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운현궁의 전경
(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흥선대원군의 거처이자 고종의 잠저였던 서울 운현궁의 전경.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를 올린 노락당을 중심으로 노안당, 이로당이 배치돼 있다.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cityboy@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조선시대 말기는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적통이 끊겨 멀리서 왕가의 친척을 데려다 국새를 맡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권문세가가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19세기 중엽에 즉위한 철종은 강화도의 촌부였고, 고종은 쇠락한 왕가의 자제였다

 

서울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이 평범한 소년 시절에 살던 잠저(潛邸)이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생활했던 가옥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아들을 주상으로 만들고, 스스로 그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사실 대원군은 신왕의 친아버지를 가리키는 칭호다. 조선시대에 대원군으로 추존된 인물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중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이하응뿐이었다.

 

그는 본래 인조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아버지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고손이 됐다. 1820년에 태어나 10대에 부모를 여읜 뒤 24세에 흥선군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이때는 외척의 세력이 워낙 강해 왕손이라는 지위가 결코 달갑지 않은 시기였다. 자칫하면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하응은 흥선군이 된 뒤에 '상갓집 개'처럼 살았다. 김동인이 쓴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에는 그가 굴욕을 감내하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행색은 "해어진 도포, 떨어진 갓,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표랑객" 같았고, 생활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투전판이며 술집을 찾아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깨를 겨루고 배회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는 모멸과 수치에 대해 무신경해질 정도로 바닥에 떨어진 삶을 영위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철종이 왕좌에 올랐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였다.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과 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다. 당연히 안동 김씨는 세도가로서 막후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철종 8년에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의 존호는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에게 넘어갔다. 풍양 조씨인 그는 안동 김씨 천하를 뒤엎고자 했다.

 

흥선군은 신정왕후에게 접근해 후사가 없는 철종이 붕어하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지명해 달라고 설득했다. 철종과 항렬이 같은 자신보다는 나이가 어린 아들인 명복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1863년 12월 철종이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흥선군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마침내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명복이 상감 자리에 오르면서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흥선군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그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보잘것없던 그의 사저 역시 "정치의 중심지이자 이 나라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운현궁의 중심 건물, 노락당(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서울 운현궁에서 위치나 규모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인 노락당. 정면 10칸, 측면 3칸 건물로 지붕이 겹처마로 처리됐다. cityboy@yna.co.kr

 

◇ 도심 속에 숨은 조선 왕실의 고택 

 

'운현'은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는 고개를 의미한다. 기상청에 해당되는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됐으나 계속해서 명칭이 통용됐다고 한다.

 

고종이 등극하면서 운현궁은 궁궐 같은 집으로 변모한다. 곧바로 증축 공사가 시작돼 1864년 주요 건물이 속속 준공됐다. 

 

규모가 가장 컸을 무렵에는 왕궁처럼 사대문이 있을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후문만 남아 있고, 전체적인 면적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늘날 운현궁의 입구는 인사동에서 삼일대로를 건너면 보인다. 자그마한 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경비와 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처소인 수직사(守直舍)가 시야에 들어온다. 

 

본채로 향하는 솟을대문은 수직사 옆에 있다. 유난히 높은 문 앞에는 말이나 가마에서 오르내릴 때 쓰는 노둣돌이 놓여 있다. 솟을대문을 잠그는 장치는 원래 바깥쪽에 있었으나 1996년에 바로잡아 현재는 안쪽에 설치돼 있다.

 

운현궁은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돼 있다. 그중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노안당이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노안'이라는 당호는 '노인을 편안하게 한다'(老子安之)는 논어 구절에서 유래했다. 물론 노인은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을 뜻한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평상시 거처하는 사랑채였으며, 그가 1898년 임종한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은 12세에 군주가 된 고종을 대신해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오히려 대원군의 목소리가 컸다.

 

그는 노안당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논의했다. 붕당의 진원지로 지목된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도 과세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개혁 정치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대놓고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72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차츰 정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솟을대문의 자물쇠가 바깥쪽에 있었던 이유도 대원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면 6칸, 측면 3칸인 노안당에서 먼저 눈여겨볼 곳은 편액이다. 대원군의 먼 친척이자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 만들었는데, 필치가 부드럽고 독특하다.  

