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 - Image


주태석展 / JUTAESEOK / 朱泰石 / painting
2018_1017 ▶︎ 2018_1030 / 일,공휴일 휴관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유채_80.3×10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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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0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노화랑

GALLERY RHO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관훈동 103번지)

Tel. +82.(0)2.732.3558

www.rhogallery.com



그림을 그리고, 본다는 것에 관한 의미: 주태석 개인전에 붙여 ● 주태석의 「자연-이미지」 연작은 숲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나무를 그린 것이라고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숲이나 나무를 그대로 캔버스로 옮기려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사용한 색채도 그렇고 형태도 숲속에서 보았던 우리의 무심한 기억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가 숲이나 나무가 가진 형태만을 오롯이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많은 시간을 붓과 씨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는 관람자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여나 이런 상상이나 생각 없이, 그가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1989년까지 발표했던 「기찻길」 시리즈와 같은 범주로 묶어버리는 편견을 가진다면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소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원적인 의문이자 질문이지만, 첨단과학시대라고 하는 21세기인 지금도 예술에 관해 완전한 답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그림을 그리지"하는 것이다. 긴 예술의 역사에서 삼사백 년 전에야 이름을 얻은 미학과 미술사라는 학문도, 겨우 일백 년 넘은 예술학이라는 분야에서도 이 질문에 답을 내놓긴 했지만, "그렇겠지" 할 정도일 뿐인 것 같다. 어떤 사건을 기록하거나, 통치자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조각을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 그린다는 것(여전히 대부분 사람은 그림 혹은 미술이라는 예술을 이렇게 알고 있다.)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그림보다 더 경제적으로 생생하게, 더 과학적으로 아름답게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실보다 더욱 현실처럼 느끼게 하는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리오타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처럼 실재와 가상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림이 무언가를 묘사해 기록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기술 혹은 저장매체라고 인식하는 것은 21세기에 맞지 않는 오류일 뿐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5


그리고 '본능설' 혹은 '유희설'로 본다는 주장은, 즉 인간본능 중에 그림을 그리려는 혹은 즐기려는 기재가 유전자에 새겨져있다는 답은 대부분 사람에게 동의를 받기 어렵다. 필자도 여기 대부분 사람 중에 포함된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의 본능에 미술을 즐기려는 기재가 있다면 카페에 가는 것처럼, 극장에 가는 것처럼 미술관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흔하지 않다.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고, 나하고 상관도 없으며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21세기에도 회화(여기서는 평면작품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주장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이겠지만, 나름대로 이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림이라는 예술이 얼마나 우리의 사고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리는 주장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이나 학설이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는 아주 적절한 해석이었고, 어느 시기에는 딱 들어맞는 학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누구나 동의하기에 적절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왜 그림을 보고 그리는지에 대한 21세기 사회와 문화지형에 들어맞는 주장이나 학설이 있을 것이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예술행위에 대한 회의(懷疑)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고 논리정연하고 진지하게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나 온갖 학설을 끌어다 설득할만한 재주는 없어도, 필자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치 우주 끝에 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끝에 또 다른 우주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유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10


