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인전ㆍ그룹전 잇달아 갖는 민중미술가 신학철 화백 단독 인터뷰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2016년 민중미술이 화두다. 서울 메이저 갤러리와 경매회사들이 앞다퉈 2016년 미술계 키워드로 민중미술을 잡았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진보 성향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술운동이다. 심미주의적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었고, 민주화운동과 맥을 함께 해 왔다. 1970~1980년대 미술계 주류였던 모노크롬(단색화)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단색화를 대표하는 이우환 화백의 과거 발언을 빌자면, 단색화가 1970~198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침묵의 저항’이었다면, 민중미술은 ‘온 몸의 저항’이었다.

지난해 말 경매회사 서울옥션이 오윤, 신학철, 권순철, 황재형, 강요배, 임옥상, 이종구 등 민중미술가 작품들을 시장에 띄우며 ‘아트포라이프(Art For Lifeㆍ삶을 위한 예술)’라는 타이틀을 걸었듯, 민중미술은 ‘아트포아트(Art For Artㆍ예술을 위한 예술)’와는 대척점에 있는 장르였다.

아이러니다. 2년여 지속돼 온 단색화 열풍이 오래도록 침체돼 왔던 국내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그 대척점에 있던 민중미술까지 함께 주목받고 있으니 말이다.

미술계에서는 ‘포스트 단색화’로 민중미술을 꼽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갤러리와 경매사를 통해 그림을 사는 컬렉터들,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했던 민중미술가들의 그림이 다시금 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민중미술가, 신학철을 만나다=민중미술가 신학철(7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언급된다. 1960년대 미술그룹 AG(아방가르드협회)에서 활동했고, 1985년 김정헌, 임옥상, 오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축했으며,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한국미술사에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 논란을 불어일으킨 장본인이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 전시 서문에서 “한국 근ㆍ현대사의 트라우마와 끈질기게 대결해 온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 10여년간 미술가에서 신 화백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2007년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민중미술 그룹전 ‘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전’ 이후 간간히 미술관 기획전에 그의 그림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올해 국내 메이저 갤러리들이 여는 민중미술 전시에 신학철이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가나아트센터 기획 그룹전이 2월 초 예정돼 있고, 학고재갤러리는 9월 신학철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 8일, 신 화백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만났다.

신 화백은 10여년간 아픈 아내 병수발을 해 왔다. 붓을 들 새가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지난해 봄, 아내를 저 세상에 떠나 보냈다. 하루 담배 한 갑을 태운다는 그는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반 갑 가까운 담배를 태웠다.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기로, 까칠(?)하기로 소문난 신 화백은 소문과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었다. “대중언어를 잘 못 쓰고 말투가 거칠어서 걱정”이라고 했지만, 느린 말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내내 ‘허허’, ‘껄껄’하며 웃는 그에게서 투사의 이미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된 화구들과 커다란 캔버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 거실 햇볕 잘 드는 한 켠이 바로 신 화백의 작업실이다. 십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던 부인을 지난해 봄 떠나 보낸 후 혼자 지내게 되면서부터 집안 곳곳은 사진 자료와 콜라주 등 작품 활동을 위한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민중미술도 결국 상업화= ”글쎄요. 상업화 돼 가는 거죠. 가격으로 판단하는 거니까요. 민중미술은 사회운동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현상은 그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비싸게 사 주면 좋긴 한데. 장삿꾼들은 돈 되는 걸 정확히 알잖아요.”

국내 미술계가 화두로 내 건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 신학철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돈 되니까, 팔리니까 시장에 나오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제가 잘 쓰는 표현인데, 나는 니들 욕하면서도 내 그림 팔아 먹는다 그래요. 안 팔아야 하는데 차라리…. 아유 참, 또 묵고(먹고) 살라고 하니. 허허”

사실 신학철의 그림은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김영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의 표현을 빌자면 ‘달달한 추상도 만만한 눈요기도 아닌, 딱딱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도록 강요하는’ 이미지들이다.

1980년대 콜라주나 유화 작품들은 피부와 살점, 근육과 힘줄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세고 강렬하다. 그러한 직접적인 이미지 언어로 한국 근ㆍ현대사를 기록해왔다. “사변적인 것보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믿는다”는 화백은 현대미술의 주류였던 ‘무(無)이미지’를 당당히 거부해 왔다.
신 화백 작품의 주요 컬렉터로는 2007년 작고한 민중미술 컬렉터이자 영창피아노 대표였던 청관재 조재진 씨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 등이 꼽힌다. 이후 일부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ㆍ공립 미술관에 기증 형태로 들어가게 됐다.

