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인사동도 많이 변했다.

 

화랑을 주축으로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등이 모여 있었고,

인사동 골목 골목에 똬리 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낭만과 풍류가 넘치던 곳이었다.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한참 방황했다.

인사동에 숨겨둔 애인도 없는데, 왜 틈만 나면 인사동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인사동 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남았는지 찾아보려 작심한 것이다.

 

기존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며 잡화상이나 옷가게들이 대신했는데,

이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만의 풍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아직 많은 화랑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으로 남았지만,

인사동의 추억으로 꼽을 대상은 아니었다.

 

1924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지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때 생겨난 것이란다.

 

지금은 민가다헌’, ‘경인미술관’, ‘통문관’, ‘통인가게’, 수도약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뀌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인사동과의 인연은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이나 '시인통신',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고,

찻집으로는 천상병 선생이 계시던 귀천이나 수희제’, ‘초당등이었다.

 

그리고 옛 순라꾼 터에 있던 초창기 예총회관건물이나

건국빌딩에 둥지 튼 민예총사무실에 대한 추억도 많다.

 

'민예총'창립총회에 갔다가 우연히 고향의 은사 조성국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민예총'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자리하심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림마당 민이나 꽃나라흑백현상소', ‘민사협사무실 등

들락거린 곳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골목골목 숨어있던 술집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아직 살아남은 식당은 부산식당이나 사동집이 고작이다.

 

그런 특정한 장소의 현장 보존성을 찾는다면

한때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활용했던 옥탑방 철계단이 유일했다.

 

문 닫은 지 오래된 술집 문에 쌓인 우편물이나

옛 잔재물들이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인사동다운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경인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두엽씨가 가장 인사동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사동과의 첫 만남도 사람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사동을 못 잊어 하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 그리운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인사동은 유효하다.

 

사진, / 조문호

 

 



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느낌이 있는 "신 풍물 기행"

작가 박인식이 본 인사동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이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받은 지 벌써 서른 몇 해를 넘겼다.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을 만났다. 더러 꽃 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더러는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였고, 또 더러는 평생 마실 술을 젊은 시절에 몰아 마셔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또 다른 몇몇은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하산하여 도로 머리 기르고 장가들었다.

그들의 삶이 인사동 풍류 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은 함박눈(이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마침 함박눈이 퍼붓고 있네)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눈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본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온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게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걸까.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온다.

인사동으로 나서면 언제나 그 그리움과 정분에 (60대 중반에 이른 할배 주제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인사동 나들이는 낭만에 한목숨 건 ‘낭만파’이자 ‘인생파’인 인사동파 문화예술인의 삶 속을 걷는 오디세이가 된다.

‘기억의 방/기역자 모서리/추억의 기역자 방에서/기역으로 꺾어져/그리움의 지느러미 흔들며/헤엄쳐 나오는 기억의 물고기들/살가워 그리워라/하마, 서른 해나 정들었지.’ <박인식의 시 ‘아원의 추억2’>

쌈지길 들목에 있는 아원 공방의 그 기역자 방에서 나는 ‘인사동 3전설’의 한 분인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을 처음 그리고 자주 뵈었다. 뵐 때마다 선생은 기침을 콜록였고, 말이 없었다.

인사동이 한국전통문화예술의 갯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파고들면 끝내 민병산이라는 ‘사람의 산’과 마주하게 된다.

바둑을 즐긴 선생은 원래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이 놀이터였다. 1980년대 들어서 관철동이 장사치들로 번잡스러워지자 선생은 늘 책이 한두 권씩 들어있는 헌 가죽가방을 메고 종로 큰길 건너편인 인사동으로 슬며시 발길을 옮겼다. 선생이 옮겨가자 선생을 따르는 숱한 문인과 화가와 언론인들도 아지트를 인사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출애굽기처럼 출관철동기 또는 입인사동기는 선생으로 인해 이토록 은밀하면서도 장엄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생의 회갑이 돌아왔다. 선생을 따라온 인사동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한복도 한 벌 지어드리고 생일엔 모두 주머니 털어 자주 가던 ‘누님국수’집에서 회갑연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생일 당일 모든 인사동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인사동 계파의 연락책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 “음, 난데, …… 누님국수집으로 올 때 말이야. 부조금 봉투를 다시 써와! 민 선생이 아침에 돌아가셨대.”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세상을 떠나서도/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신경림의 시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의 부분>

출관철동기에 선생을 따라 인사동으로 들어온 시인으로 이 추모시를 쓴 신경림 시인 곁에 천상병 시인이 있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노인으로 자처한다’ 했던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이라는 음식을 세상 사람들이 맛있게 들 수 있도록 간을 제대로 맞춰준 사람이다. 그 역할로 천 시인 또한 ‘인사동 3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아원공방의 기역자 방에서 두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학고재 골목길로 쫄랑쫄랑 지느러미 흔들며 앞서 갔다. 그곳에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꾸려가던 찻집 ‘귀천’이 있다. 목 여사도 몇 해 전 세상을 떴다. 지금은 목 여사의 질녀가 ‘귀천’의 팽주(烹主·차 따르는 사람)다.

