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홀랑 빠져버린 장터 할매가 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드신다.
국수 한 젓가락 잇몸에 걸쳐놓고, 졸졸 빨아 드신다.
젓가락으로 받치면 팔이 아파 천천히 드신단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딱 맞다.

이리 먹으나, 저리 먹으나, 넘어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시간은 걸렸지만,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깨끗하게 드셨다.
“살라고 묵는 기 아니라, 맛있어서 묵는데이!”
카메라 든 사내 눈길을 의식해 하시는 말씀이다.

호박 팔아 국수 사 드시면 남는 것도 없지만, 사람 만나는 재미다.
자식들은 편하게 살라지만, 혼자 감옥살이 하는 게 어디 편한 것이더냐?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며, 마음 가는대로 사신다.
집에 가면 티브이를 친구삼지만, 그래도 자식 걱정은 있다.

사는 게 뭐 별 것 있겠나?
객지에서 며느리 눈치 보며 사는 노인네들 보다 백배 낫다.
다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만,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빨려 가는 국수발처럼 넘어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은 정영신씨와 강원도 양양으로 떠났다.
장터 찍으러 갔지만, 마침 양양 연어축제가 열려, 연어 잡는 티켓도 구해 두었다.
그러나 방정맞게 그날 따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로 행사가 취소되어버린 것이다.
비가와도 장은 열려 가야했는데, 한 시간 쯤 지나니 날씨가 서서히 개었다. 
이미 취소된 행사라 되돌릴 수 없어, 연어 먹을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난 지랄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전 날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들이 잠을 설치듯이, 밤새도록 뒤척이는 것이다.
운이 좋아야 한 두 시간 잘 수 있는데, 그 버릇을 잘 아는 정영신씨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두 번 다니는 것도 아닌지라, 이젠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다닌다.






양양장에 도착하니, 오전 아홉시 가량 되었다.
장터 찍느라 여기 저기 돌아다녔는데, 양양 송이가 많이 나왔더라.
올 해는 송이 풍년이라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정영신씨와 흩어져 다니지만, 가끔 장터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와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계령’으로 잘 알려진 정덕수 시인이었다.






양양에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너무 반가웠다.
아마 정영신씨와 양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 했다.






정덕수씨를 보니 박근혜퇴진을 위해 촛불 들고 싸웠던 광화문광장이 생각났다.
양양에서 올라와 광화문광장에 텐트 치고 살았는데,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추운 겨울 내내 텐트 속에서 지내는 게, 안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광화문광장에서 치루어지는 굳은 일은 그가 도맡았다.
나중엔 양양에서 공구까지 싣고 와, 현장의 가설 토목 공사에 봉사했다.
매주 진행되는 '광화문미술행동'의 설치작업도 그의 도움이 컸다.





박근혜가 퇴진하여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월 따라 그의 이름마저 잊혀져갔다.
지금은 산나물을 채취하여 어렵게 살지만, 틈틈이 시작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또 인정은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동자동 쪽방까지 찾아 온 적도 있다.

그 당시 정덕수씨가 준 상황버섯으로 술을 담았는데, 위스키는 저리가라 였다.
아끼고 아껴 아직까지 약처럼 마시고 있으니, 어찌 그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오랜만에 만났으나,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거하게 마실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막걸리를 상황 버섯주처럼 찔끔 찔끔 마셨으니, 그와의 인연은 찔끔 찔끔 인연인가 보다.






그의 안내로 낙산사에도 들렸다.
90년대 초반 불교유적 촬영할 때 가보고 처음이니, 이 얼마만인가?
2005년 산불로 화염에 휩싸였던 낙산사를 뉴스에서 보았는데,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지어 진 절집들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말끔하다.

불길에 녹아버린 범종의 잔해가 당시의 참혹함을 대변했다.






양양에서 떠나 오는 길에 정덕수 시인이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장터 이모가 만든 묵이라는데, 그의 따뜻한 정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녹였다.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요, 달라 빚을 내서라도, 코가 비틀어지게 술 한 잔 대접하리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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