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있다 There They Are

김여운/ KIMYEOWOON / 여운 / painting.installation

2023_0719 2023_0724

김여운 _Angeli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135×166×4cm_2023

 

김여운 홈페이지_www.yeowoonkim.com

인스타그램_@kimyeowoon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37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김여운의 회화-이름 모를 들풀의, 혹은, 이름도 없는 것들의 윤리학 전시장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텅 빈 캔버스가 걸려있다. 하얀 캔버스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절대주의 회화인가(말레비치). 아니면 회화가 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을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한 미니멀리즘인가(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도 저도 아니면 텅 빈 캔버스를 보고 당혹해할 사람들이라는 상황 논리를 겨냥한 개념미술인가. 미술사에서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전시를 통해 확인해본 적은 없는 만큼 텅 빈 캔버스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여운 _Angeli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135×166×4cm_2023_ 부분

환원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결합한 후기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하고 돌아서려는데 얼핏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보인다. 사실은 캔버스 천을 찢고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싹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전시장에 돋보기를 비치해놓기도 했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떡잎에 난 보송보송한 털이며, 캔버스가 찢어진 가장자리의 올 하나하나가 오롯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마저 생생한 것이 영락없는 실물 같았다. 작가가 오며 가며 본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고,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김여운_Ann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56×83×3cm_2023

그러나, 저 큰 캔버스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은 들풀 하나를 그렸다니. 정말 비효율적이군, 이라고 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가는 회화적 관습을 문제시하고 있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의미 포화 상태의 현대미술에 대해 꼭 필요한 말과 이미지로 한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펙터클 한 시대에 던지는 검소한(혹은 같은 의미지만 검약한) 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한정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김여운 _An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56×83×3cm_2023_ 부분

여기에 작가는 적정 거리 혹은 심적 거리를 문제시한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하며, 그림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같은 상황 논리에 확대 적용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그 거리, 그 개념을 수정하는데, 작가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선 그림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 채,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 본 채 지나치기 쉽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무슨 말인가. 앞서,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다. 이름도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실은 지천이지만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존재들이다. 이 미물들이 봄이면 언 땅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보도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시멘트 바닥을 뚫는다. 창틀에 쌓인 먼지에서도 자라고, 마침내 캔버스 천을 찢고 나온다. 혹자는 이처럼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심적으로 공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문제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존재의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선, 존재가 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 존재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조르조 아감벤은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 미물들 그러므로 타자들이 사는 치열한 삶의 소리를 보고 듣기 위해선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한다. 겨우 보이고, 바짝 다가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작가의 그림의 숨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다시, 타자의 삶에 대해 깊고 세심한 주의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김여운_Antony and Cleopatr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76×64×3cm_2023

그런데 정작, 이처럼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존재들 하나하나에 작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안젤리나, 하나, 소피, 안나, 에바, 루이스, 미아, 버지니아, 리사와 같은. 그리고 관객들도 작가처럼 저마다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요청한다. 연대를 요청해오는 관객참여형 프로젝트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이름도 없는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미물(타자)들은 없다. 다만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타자를 인정하는 누군가가(혹은 행위가) 없었을 뿐. 그러므로 이름 모를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 프로젝트에는 타자()의 초대가 있고, 자기_타자의 맞아들임이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그리고 여기에 집주인이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은 여하한 경우에도 집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는 사람이 이사 가고 난 뒤에 벽에 박힌 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집주인마저 눈치채지 못할, 쉽게 찾기는 힘든, 후미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삶의 방법은 찾아지고 있었고, 치열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들풀처럼.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못 그림(정확하게는 벽에 못을 박은 그림)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 삶의 방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처럼 읽히고,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의 치열한 삶의 순간에 주목하게 만들고, 후미진 구석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현실에 눈뜨게 만든다.

