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것도 함안에 대목장 찍으러 간 김에 들린 것이다.

가끔 구마고속도로를 거쳐 갈 때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칠 때가 더 많았는데,

이날은 고향인 영산도 장날이라 작정하고 찾아나선 것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찾아 보아야 할 숙제처럼,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함박산 약수터는 어릴 때 약수 길러 다니기도 했지만,

약수터 옆에 있던 여관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해 서다.

 

영축산에서 내려다 본 영산시가지 전경 / 2019.8 촬영

 

청년시절 애인과 고향을 찾아 그 여관 이층방에 묵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벚꽃이 날아들어 꽃방이 되어 있었다.

몸 위에 흩 뿌려진 그 꽃잎의 행복감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것은 바뀌었다.

돌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고, 여관은 오간데 없고 절집만 버티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내려다 본 읍내 풍경도 예전과 딴 판이었다.

 

누군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대 없네’ 라고 한탄 했다지만,

산천도 인걸도 다 바뀐 살풍경이었다,

 

약수터에 물통은 줄지어 기다리는데, 물이 없는지 병아리 눈물처럼 찔찔나왔다.

지켜 선 아낙의 선심에 약수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었는데. 역시 물맛 하나는 죽였다.

즐겨 드셨던 아버지 산소에 약수 한 병 떠가고 싶었으나,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내려오다 석빙고 주변을 정비해 놓아 석빙고도 들려 보았다.

어린 시절엔 그 곳이 놀이터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밤중에 석빙고에 들렸다 오는 것에 내기 걸 정도였으니까... 

 

잔디밭을 넓게 조성하여 마치 왕릉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석빙고 문이 잠겨 창살 틈으로 살펴 보아야 했다.

천정을 비스듬히 쌓은 석축의 장중하고 우아한 자태는 여전했다.

남산아래 만년교 석축과 연관은 없는지 모르겠다.

 

영산 만년교 2019. 8 

 

시간이 없어 함께 간 정영신씨만 장터로 가고

혼자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 찿아갔다,

고사 직전에 있는 과수원의 감나무 가지는 내 눈을 찌를 것 같았고,

무너진 석축은 가슴을 후벼 팠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술 한 잔 올려 드리고,

아버지 무덤 앞에 엎드려 마음의 빚을 다 토해냈다.

아버지 옆에 묻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지 못해 정선에 모신

이 못난 자식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아버님!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십시요.

 

얼마 전 병원에서 조직검사 한다기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살아생전 마지막 사죄일지 어찌 알겠는가?

생전에 잘 모셔야지 돌아가시면 다 헛것인줄 알건만,

죄책감에 의한 스스로의 위안인걸 어쩌겠는가?

 

기약 없는 발길을 돌려 찿아 간 장터는 이미 파장이었다.

흥청대던 옛 장터의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낯선 상인들만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바뀌었지만, 딱 하나 남은 것도 있었다.

 

바로 싸전 입구에 세워진 종탑이었다.

종탑이라 불렀지만, 싸이렌이 울리던 철탑이었다.

통금이나 반공 훈련 때나 울었지만,

옛 추억이 배어 있는 유적의 파편이었다.

 

돌아오는 길가 연지 못 위로 석양이 넘어가고 있었다.

물가에 노는 물오리마저 처량해 보였다.

 

"처량한 내 신세에, 네 신세마저 처량한 것이더냐?"

 

사진, 글 / 조문호

 




고향 없는 사람 어디 있고, 가족 없는 사람 있겠는가?
정처 없이 떠돌지만, 명절이 되면 더욱 그리운 게 가족일 게다.
남의 점포 앞에 자리 잡은, 이 중 늙은이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가슴 아플 것이다.

그에게 위로의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 천리 꽃이 피네 무정 천리 눈이 오네“

2016,9,14_을지로2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