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중랑천 하류의 판자촌]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과 76년 사이 일본인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찍은 사진인데,

그는 청계천빈민들의 참상에 충격 받아 청계천변 빈민구호와 선교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사진가들 눈에는, 이 참혹한 현장이 왜 보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사회적 현실도 안타깝지만, 빈민들의 삶보다 모델에게나 카메라를 들이댄

당시 사진계의 구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1970년대 하반기의 청계천변 판자촌은 복개공사의 끝 지점인 마장교부터 한양대학교 뒤편까지

청계천 양쪽으로 용두동, 전농동, 답십리동,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웃에 길흉사가 있으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고, 더러운 물이라도 받으려고

수 십 미터씩 줄을 섰고, 공중변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의료 사각지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그들이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외치면 경찰봉과

군화발이 사정없이 짓이겨 부서진 가재도구와 함께 주저앉아 눈물 쏟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당시 사회부기자였고 지금은 사회학자인 이태호씨가 증언했다.

1977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에 휩쓸려, 이 곳 개미 촌과 판자촌은 완전 철거되었다.

청계천이 복개되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책 없이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만 내몰리는 건, 변함이 없다.


노무라리포트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1973-1976 노무라 모토유키 사진집에서 옮겼다.

4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과 글들이 수록된 '노무라리포트'는 청계천의 역사다.

    

[1974년 개미촌 움막집 들]




[1973년 답십리 판자촌]


[1973년, 용답동 제3활빈교회 앞 김종길집사와 어린이들]






1971810일 최덕천기자

눈빛출판사의 한국의 보도사진3공화국과 유신의 추억 한국사진기자협회역음-에서 옮김 



광주 대단지사건은 박통이 만들어 낸 개발독재시대의 횡포를 대표하는 민란이었다.

그 당시 사건뉴스를 접하며 놀라기는 했으나, 실상의 아픔은 뒤늦게 알았다.

오늘 인사동에서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집을 못 구해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니,

갑자기 광주 대단지사건이 떠 올랐던 것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의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이 사건은 독재정권이 왜 민주화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 빈민촌을 정리하라는 박통의 지시로 시작된다.

당시 불도저시장 김현옥이 나서서 여러 가지 이주정책을 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와우아파트라는 희대의 시민아파트 건설과, 빈민 이주계획이었다.

 

19677월 김 시장은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을 서울시 밖으로 이전시키며,

광주군(지금의 성남)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69년부터 마장동, 청계천변, 용두동의 빈민 2만 명을 광주로 이전시켰고,

얼마 안 되어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왕십리 빈민까지 광주 대단지로 몰아 넣었다.

 

수 많은 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광주로 갔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허허벌판뿐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물과 화장실도 없었고, 상업시설이라 할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15만명에서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도록 방치한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내 몰린 빈민들은 살아갈 방편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부모가 배고파 죽은 애기를 솥에 삶았고,

그 냄새에 끌려 이웃사람들이 나눠먹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진 이들이 분양권을 포기하고 다시 서울의 판자집으로 옮기는 일이 속출했다.

이곳에 대한 개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터라 건축 브로커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분양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어떤 이는 입주권을 몇 십장씩 사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기꾼들이 몰려들어

위조 등의 사기사건과 철거관련 비리 등의 범죄들이 만연했다


정부와 서울시에서는 입주권 거래를 금지시켰지만, 또 다른 편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단지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에 각 대표자들이 모여 불하가격시정대책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5천명의 서명을 받아 요구사항을 작성했는데, 평당1,500원으로 대지불하가격을 인하하고,

향후10년간 분활상환, 제 세금 5년간 면제, 구호대책과 취로사업을 보장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관청이 그들의 요구를 묵살해 버림에 더 강경한 요구를 내세우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삐라가 난립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성남 출장소는 서울시에 도움을 요청하며

밀고 당기는 협상이 오갔으나, 결국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서울시장이 직접 와서 교섭하겠다고 했으나, 차가 막혀 지체되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또 속았다, 서울시장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궐기대회는 갑자기 폭동으로 발전하고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모두들 몰려나와 사업 출장소를 박살 내버린것이다.

 

당시 시위대에는 70대 노인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었고, 이들은 모두 식칼과 곡괭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태라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눈에 살기가 서렸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으나,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난 군중들은 지나가는 차들을 닥치는 대로 탈취하여 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일부는 서울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서, 지나가는 택시들을 세우며 우리는 배가고파 죽을 지경인데

팔자 좋게 택시를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며 승객들을 강제로 하차시키기도 했다.

이런 사태 속에서 지나가던 참외트럭이 넘어져 참외가 길바닥에 구르자 굶주린 군중들은

순식간에 한 트럭 분량의 진흙 뭍은 참외를 다 먹어 치워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성난 군중들은 광주 경찰서 성남지서를  때려 부수고, 경찰차를 불태웠다.

당시 광주 대단지를 지나는 버스는 여섯대 정도에 버스노선도 제대로 없었지만

불탄 차만 22대에 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민란은 오후 늦게서야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서울시장이 투쟁위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발표에 주민들이 해산했지만,

도시빈민투쟁으로 박정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 

    

이 민란속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민란의 주동자로 22명이 처벌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 탄생한 도시가 바로 지금의 성남시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게 변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이러한 소요사태를 '사회 기강의 해이와 윤리적인 타락에서 오는 병폐'라고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시위대를 더욱 더 잔학하게 탄압했다.


과연 오늘의 우리사회는 그 때의 시각에서 벗어났는가만의 말씀, 제 자리 걸음이다.

이 추운 겨울 날 이삿짐을 꾸려야 하는 사람도 있고, 편히 누울 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를 헤맨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회는 만성적인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사고 행태가 이전의 사고와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가슴 아픈 일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피할 것이 아니라 그 트라우마와 당당히 맞서 때려 부숴야 한다.

 

/ 조문호



눈빛출판사의노무라리포트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1973-1976 노무라 모토유키 사진집에서 옮겼다.

개미촌 움막집 /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이어진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

 

 출처불명 / 광주대단지에 이주한 빈민들의 천막촌


출처불명 / 허허벌판에 마련된 광주대단지


출처불명 / 차를 불태우는 빈민들

출처불명 / 경찰병력이 투입되었지만, 빈민들의 분노는 저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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