주태석은 80년대까지 「기찻길」 시리즈로, 이후부터는 「자연-이미지」(자연이라고 하지만 나무가 이루는 풍경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시리즈를 발표해왔다. 기찻길은 다니던 대학 근처에 철길이 소재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철길을 소재로 해서 그린다는 측면에서는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학을 졸업할 시기의 미술계에 일어났던 현상 중에 하나라고 단순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함이 없는 단순함이라는 것으로 70, 80년대에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고정적 시각에 대한 관습 혹은 관념에 대한 규범위반을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지 모른다.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림 소재가 된다는 생각, 그것도 가능한 보이는 그대로 캔버스로 옮긴다는 의도를 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그려야 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고, 상상의 여인도 아니라,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흔한 풍경을 그려서 작품이라고 발표했을 때 관람객들은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생경함에 익숙해지는 일에, 즉 이미 익숙해진 관습에 대한 위반 혹은 반란이라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쿠르베의 생각은 곧 젊은 화가에게 수용되어 불과 얼마 뒤 인상파가 등장했고, 인상파 그림을 이해하는데 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따라서 기찻길이, 풍경이, 나무가 소재로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대한 반란을 보여준 그림을 주태석이 의도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완전히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완성된 작품의 결과만을 놓고 본 것일 뿐이다. 이런 해석만으로는 그가 그리는 동안의 노력과 고민은 읽을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그의 고민을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으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림이 무엇인지 가장 크게 고민했을 것이고 그것을 찾아서 캔버스와 씨름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리는 게 좋은지, 저렇게 그리는 게 좋은지 수많은 고민의 밤낮을 보냈을 것이고, 저번에는 녹색으로 그렸으니까 이번에는 갈색으로 그리면 어떨까 궁리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스스로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무엇인지, 숲과 나무에 대한 형태와 배치, 색의 사용에 있어서 조화, 여백에 대한 효과 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캔버스를 마주한 채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방법을 찾고 그것에 대한 선택 그리고 이어서 수정과 수정, 그마저도 어느 순간 자신의 선택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캔버스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상황을 겪으며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 많은 시간을 자신과 싸우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왜"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호기심이 없다면 이 세상은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5


예술 장르 중에서 미술, 특히 현대미술만큼 매력적인 것만큼 없다. 우리가 만든 상식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재치있는 반격, 진리라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표출한다. 그것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시각적인 기호로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미술의 역사는 규범을 파괴한 역사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비-정치적으로, 비-강제적으로, 비-지배적으로 기존의 규범에 대한 반추(反芻)를 강요한다. 이런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에 R. Mutt라고 적당히 쓰고 작품이라고 주장한 이후, 현대미술은 규범을 위반하는 것이 그것의 존재목적인 것처럼 이해되었다. 무언가 되돌아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회의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반성(反省, reflection)을 말하는 것이다. 철학사에서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겼다고 인정받는 '프리드리히 헤겔'은 반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상했다고 평가할 정도이니까, 현대미술에서 반성은 현대미술이게 하는 최고의 가치이면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태석의 고민은 바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의식에 대한 자연과 나무에 대한 인식의 반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8


그림 그리기에서 어떤 의도도 없이 저절로 완성된 것은 이미 그림일 수 없다. 주태석의 「자연-이미지」는 보편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개별적이면서 구체적인 사적(私的) 경험을 축적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고민(비판과 검토라는 반성의 차원으로까지 진전하면서)하고 반성을 통하여 자연을 재해석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언어가 관람자에게 은밀하게 보편성(이것에 관한 기다란 또 다른 글이 필요하다)을 획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면서 교정하는 자신의 변혁에 관한 활동의 결과가 「자연-이미지」 그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는 1961년 12월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지켜본 보고서를 1963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말하는데, 악(惡)은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사랑처럼 언제나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중년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반성과 후회는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어떤 계기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아이히만의 잘못은 '전적인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에서 참고) 만약 현대미술 작가가 아이히만처럼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그림을 그린다면, 자신에게 혹독한 반성의 기재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속한 사회화 자연에 대하여 비판적 의식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예술이라는 장르 자체는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예술의 존재가치는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0.9cm_2017


주태석의 그림은, 그것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원리인 반성의 결과로 그려진 것으로 파악하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면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예술을 즐기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내리면 정치적, 사회적, 객관적 다양한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는 과정 즉 반성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런 반성의 기재를 통해 자신의 삶에 관한 판단 혹은 가치, 더 나아가서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반성 혹은 판단능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없어도, 적어도 우리의 삶에 필요한 정도는 각종의 문화예술 소비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서 화랑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혹은 책으로 미술에 관한 글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술을 즐기고 간직해왔던 역사에서 그 증거는 너무나 많다. 다만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할 만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만한 주관적 경험과 같은 무언가가 부족할 뿐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7