정작 신 화백이 갖고 있는 그림은 한 점도 없다. 다 팔았기 때문이다. 때론 ‘공짜’로 팔기도 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그의 과거 작품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돼도 화백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는 뜻이다.

그림과 함께, 그의 이름 석자도 내 줬다. 각종 정치, 사회단체에서 그를 필요로 하며 찾아올 때마다 신학철이라는 이름을 선뜻 내 줬다.

“1980년대에 다 줘버렸죠 뭐. 사회단체에서 기금전 하고 그럴 때 다 내줬어요. 100호짜리도 주고 그랬으니까. 민미협 화가들이 그랬어요. 자기 돈 들이고 몸으로 때우며 문화운동을 했죠. 내 그림은 흩어진 건 별로 없어요. 몇몇 컬렉터들이 가져 갔으니까요.”

▶표현의 자유, 10년의 저항=신학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모내기’ 그림이다. 한국 미술계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의 상징적인 그림이다. 신 화백은 이 그림 한장으로 석달 간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모내기 그림은 1987년 민미협 통일전 때 신 화백이 출품했던 작품인데, 1989년 한 청년단체에서 부채를 제작하며 이 그림을 사용했고, 당시 부채 제작을 맡았던 학생이 ‘이적 표현물 제작 및 운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신 화백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2000년 대법원이 원심 파기환송하며 징역 10월형의 선고 유예와 그림 몰수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판결 취소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신 화백은 모내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어갔다.

“그림을 위 아래 반으로 나눠 놓고는 위는 북한, 아래는 남한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통일의 이미지로 이걸 그린거예요. 통일된 세상의 무릉도원으로. 쓰레질 하는 모습은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쓸어내는 거고요.”

‘그들’이 백두산이니, 만경대니 이적 표현물이라고 주장했던 그림의 배경은 사실 신 화백의 고향 김천의 모습이다.

“가만 그려보면 고향이 꿈 같아요. 봄에는 보리밭이 파랗고, (볏짚, 밀짚으로) 이어놓은 지붕은 노오랗죠. 그리고 그 위로 분홍 살구꽃이 화악 피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해요. 무릉도원이죠. 그런 걸 자꾸 이 놈들이 만경대라고 하니. 허허.”

‘문제작’이 된 모내기 그림은 총 3점이 있다. 재판 때 압수된 원본, 호남지역 인사로부터 요청받아 신 화백이 똑같이 다시 그린 것 하나,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

“내가 급해서 또 화랑에 팔아 버렸네. 껄껄. 조만간 전시 때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아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붓을 들다= “헌신적이었죠. 모내기 그림 때 고생을 좀 했을 거예요. 이틀에 한번 꼴로 의왕구치소까지 면회오고 그랬으니까. 석달간 구치소 살다 나와 만나니 (살이 빠져서) 젖가슴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휴….”

이 화백의 아내는 2002년부터 파킨슨 병을 앓았다. 그런 아내를 13년 동안 보살폈다. 거실 천정 한 곳에 철사 옷걸이로 만들어 놓은 뱃줄(음식물을 공급하기 위해 위에 관을 연결시켜 놓은 것) 걸개가 떠난 아내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생각, 그림 생각만 했지 다른 건 못해요. 은행도 동사무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슴이 먹먹해오더라고요. 그런데 10년 정도 수업을 많이 했죠. 이제는 김치 담그는 거, 고추장, 된장 담그는 것도 다 내가 해요.”

다행히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잘 돼 있어 병원비로 고생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TV 뉴스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세상이 좀 바로 됐으면 싶어요. 민중미술이 뜨면 그 안에 있는 의미까지 같이 조명돼야 하는데 정작 그러질 못 하네요. 어찌보면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에 문화 역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려 놓을 것만 그려놓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다”는 그에게 그림은 ‘의무’같은 것이다.

앞으로 한국 현대사를 가로 20m길이의 캔버스에 압축시켜 놓은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의 앞 뒤 이야기를 조금 더 연결시킬 생각이다. 또한 4ㆍ19, 5ㆍ18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 역시 그의 힘찬 붓 끝에서 생생하게 기록될 예정이다.

▶에필로그=인터뷰 내내 들었던 생각. 민중미술이 단순히 값비싼 사치품으로 사고 팔리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민중미술가의 삶과 그 그림 안에 진정성이 함께 조명되기를, 신학철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 인물이 섣부른 진영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amigo@heraldcorp.com











고 문영태화백

 

 

민중미술가 문영태씨가 지난 9일 아침,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단다.

이틀 전 박진화화백으로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져 어려울 것 같다며 영장사진 한 장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아 

걱정은 하고 있었으나, 억장이 무너지는 전갈이었다.


문영태씨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존경하는 친구였다.