천 시인에게 세상살이는 소풍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날 김밥을 챙기듯, 천 시인은 막걸리값을 챙겨 허구한 날 인사동으로 소풍 갔다. 인사동 쪽에서 보면 소풍 왔다. 소풍 오는 사람이 워낙 열심이어서 인사동은 천 시인으로 인해 날마다 소풍날이었다. 소풍 온 사람은 소풍날을 만들어 준 사람답게 막걸리값을 뜯어냈다. 1980년대 초에 1000원이던 막걸리값은 그 뒤로 이어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90년대 초에는 3000원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3000원이 상한가였다. 1994년에 천 시인이 소풍을 끝내고 ‘귀천’해버린 까닭이다.

천 시인에게 시 한 수는 막걸리를 다섯 번 즐길 수 있는 술값이었다. 시를 얻게 되면 냅다 관훈미술관 3층에 있던 ‘한국문학’사로 달려간다. 이근배 시인이 오랫동안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 문예지 사무실로 시 한 편 들고 소풍 나온 날의 천 시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주간! 이 주간! 내 시 한 편 써왔다. 원고료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이근배 주간이 1만 원짜리를 건넨다. “아이다, 아이다. 원고료는 5000원이다.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그 얼마 뒤에 지금 ‘툇마루’라는 음식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었던 ‘실비집’으로 가면 5000원을 꼬불쳐 쥐고 막걸리 소풍 즐기는 순진무구한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소풍놀이에 익숙해진 인사동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1000원짜리 지폐가 지갑에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되었다. 아, 우리에게도 1000원이면 막걸리가 대폿잔에 한가득 따라지는 영혼의 시대가 있었구나.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추억을 찾아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세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인사동에서 가장 오랜 고서점인 ‘통문각’ 쪽으로 나아갔다. 인사동 큰길 곁이라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물고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세 번째 물고기를 따라 들어간 곳은 ‘수희재’라는 전통찻집이다. 수희재의 다모(茶母) 장순정 씨가 정성껏 내린 녹차를 내놓자 물고기는 어느새 수천 마리 새끼를 부화시켜 내 콧속으로 들어오며 속삭인다.

“날 기억해? 여기서 차를 즐기던 박이엽 선생의 체취가 어린 차 향기 말이야.” 몇 년 선배인 민 선생을 닮아 박이엽 선생도 말이 없었다. 해소천식 환자였다는 점에서도 두 분은 닮았다. 그 지병으로 두 분 모두 일찍 귀천했다.

박 선생은 출중한 번역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방송작가다. 1970년대 최고의 라디오드라마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작가다. 1970년대 말 군사정권에 의해 불순하다는 이유로 방송사 일은 끊어졌다. 기독교방송국만이 일거리를 줬지만 그걸로 생계 꾸리기는 어려워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번역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번역하고 창비에서 출판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귀중본이다. 미술에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해보면 그를 인사동에 보다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라는 장탄식이 무성하다. 다분히 그렇다. 주말이면 정나미 떨어진다. 관광지도 이런 관광지가 없다. 휴일에는 인사동에 인사동 사람들이 없다. 인사동의 정체성을 빛낸 여러 가게가 북쪽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수희재’마저 2년 전에 문을 닫았다. 떠난 자리마다 ‘국적불명’의 관광상품가게가 들어섰다. 불난 호떡집에 사이비 엿장수가 설쳐댄다. 그게 인사동의 참맛인 줄 알고 꼬여드는 관광객들이 밀물 쳐 ‘인사동’이라는 이름의 짝퉁 한국전통 문화예술 기념품을 한 푼이라도 더 값싸게 사려고 이리 밀치고 저리 뛰는 장돌뱅이 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날에는 인사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을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만이 아니라 인사동 골목에서 만나도 서로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원수 될 일 저지르지 말며 살라고 좁디좁은 인사동 골목은 가르친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지금은 사라진 ‘실비집’이 있었다.

누군가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 선술집의 여주인은 총장으로 출세했다.

그 총장 전용 서랍 속에서 시큼한 막걸리 냄새 풍기며 잠자던 외상장부는 참 두툼했다. 인사동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상으로 마셔대던 막걸리는 유난히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서 다 함께 노상방뇨 하면 지금 내리는 저 눈발보다 더 함박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인사동 뒷골목에 납작하게 고개 숙인 한옥들의 낮은 어깨를 다독이며 ‘힘내라’ 격려해줄 수 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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