노화랑의 『주태석 개인전』에 전시되는 그의 작품은 자연에 관하여 자신이 느낀 것을 생각하여 만든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자연에 대한 경험의 기록인 것이다. 이런 주장에 관하여 혹시, 누군가는 일부 동의할 수도 혹은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그가 그린 어떤 한 작품(물론 작품의 구성은 모두 다르지만, 임의로 한 작품을 선택하여 말한다.)을 골라 천천히 들여다보면, 캔버스에서 눈앞에 가장 가까운 곳에 굵은 나무기둥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무껍질이며, 옹이가 있는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기둥은 캔버스 화면에서 중심역할을 기재이다. 그 기둥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는 잎사귀가 없다. 뒤에 있는 기둥은 훨씬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색도 여러 색이 아니라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그 뒤 배경이 되는 먼 나무는 기둥에도 가지에도 잎이 무성하다. 이 역시 간략하게 묘사된다. 그 뒤에 또 나무들이 있다. 이렇게 주태석은 나무로 구성된 숲을 캔버스에서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여러 층을 나무로 구분해서 위치해 놓음으로써 캔버스 공간을 3차원으로 전환하는 눈속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색채의 조합이나 배경을 어떤 식으로 나누느냐에 따라 작품 감상의 차원이 바뀐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관람자가 충분한 미적 경험 혹은 판단훈련이 쌓여야만 눈치를 챌 수 있을지 모른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60cm×2_2018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고 마지막에 『판단력 비판』을 저술했다. 여기서 비판이라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성과 같은 궤도에 있는 정신활동이며, 판단력은 무언가 옳고 그름 혹은 아름다움(여기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참다움과 선함을 모두 지칭한다. 즉 眞善美를 지칭하는 것이다.)에 관한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력 비판'이란 자신이 올바르게 자신의 행동과 인식을 판단할 수 있는 반성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언어와 사고에서 스스로 교정하여 변화하고 발전하여 최고의 아름다움과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 그것이 판단력 비판이고 이것은 각자의 삶을 성숙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우리의 일상은 반복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의 반복에서 우리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더 좁게는 나를 둘러싸고 관계하는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와 지역이 있어 이것들에 의해 나를 둘러싼 사회구조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순간순간 선택하고 판단한다.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혹은 목적없는 시간을 보내거나, 한 곳에만 매달리는 맹목적인 집착에 빠지지 않게 우리의 삶을 진전시켜야 한다. 그림을 보거나 감상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진전시킬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술이 존재해왔던 가장 분명한 이유는 여기에 지금까지 존재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미적 체험 혹은 문화소비가 개인의 심미적 경험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가치를 모색해 왔던 것이다. 이것만큼 그림을 그리고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없을 것이다.



주태석_Nature - Im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200cm_2018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말하면 지금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태석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을 강제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따지면 우리는 그림을 보는 최우선의 전략은 즐겁게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것 이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적합한 태도인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에 말이다. ■ 임창섭




