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70년에 펼친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스크랩] 오마이뉴스 / 박 도 / 20. 6. 24

 

남진하는 인민군 (1950.6)

 

6,25전쟁 70년

 

낙동강변의 시신(1950년 9월).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70년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고령이다.

그때를 생생히 증언할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나는 6.25전쟁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또한 나는 6.25전쟁 사진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기념관 등지에서

수천 장의 사진을 수집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이 기사에 남기고자 한다.

1950년 내가 여섯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내 고향 구미는 6.25전쟁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다부동전투의 배후지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시민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혹은 주둔 이후에야 피란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구미 북녘 김천 쪽에서 '쿵쿵' 대포소리와 '뚜뚜뚜' 따발총소리

그리고 고약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피란봇짐을 쌌다.

남자들은 가재도구를 담은 피란봇짐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종종걸음으로 무작정 남쪽으로 떠났다.

뙤약볕 속에 애써 낙동강 나루까지 갔지만 그곳에 이미 진주한 인민군들이 호통을 쳤다.

"남조선 인민들, 미제 쌕쌕이(폭격기)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라우."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딩굴고 있는 피난민 시신들 (1950.8.25)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로 돌아오다가 구미 광평동 사과밭을 지날 무렵,

미 공군 F-84 세이브제트기(일명 '쌕쌕이') 공습(기총소사)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우리 가족들은 가재도구를 모두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어른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땅콩밭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나는 여섯 살 어린이로 미군 전투기의 무서움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 전투기가 떨어뜨리는 폭탄과 내뿜는 기총소사 순간을 보려고

땅콩밭에서 일어났다가 할머니께 뒤통수를 된통 쥐어 박혔다.

한 30분 정도의 쌕쌕이 공습이 끝나자 여기저기 피란민 시신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 숨어 다행히 무사했다.

 

광복4주년 기념식을 준비중인 한국군최고지휘관들 신성모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제독,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리우 자유중국 사절단장, 신태영 장군 등이 보인다. (1949.8,15)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신 더미들

 

그해 가을 피란에서 돌아오자 동네사람들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는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때 숱한 젊은이들이 입대했지만 상자 속 하얀 유골로 돌아왔다.

그때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했다.

"네가 군대에 갈 때는 38선은 없어지고 통일이 될 거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서 전역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즈음에는 내 손자뻘 젊은이들이 38선 대신에 6.25전쟁 이후 새로 생겨난 휴전선을 사이 둔 채

동족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아직도.

마침 6.25전쟁 70돌을 맞아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이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을 펼치자 70년 전 6.25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표지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미군과 소련군이 서울과 평양에 진주하는 모습,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남하하는 인민군 모습,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장면,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굶주린 채 죽음의 행렬을 하는 국민방위군 모습, 학살된 양민을 젓갈 담듯 매장하는 장면...


나는 눈물어린 눈으로 이 사진집을 봤다.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

논이나 밭 그리고 들길 도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신들,

전투기들의 융단 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그리고 탱크 캐더필러(바퀴)가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쟁쟁하게 들려왔다.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웅변보다도 더 강하게 진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해도 사진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

 

57미리 무반동총, M1소총으로 전투하는 유엔군

 

새삼 돌이켜보는 인간의 무지함

 

불나방은 제 무리가 불에 타죽는 것을 빤히 보고도 자신은 예외라고 여기고

불에 뛰어들다 끝내 타죽고 만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가? 전임 대통령이 무리한 장기 집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당한 것을 보고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같은 길을 거듭하다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건 역사에 대한 각성과 배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일수록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해 쌓아가고 있다.

한 역사학자(김성식)는 <내가 본 서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


서구인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보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도 주저한다.

그들은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바른 역사를 일깨워주고자 그대로 보존한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들은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거듭 하거나

역사의 시계 침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에서 유엔군 수송선을 기다리는 젊은 부부(1950년 12월)

 

분단의 서막 그리고 죽음의 행렬

 

그럼, 6.25 70주년을 맞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사진집 일부를 소개한다.

①미군 소련군 서울 평양 진주 : 이 장면은 우리나라 분단의 시작이요, 6.25전쟁의 출발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손을 잡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에서 승전 이후 두 나라는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 최전선이 한반도 38선이었다.

그래서 38선은 화약고로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진주하는 소련군 (1945.8)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 (1945.9)

 

②죽음의 행진 국민방위군 행렬 : 6.25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현역군인과 경찰, 학생을 제외한 17세부터 40세까지 청장년 50만 명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했다.

이들을 남으로 후퇴시키면서 그들에게 돌아갈 피복 값과 급식비를 군 고위층이 착복했다.

그래서 징집된 국민방위군 상당수는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그들의 죽음 행렬이다.

 

후퇴하는 국민방위군 행렬

 

③장진호 작전 중 동사한 미 해병대 : 1950년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적을 형편없이 깔보고

기후도 산악 지형도, 곧 전쟁의 기본인 천문과 지리도 무시한 무모한 졸전이었다.

적진 깊숙이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중국군과 추위를 맞닥뜨리자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동사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추위가 적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긴 채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그대로 동사했다. 그래서 미군은 아직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것이다.