 

김여운 _Ar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0×25×3cm_2023
김여운 _Ar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0×25×3cm_2023_ 부분

그리고 여기에 세 개의 기둥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입체 설치작업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묶여 있는데, 하얗게 도색 된 표면에는 LifeVariable(변수)과 같은 영문자가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삶의 지침을 적어놓은 것일 터이다. 삶의 표상 혹은 푯대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서로 기대어야 하고, 협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매개될 수 있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김지하는 삶을 기우뚱한 균형, 그러므로 유격에 비유했는데, 아마도 변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김여운_Three_Poles_나무막대기에 젯소, 아크릴채색, 황마끈_165×8cm×3_2023

작가는 인간다움이 본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중심주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제도에 반하는 인간, 제도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서는 인간, 그러므로 자율적인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와 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벌의 옷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들러 붙어있는 작업을 매개로 협동을 주제화한 요셉 보이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교육)을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를 불태워 내년 농사를 기약하는 화전민에 비유했다. 작가 역시 어쩌면 이런 수선공과 화전민에서 예술의 당위를 얻고,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에, 후미진 구석에서 계속되는 치열한 삶의 순간들에,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에 주목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들,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그러므로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들에 눈뜨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거기 있다, 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를, 거기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충환

 

 

 

생 : 색 Life : Color

정지원展 / JUNGJIWON / 鄭智苑 / painting

 

2022_0622 ▶ 2022_0628

 

정지원_Ride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2_부분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B1 제1전시관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정지원이 그려낸 화면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구체적이거나 사실적인 표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형상에서 대부분의 관객이 어렵지 않게 공감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과 여가의 모습이 담겨있다. 지극히 평범한 혹은 누군가에게 소박한 바람일 수도 있는 행복한 시간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요소로서 작품에 박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정지원의 그림은 형상의 재현이기에 앞서 개인적인 경험의 공감각을 물감이라는 원초적인 물질에 투영하여 당시의 기억에 스며있는 감정을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붓질로 풀어낸다.

 

정지원_Ride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2

작가가 화면에 재구성한 경험은 여러 겹의 물감 층과 중후한 혼합 색상으로 무겁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원색적인 색상과 직관적이고 리드미컬한 스트로크로 그려졌기에 사건이 작품으로 재현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기 마련인 기억의 특성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기에 작가는 형상을 더욱 대담하게 단순화할 수 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붓질의 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보면 타인의 개인적인 일상에 자신을 이입하고 몰입해야하는 과정이 만들어내는 관문을 굳이 지나치지 않는다.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행했을 신체의 움직임과 붓질이라는 원초적인 즐거움에 바로 탑승 할 수 있는 것이다. 형형색색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물감은 작가가 부여한 나름의 질서와 균형감을 지닌 채 작가의 기억에서 꺼낸 당시의 분위기와 작품 제작 과정에서의 열띤 맥동을 가림 없이 전달하고 있다.

 

정지원_도시의 사람들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22
정지원_Spring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18~22

붓의 속도감과 작가의 어깨 움직임은 캔버스 표면에 다채롭게 스며있기에 마티에르가 두드러지는 물감의 표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 풍부한 감상을 제공한다. 한 번의 붓질로 칠해지는 색의 종류를 최소화하고 색과 색이 만나는 경계를 무신경한 듯 다듬지 않은 마무리는 당시의 활기찬 소음과 특유의 향기를 긴장감 있게 재현하며 즐거운 화면을 조성한다. 직관적이고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광경이 담긴 작품을 관찰하면 먼저 칠해진 물감이 건조되기까지 기다리고 다음 색을 덧입힌 정지원의 차분한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운동감을 지닌 붓질과 대비되는 물감에 대한 신중하고 진지한 접근법은 시끌벅적하6고 생동감 넘치는 상황임에도 작가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정제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에 작품으로 하여금 작위적인 위화감 없이 관객에게 편안히 다가서게 한다.