Vol.20181018e | 주태석展 / JUTAESEOK / 朱泰石 / painting


단짝 Buddy-buddy


박형진展 / PARKHYUNGJIN / 朴炯珍 / painting
2017_0621 ▶ 2017_0705 / 일요일,공휴일 휴관



박형진_너에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5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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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진 카페_http://cafe.naver.com/munijini.caf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노화랑GALLERY RHO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관훈동 10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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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보낸 정원에서의 일상 ● 박형진의 그림은 재현회화지만 그 형상화 하는 어법이 좀 특이하다. 상큼하고 감각적이며 앙징맞도록 간추려 도상화 한 형태는 실제성에서 벗어나있고 그것들의 크기는 다분히 왜곡되고 역전된다. 입가에 웃음을 거느리게 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키우며 더없이 맑고 예쁜 이미지들이 귀엽게 출현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소녀나 개의 형상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잎사귀와 새싹, 딸기나 사과 등이 중심부를 가득 채웠다. 그러면 그와 함께 등장하는 다른 것들은 지나치게 작게 위치해있다. 모든 게 단순, 간략하게 추려지고 자의적으로 변형되었으며 만화나 삽화이미지에 근접해있다. 다분히 '팬시'하고 감각적인 면도 모성애적으로 감싸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반려견과 애완동물, 주위의 식물들을 사랑스럽게 보살피고 그것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는 과정 그 자체를 자신만이 형상 언어로, 이미지로 수집하고 기록하듯이 그린다. 이 행위는 단지 특정한 회화적 행위,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반려견과 애완동물의 보살핌, 사랑과 희생 혹은 나 이외의 다른 존재, 생명체에 대한 이타적 배려란 자아 중심이나 인간 본위의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 따스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런 작가의 시선과 마음이 사뭇 유달라 보이는 것이다.


박형진_너와 함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1.7×91.2cm_2017


박형진_너와 함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1.7×91.2cm_2017


몇 가지 원색만이 시원하고 대담하게 칠해져있어 평면성이 강화되어 있는 화면에는 부드럽고 약간 눅눅해 보이는 중간 톤의 윤곽선에 의해 형태들이 그려져 있다. 배경은 하늘과 흰 구름, 붉은 땅, 녹색의 풀밭이 거의 전부다. 심플하다. 그 사이로 사람(소녀)과 개만이 한 쌍을 이루면서 흡사 인간과의 관계인 것처럼 다양한 사이를 풍경처럼 연출한다. 자신의 작은 정원 혹은 작업실에서 반려견과 함께 보내는 비근한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이 문득 그림으로, 마치 싱그러운 아침의 새싹들처럼 '쑤욱' 올라온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은근히 마음이 좋아진다. 의도적인 연출이나 장식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그린다면 나오기 힘든 '씬'이다. 그러니까 삶과 마음이 진실 되게 기울어져야 가능한 그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형진_심쿵멍멍+아이신나+심쿵멍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3cm×3_2017


이렇게 작가는 인간과 자연, 생명체 간의 교감을 여러 정황적인 풍경으로 보여준다. 자신과 자신의 반려견, 그 둘이 관계를 맺으며 사는 다양한 양상들을 달콤한 꿈처럼 그려내고 천진한 상상력으로 서술한다.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의 무식적인 분출이거나 낮 시간 동안 겪어낸 수많은 경험들을 추려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져 나온 것일 텐데 박형진이 보여주는 '꿈같은 장면'은 자신의 반려견 그리고 식물성의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진정으로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밀려나온 행복에 대한 희망/꿈일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몸과 언어를 지니지 못한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서의 소소한 경험, 꿈, 기억을 인상적으로 가꾸어낸다. 삶의 공간을 정원으로 여기고 그 안에 자신과 함께 하는 것들을 배치하고 작물을 심어 가꾸듯이 그려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의 작업 주제는 '정원'이었다. 아버지의 옥상정원에서부터 시작해 사과농사를 짓는 시골의 과수원(정원), 개와 고양이를 돌보는 양평의 작업실 공간(정원) 풍경으로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정원은 파라다이스에서 연유한다. 사막으로부터 나무와 풀과 물이 있는 인위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낙원, 파라다이스를 가설한 것이 정원이었다. 그것은 외부와 둘러친 의도적인 벽이다. 불모의 환경에 저항하는 공간이자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화한 흔적이다.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속에 있는 정원이란 단어의 어원(ghorto, 라틴어로는 hortus)을 보면, 정원은 우선적으로 닫힌 장소를 지시한다. 정원은 주위의 고장에서 분리되고 끊기면서 내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이는 본질적으로 경계를 필요로 하니, 이 경계로 인해 그 안의 자연은 보호를 받고, 그리하여 자체적으로 완성되면서 다듬어져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정원은 스스로를 억제하면서 격리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박형진의 정원이란 자신의 사랑스러운 반려견들과 행복을 도모하는 적극적인 공간이자 뭇생명체와 교감하고 관계를 설정하고 서로 배우고 참고 견디며 조금씩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장소성으로서의 의미가 짙다. 우리는 누구나 참혹한 외부와 격리된 자신만의 정원에서 사랑스런 대상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이해하고 싶고 나아가 행복해지기를 꿈꾼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동물, 식물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박형진_좌쥐우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3cm_2017