 

노안당 지붕의 차양과 노락당의 공포(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운현궁 건물에는 처마 앞쪽에 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차양이 설치됐다(왼쪽). 한편 노락당 건물에는 기둥머리에 날개 모양의 장식인 공포가 달려 있다(오른쪽). cityboy@yna.co.kr

 

지붕도 눈길을 잡아끈다. 처마 앞쪽에 햇볕과 비를 막는 차양이 달려 있다. 차양은 나무막대기 위에 판재를 깔고 함석을 덮은 형태로,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처럼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노안당은 편액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는 누마루, 왼쪽에는 행각이 있다. '영화루'(迎和樓)로 불리는 누마루는 대원군이 손님맞이를 위해 사용했던 장소이고, 행각은 대원군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운현궁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노락당이다. 노안당과 함께 세워진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광대하다. 운현궁 건물 중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날개 모양의 장식인 공포를 달아 멋스러움을 표현했고, 지붕도 겹처마로 처리했다.

 

노락당은 집안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를 올린 곳도 노락당이었다. 1866년 두 사람의 가례가 거행됐고, 모든 준비는 노락당에서 이뤄졌다. 

 

노락당 북쪽에 있는 이로당은 고종의 혼인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869년에 지어졌다. 늘어나는 살림을 감당하지 못해 안채를 따로 만든 것이다.

 

'두 노인을 위한 건물'을 의미하는 이로당은 금남의 구역이었다.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였던 부대부인과 여성들이 기거했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크기는 노안당과 비슷하며, 세부적인 장식도 흡사하다. 

 

노락당과 행각으로 연결돼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구조는 무척 폐쇄적이다. 입 구(口) 자 모양을 띠고 있으며, 안쪽에 따로 정원이 있다. 밖에서는 정원에서 하는 일을 볼 수 없도록 설계됐다. 

 

이로당 주변에는 소소한 볼거리가 많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얼음을 보관하는 석빙고와 대원군이 난을 올려놓고는 했다는 무승대(茂承臺)가 보인다. 또 고종이 어렸을 때 즐겨 오르던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비석인 경송비(慶松碑)도 눈에 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서울 운현궁에는 조선 후기의 정세와 운현궁의 특징을 알려주는 전시관이 있다. 운현궁의 전체적인 모습과 당시에 사용됐던 생활 용품 등을 엿볼 수 있다. cityboy@yna.co.kr

 

이로당을 둘러보고 다시 마당으로 나오면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운현궁을 굽어볼 수 있는 축소 모형이 만들어져 있고, 문방사우와 나전칠기함 등 운현궁에서 쓰인 유물이 진열돼 있다. 

 

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복식, 흥선대원군이 펼쳤던 각종 정책과 외세가 밀려들어왔던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는 자료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은 어떻게 공공에게 개방된 문화재가 된 것일까. 

 

대원군의 장자인 이재면에게 넘어온 운현궁의 소유권은 대대로 이어졌다.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은 혈육이 없었으나 고종의 후손을 양자로 삼아 물려줬다.

 

해방된 뒤에는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관리했다. 그러나 그가 1991년 양도 의사를 밝혔고, 2년 뒤 서울시가 매입해 정비 작업이 이뤄졌다.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어스름이 깔린 운현궁(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어스름이 깔리자 서울 운현궁 담장에 주홍빛 조명이 켜졌다. 운현궁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여름에 한해 야간 개장을 하기도 한다. cityboy@yna.co.kr



잊혀진 대한조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우리의 마지막 황실 사진자료로서 잘 간직해 후세에 전해야합니다

서울대박물관이'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특별 사진전을 개최했다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호머 헐버트씨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
.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 독일어로‘Palastdame’(궁녀),
영어로‘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상중의 연미복 입은 고종황제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영녕전 참배의식중인 영친왕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촬영)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시절의 덕혜옹주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1월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하는 영친왕

 

홍릉입구의 홍살문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해지지 않는 문이다.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융희황제(순종)의 장레식(국상)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나인들 모습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사진인듯.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교과서에 쓰여진‘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융희황제(순종) 장레식(국상),국상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촬영)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영친왕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19년2월9일 고종황제가 승하한 창덕궁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은 이 사진은 1918년1월21일 촬영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가마에 탄 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1월13일오후9시,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으로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사진
1962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左부터)
 

 한자리에 모인 구한말 황족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은 사무관

대원군의 생일 기념사진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통감을 설치,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길은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2월 3일, 73세로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의 순종과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내용 미상

 

소재 불명

 

 운현궁 양관

 

창경궁 궁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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