'의 벽을 허물어 원로 사진가 중에서도 누군가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청원을 올리자는 글을 올렸더니, '예술원'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이 많았다.

'예술원'을 잘 아는 분들은 친일 잔재로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영문도 모르는 황규태선생은 홍두깨 같은 소리에 연관된 듯한 포스팅이 불쾌한 것 같았다.

그런 양로원에는 관심도 없다며, 제발 망신시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스러웠다.



2017,11 / 한정식선생과 류가헌에서


사실, 황규태선생은 사진 작품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도 좋다.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개인적인 생각과도 일치해 존경하는 분이다.

미국 계실 때는 사진 유학 간 후배들 중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진가에게 도움을 주었다.

작년에는 동자동 쪽방촌까지 찾아와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큰 힘을 주셨는데,

만날 때마다 어렵게 사는 걸 걱정하신다.


2018년 6월, 황규태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짚차를 몰고 동자동 쪽방촌을 방문했다


선생께서는 내가 '삼성항공' 카메라사업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사진기획전 후원 요청을 들어준 걸 아직까지 고마워하신다.

사진하는 사람이 업무의 일환으로 결재권자와 연결해 드린 것뿐인데,

괜히 부담주지 않으려고 도움줄 때마다 핑계 대시는 거다.



후배들을 위한 애정 어린 마음뿐 아니라, 사진도 최고로 평가 받는 분이다.

황규태선생 사진이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만으로도 입증된다.

작품 경향이나 라이프스타일도 젊은 사람 빰 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그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누가 선생을 팔순이 넘은 원로작가라 하겠는가?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길'


선생께서 1960년대 찍은 사진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 지켰다.

목가적인 정취도 살아있고 사진의 전형적인 구도도 남아 있었으나,

그 틀이 서서히 부서지며 초현실적 이미지의 파편이 되어갔다.

원근감이 압축되거나 화면 톤이 사라지며, 더 이상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졌다.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소원'


70년대 발표한 ‘원 풍경’에서는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 비판의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생태환경의 문제성을 예견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며 통렬한 비판이었다.

기록적인 고발성에다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보여 준 일련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해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황규태선생의 70년대 작품 '원풍경'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기존 사진틀을 깨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최근에 발표하는 일련의 ‘픽셀’전은 시공을 초월한 작품세계인데,

평생을 새로움에 도전하는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다.


2018 년'동강사진상 '수상전에서...


황규태 선생 사진의 매력은 바로 자유로운 자의성에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하며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을 벗어던져 버리는 것이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진미학을 개척했다.


황규태작 Pixel Tvee  2011년


부디 오래 오래 건승하시어, 후학들에게 늘 모범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글 / 조문호



황규태작 Pixel 2019년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국제사진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규태선생 작품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새해를 맞아 일출과 관련된 이미지를 생각하다, 황규태선생의 '원풍경'이 떠올랐다.

사진을 찾으려고 83년도에 발행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도록을 뒤적였더니, 

뒤 페이지에 실린 원로평론가의 짧은 작품해설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운운하며 화면구성에 대한 이야기만 풀어놓았다.

그만큼 현대사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다.


그건 생태환경의 변화를 예견한 경종이었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인 것에 대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한 황규태선생의 ‘원 풍경’은 

기록성과 고발성을 겸해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띄고 있다.

몽타주에 의한 그의 의외로운 해석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 보여 준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런 실험정신 덕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진가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60년대 초반, '경향신문'기자로 사진을 시작한 황규태선생은 특파원1호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 곳에서 사진의 한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개척해 낸 것이다.

그 뒤 사업에도 크게 성공해, 미국에서 사진 공부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튼 사진인 들에게 선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시적감성도 탁월하다.

흐드러지게 핀 벗꽃을 사진에 잔뜩 넣어놓고, 그 밑에 붙여 논 제목이 뭔지 아는가?

<큰일낫다 봄이 왔다> 강현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후렴은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이다.

서정춘시인의 '봄 파르티잔'에 버금가는 절창아닌가?

머지않아 팔순을 내다보는 연세지만, 탁월한 감각과 번득이는 에너지는 변함없으시다.
대형카메라를 이용한 픽셀 확대 작업이나 ‘기(banner)’시리즈 등의 작품 스타일 뿐 아니라,

생각이나 생활까지 젊은이들 빰친다.

기존상식을 희롱하고, 고상함에 야유를 던지는 선생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글 / 조문호
 





                                       1969년부터 1972년 사진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작품집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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