박형진_설탕 뿌린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x45.7cm_2016
박형진_설탕 안 뿌린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x45.7cm_2016

근대에 들어와 개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적인 영역에서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써 개를 다룬다.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는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되고 있으며, 그 붙임성 덕분에 인간의 일상생활에 활기를 넣어주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시대에 처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상호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으로 파고 들어와 대체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욕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 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반려동물과의 소통은 인간간의 제도적 소통(언어, 문자 등)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여러 잔인한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니 박형진의 그림은 반려견을 키우고 사랑하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출발해 사뭇 보편적인 사회현상 또한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귀여운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이 되어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삶에 커다란 낙이 되고 자신의 삶에, 감수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서는 희생과 사랑, 배려와 관계 등에 대한 성찰 까지 동반해주는 여러 정황 등을 효과적으로 '시각화' 하고 싶은 것이다. 다채로운 표현기법에 대한 고민의 흔적, 그러니까 비교적 단순한 화면에 회화적인 터치와 붓놀림을 슬쩍 강조하거나 표면의 감각적 효과에 대한 고려 등이 그런 시각화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표면의 회화적 질이 상당한 감각을 발생시키는 그림이 그것이다. ■ 박영택



Vol.20170621b | 박형진展 / PARKHYUNGJIN / 朴炯珍 / painting


청전 이상범·소정 변관식·운보 김기창·월전 장우성
노화랑, 근대畵仙 4인전…우리 수묵화 재조명

 

 

 


깊어가는 가을 화단에 묵향(墨香)이 가득하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서화전 `추사정화`전이 성황리에 관람객을 맞고 있으며 인사동 골목 골목마다 그윽한 먹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라아트센터에서는 조선 남종화맥을 엿볼 수 있는 운림산방 4대전이 열리고 있고 여기에 40년 인사동 토박이 화랑인 노화랑에서도 `근대의 화선(畵仙) 4인`전을 연다.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6), 그 다음 세대인 운보 김기창(1913~2001)과 월전 장우성(1912~2005)이 화폭의 주인공들이다. 수묵화 20여 점이 걸린 전시장에 들어가면 또 다른 유려한 가을이 펼쳐진다.

청전의 대표작 `추경산수(사진)`는 각각 새참과 지게를 지고 가는 농촌 부부의 모습을 한가롭게 묘사하고 있다. 야트막한 야산과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이 평화로운 가을의 한때를 보여준다.

청전은 전통 수묵채색화를 근대적인 양식으로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나이 30대에 이미 화단의 스타로 부상했으며 매우 절제된 준법과 필묵으로 명성을 쌓았다. 소정은 청전과 달리 강렬한 준법으로 독특한 수묵화 세계를 개척했다. 반골 기질이 강한 그는 일본에 유학을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지 않고 금강산을 비롯한 우리 산하를 특유의 필치로 담아냈다. 갈대가 우거진 강가에서 한가롭게 낚시하는 풍경을 담은 `낚시터`도 시선을 잡아끈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서 수학한 월전 장우성은 화려한 채색화가로 화업을 시작했다.

 

서울대 미대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한 그는 한국 회화의 현대화에 천착했다. 그런가 하면 청각장애를 예술혼으로 불태운 운보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업뿐만 아니라 다작(多作)을 한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든 그는 `청록산수`와 `바보산수` 연작으로 화단에 큰 궤적을 그렸다. 31일까지. (02)732-3558

[매일경제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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