 

장진호 전투중 동사한 미해병대 시신들

 

④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 1953년 정전이 됐지만 아직도 휴전상태로

한반도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판문점 정전 회담장 (1965)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은 모두 432쪽, 300여 장의 사진으로 

6.25전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남긴 사진이 많다. 

하지만 그 사진들을 '어떤 맥락에서 보여주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이 사진들을 정리 편찬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전선 시찰 중 유엔군 소속 기자와 인터뷰하는 이승만 대통령(1950년 9월 9일)

 

나는 감히 이 사진집을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줘야 할 

'6.25전쟁 비망록 및 징비록'이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 

이 사진집은 우리 겨레가 길이 보존해야 할 사료가 되리라 믿는다. 

전쟁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자만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주민들이 인민군 탱크를 환영하고 있다(1950년 7월)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촛불시위 (2002)


’사진가를 찾아서‘ 여덟 번째 브레송 기획전 ‘신동필론, 부르지 못한 노래“ 개막식이 지난 22일 오후6시30분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신동필씨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김보섭, 김봉규, 성남훈, 강제욱, 안세홍, 고정남, 김영호, 윤길중, 남 준, 곽명우, 정영신, 이영욱, 이한구, 차홍규, 김진석, 박홍순, 고형모, 양재호, 안옥철, 임지원, 최승희, 김종현, 장병국, 신미식, 신희수, 이현동, 이영준, 노원섭, 조태용, 유승준, 박춘선, 김명정, 우종성, 최문선, 조웅현, 최지은, 정윤숙, 김현숙, 한선정, 한선희, 이정원, 민선희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부르지 못한 노래’전은 거리의 투사로 역사의 증인으로 온 몸을 내던지며 기록해 낸 작업으로 새로운 형식이나 창의력보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 왔던 그 시대 상황 자체만으로 감동을 준다. 이 번 전시와 함께 징용인들의 한을 담은 ‘교토40번지’ 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30호로 출간되기도 했다.



광부 이춘하



여지 것 사진가 신동필 사진을 본 것은 2005년도 ‘강원다큐멘터리 사진사업’에 내놓은 사진이 전부였다. 그 당시 난 ‘두메산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는 “탄광촌을 지키는 막장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이 강원다큐멘터리 사진 사업에 선정되며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의 사진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잿빛 탄광촌이 카지노의 화려한 불빛에 묻혀가는 아픈 시대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탄광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은 인간 존재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줄기차게 민족으로서의 핏줄을 내세워 온 그의 작업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문제로 옮겨 간 시점인 것 같았다.



교토 40번지



그리고는 한동안 사진판에 비켜 서 있던 그가 10여년 만에 사진을 내놓은 것이다. 처음 보여 주었던 “탄광촌을 지키는 막장 사람들”과는 달리 광부 이춘하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 막장 노동자를 통해 노동자들의 위기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작업이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비전향장기수문제, 입양아문제, 강제징용 일세대인 ‘교토 40번지“, 위안부문제, 원폭피해자문제 등 한 민족의 아픔을 골고루 다루고 있었다.

사실 말은 쉽지만, 돈 안 되고 힘만 드는 이 같은 작업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아픔을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함께 아파하지 않고 찍을 수도 없지만, 찍더라도 금방 본색이 드러난다.



명동성당 (1991)


그런데, 그가 초창기에 작업한 민주화운동은 나도 기록했는데, 왜 신동필을 그 당시엔 몰랐을까? 모두 민주화를 열망하며 분노한 것은 같았지만, 그는 민주화운동의 주체인 학생 측 입장이었고, 난 한 걸음 물러난 일반인의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 완장 없이 현장을 어슬렁거렸으니, 그의 눈에는 경찰 프락치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한국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권 철, 양승우와 함께 각각 정치, 사회, 민족 문제들을 일본에서 기록한 삼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특히 그가 작업했던 강제징용자 일세대의 삶을 다룬 ‘교토40번지’를 유배된 조선인을 가둔 유형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채 버려 진 그들이 겪는 가난과 질병, 정신분열증 등을 보여주며 파렴치한 일본인들의 염치와 치욕의 역사를 눈감은 대한민국 정부를 나무라고 있었다.



비전향장기수 (2000)


그런데, 사진전을 열며 그가 사진을 그만 두겠다는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왜 사진에 대한 미련을 떨치려는지, 그를 좌절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난하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설음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암담한 현실이나 끼리끼리 나눠 먹어 온 사진판의 오래된 갑질 권력에 대한 환멸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전시한 사진들을 조건 없이 관련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단다. 정신대할머니들의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자료를 모두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 사진이란 결국 당사자들의 몫이기는 하지만, 사진을 그만 두겠다는 그의 말에 구체성을 띈 것이라 더 가슴 아프다.


예술은 신동필의 사진처럼 인간의 존엄, 진리, 정의 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사진들은 어두웠던 터널을 함께 뚫고 왔던 우리 모두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우리 시민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그 위에서 전율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작품이란 이처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사진비평가 이광수씨가 말했다.

이 전시는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3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가 신동필씨





-아래 사진들은 개막식과 뒤풀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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