 

정지원_Maju I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22
정지원_Two people 둘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2

자칫 추상적이고 막연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 중에서 가장 보통의 기억이기에 더욱 각별한 순간이 있다. 각박한 바람이 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여가의 풍경이란 지난 추억일 수도 있고 곧 다가올 내일일 수도 있다. 정지원이 그려내는 그림 속의 단서들은 매 순간의 흥얼거림이 자아내는 음악적인 단서를 품고 있다.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과하게 구체적이기에 난해할 수 있는 복잡 미묘한 사람의 기억을 작가가 가장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는 박자감으로 선보인다. ■ 갤러리 도스

 

정지원_The night at the park_캔버스에 유채_91×90cm_2019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내 작업의 소재이며, 다양한 조형언어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재료가 된다. 화면에 채워지는 익숙하고도 낯선 형상들은 모호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 창작과정에서 경험하는 '불확실성(The loss of certainty)'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어 새로운 창작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 매체가 지닌 물성이 이끄는 힘으로 인해 나는 시각 외에 다른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을 체험(體驗)한다. 단순화된 형태로 나아갈수록 정보의 홍수속에서 경험하는 혼돈과 왜곡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심플해진 일상과 경험의 본질을 지향하게 된다. 동시에 다양한 색과 형태가 자아내는 리듬과 역동성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삶을 나타낸다. 나에게 회화는 색과 형태로 시를 짓게 하는 상상의 언어이자, 일상을 변주하며 이야기와 의미를 찾게하는 영감이다. (작가노트 中) ■ 정지원

Vol.20220622d | 정지원展 / JUNGJIWON / 鄭智苑 / painting

OVERLAY

김은진展 / KIMEUNJIN / 金銀珍 / painting 

 

2022_0518 ▶ 2022_0524

김은진_밤하늘_캔버스에 유채_145×336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회화의 해부학 ● 전자기파가 투과된 육체의 살갗은 녹아 없어진 듯하다. 뼈 가지들과 장기들이 하얗고 앙상한 모습으로 검은색 배경지 위로 디졸브된다. 살가죽과 피와 조직들이 해제된 채 오직 육체의 핵심만 남아 있는 X-ray 사진은 사각 틀 안에서의 신체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캔버스로 치환시켜 볼 수 있는 이 사각의 틀은 회화가 단순히 대상의 모방이나 재현에서 그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회화는 단지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활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물감을 여러 차례 덧칠할 수 있고 건조가 느린 유화의 경우 덧칠된 겉면의 안쪽에 화가가 처음으로 의도했던 바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작품의 해제와 해체를 통해 성립되는 이 유한적이고도 무한적인 행위들은 회화에 회화 그 자체로서의 목적성을 부여한다.

 

김은진_The Descent from the Cross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
김은진_대화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

한 화면이 사라지면서 다른 화면으로 서서히 전환되는 기법인 디졸브는 이전 화면의 밀도가 낮아짐에 따라 겹쳐지는 다른 화면의 밀도가 높아짐으로써 가능하다. 이 기법은 화면을 해제함으로써 구성하고 조립하는 것과 같다. 화면의 연속성을 위해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장면을 연결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나 장소의 변화를 의미하거나 우연적이고 특수적인 효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졸브를 통해 전환되는 화면은 동시성을 기반으로 시공간의 단순 구축이 아닌 융해와 혼합을 창출해낸다. 그 어디에도 위계와 한계는 없으며 새로운 연속과 연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이야말로 하나의 화면 내에서 벌어지는 유한하고도 무한한 동시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진_갈대밭 기억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20
김은진_Light blossom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21

이 경계와 위계가 없는 동시성은 김은진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김은진의 회화 작품은 디졸브와도 같은 오버랩을 표방하고 X선 사진과도 같은 사각의 틀인 캔버스를 신체와 결부시켜 보기도 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련의 감정들을 캔버스로 옮겨내 시각화함으로써 마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새로운 감각을 얻어 점화된 이미지들은 다시 작가를 통해 밀려나고 편평해짐으로써 소화된다. 캔버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치열하고도 무던한 과정은 마치 이미지가 죽음과 탄생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각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죽음과 탄생이라기보다는 연속적 속성을 내포하는 죽음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진_Overlay 2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1