1980년대 중반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의 미술운동으로 문화의 힘을 결집시켜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이후 90년도에 들어와서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라는 사진집을 펴내는 등 사진작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글이다.

한 때 진보잡지에 연재했던 한국 문화에 대한 독보적 비평들이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도 중반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관장으로 일할 무렵이었다.

인사동 길거리나 술집에서 자주 부딪혀 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후원자로 술 친구로 한 30년 지낸 것이다.

 

지난 5월27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김포 자택에서 열리는 전시가 내일까지니 와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줄 알고 예정된 약속까지 취소하며 달려갔으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전시였다.

너무 실망스러워 “문형의 작품은 언제 보여 줄 거냐?‘고 투덜댔더니 ’한 번 해 볼까‘라는 긍정적인 말을 뱉어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날 찍었던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가슴이 미어진다.

 

다른 작가들은 인터넷까지 올려가며 작품을 못 보여줘 안달인데, 어찌 그토록 자신을 알리는데 인색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세상 돌아가는 꼴 더러워 몽땅 싸가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저승에서나마 당신의 전람회도 열고, 당신의 생각을 담은 글도 발표하구려.

그리고 미워도 이 세상 끝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좀 전해주시오.


여보시게 친구! 부디 잘 가시게.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들께 안부도 전해주고, 저승에서 만나거들랑 푸대접이나 하지 마시게...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2015,년 5월 28일, 그의 서재에서

 

 

2015년 5월 28일,자택 뜰에서

2015년5월 28, 서양화가 최선호씨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라며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2015년 5월 28, 사진가 정영신씨에게 저 물 건너가 북한의 개풍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015년 5월, 28일, 자택 거실에서 부인 장재순씨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

 2015년 5월, 28일, 필자와 함께

김준권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

김준권 작가가 올해 완성한 채묵 목판화 ‘푸른 소나무’. 새벽 시간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상서로운 푸른 기운을 내뿜는 모습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특정 지역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함께 담아낸다.

색깔별로 별도의 목판이 필요해 6개 판에 새겨 완성했다. 김준권 작가 제공

 

 

소담스레 눈이 쌓인 시골 마을, 서늘한 새벽 공기를 내뿜는 숲 속 정경, 분홍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의 꽃나무….

김준권 작가(58·사진)의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면 두 번 놀란다. 먹빛이 부드러운 수묵화 같은데 뾰족한 칼로 파낸 판화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는 청년 시절엔 민족해방(NL) 계열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

1980년대 미술계의 주류였던 민중 화가들은 민주화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목판화가 오윤(1946∼1986)은 40세에 요절해 전설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으로 논란을 일으킨 홍성담 작가(59)는 여전히 직설적 화법으로 시대와 불화한다. 투쟁의 도구가 아닌 예술의 본질로 돌아가 미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김 작가가 그런 경우다.

 

 

10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그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은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작가의 예술 여정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홍익대 미대 졸업 후 미술교사에서 해직 교사로, 민족미술협의회의 사무국장과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며 억센 선묘 위주의 선동적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는 민중미술운동이 동력을 잃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커다란 이념이 아니라 동네 고샅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감동을 표현할 기술이 없더군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투입됐던 거예요. 내가 옳다며 떠들던 것들이 실은 무지의 발로가 아닐까 회의했습니다.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5년 고무판에 유성잉크를 발라 찍어낸 선묘 위주의 ‘태극도’. 김준권 작가 제공

 

 

떠들썩한 세상 한가운데 서 있던 그는 30대 중반이던 1991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산골짜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발적인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서 전통적인 수묵인화기법을 익히고, 목판화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다색목판화 우키요에와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웠다.

한중일 3국의 목판화 문화를 섭렵한 결과물이 채묵 목판화다. 젊은 시절 여느 목판화가들처럼 서양 종이에 유성물감으로 찍어냈던 그는 지금은 한지에 먹을 안료로 쓴다. 유성판화는 누가 찍든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수묵판화는 먹의 농도, 목판과 한지의 수분 함량에 따라 작품들이 다 다르다. 그만큼 표현 영역이 넓지만 수분 조절이 어려워 정교한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소재도 바뀌었다. 머릿속 이념을 담아내던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발 디디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눈으로, 발로 사생하고 작업실에 앉아 되새김질하며 목판에 새겨낸다.

그가 30년간 그리고, 파고, 찍은 작품은 550여 점. 작품마다 5, 6개의 판을 새겼으니 3000개가 넘고, 작품당 20점 미만의 에디션을 찍었으니 6만 장이 넘는 판화를 내놓은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250여 점을 전시한다.

작업실에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건 작가는 “목판화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일”이라며 “내가 살려낸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고 했다. 29일까지. 02-733-1981

동아일보 /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강요배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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