일차적으로 대상이 캔버스에 재현되는 것은 맞으나 김은진은 이 실재를 겨냥하여 층을 숨기거나 노출시키는 등의 변형을 가하면서 그리는 것과 동시에 지워나가는 행위를 충실히 반복한다. 따라서 캔버스 화면의 겉면에 살가죽처럼 흡착되어 있고 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있던 감정의 단순 모방이나 재현은 사라지게 되고, 들키고 싶거나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 그 이상의 정서와 근본적인 메시지들이 디졸브되어 마치 육체의 핵심처럼 또렷하게 존재하게 된다. 즉 작가가 새로운 붓 터치로 쌓아올리는 화법 이전의 색채들을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색채와의 혼합을 통해 우연적이면서도 밀접하게 관련짓는 창조와도 같으며, 나이프로 화면의 표면을 긁어내는 화법은 상처의 감촉저럼 피부로 느껴질 수 있는 선형적인 미감을 조성함과 결을 같이한다.

 

김은진_Festival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20
김은진_밤하늘 갈대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21

그러나 김은진의 작품에 치밀한 계산은 없다. 단지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는 회화라는 매체에 덧칠함으로써 밀어내고 긁어냄으로써 생성하는 화법을 구사하여, 새롭게 발생하는 화면의 우연성과 유기성을 통해 드러내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것들로 화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 계산되지 않아서 불온전하지만 디졸브됨으로써 연속성을 부여받는 화면상의 각 에피소드들은 인간의 경험들과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삶과 연결된다. 이처럼 작가가 회화를 해제하고 해체하며 변형시키는, 회화에 대한 해부와도 같은 이 과정들은 회화를 새로이 재생하게 만든다. 회화가 온전히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되는 셈이다. 김은진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어느 한 회화의 연대기가 당신 앞에 오버랩될 것이다. ■ 김혜린

 

 

Vol.20220518f | 김은진展 / KIMEUNJIN / 金銀珍 / painting

홍곡 鴻鵠

 

김봉경展 / KIMBONGKYOUNG / 金鳳卿 / painting 

2020_1223 ▶ 2020_1229

 

김봉경_龍_비단에 수묵_150×296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026h | 김봉경展으로 갑니다.

김봉경 블로그_blog.naver.com/kimbkkorea페이스북_www.facebook.com/kimbkkorea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본관 B1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어느 누구나 자신의 삶이 특별한 가치가 있으며 어떤 대단한 일을 미래에 이룰 수 있으리라 희망찬 상상을 한번쯤 해본 적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좌절의 순간이 오거나 심지어 세상과 단절되는 고독한 시간이 인생에 들이닥칠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을 맞닥트릴 때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한순간 별볼일 없이 비참해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만 같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시간은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이란 생각에 "나 자신"은 거대한 음울 속에 몸을 숨기고 세상을 주시하며 또다른 시간을 준비한다. "큰 기러기와 고니" 라는 뜻인 『홍곡(鴻鵠)』은 위와 같은 본인의 주제의식을 담고있다.

 

김봉경_鯨_비단에 수묵_150×296cm_2018

 

김봉경_홍곡 鴻鵠 2_비단에 채색_44×120cm_2019

 

이를 작업으로 표현하기 위한 구상에 들어갔을 때 본인은 여러 고전과 역사, 문헌 등을 통해 앞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흔적 속에서 많은 모티브와 영감을 얻었다. 우화(寓話)의 형식을 빌린 비유, 고전적인 형태의 도상이 작업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동양회화의 영모화(翎毛畵)가 벽사(辟邪), 길상(吉祥)등의 목적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본인은 삶에서 느끼게 되는 비정함을 동물의 형태를 통해 드러내어 "나 자신"을 담은 애틋한 모습으로 담아보고자 했다.

 

김봉경_초로 草露_비단에 채색_24×24cm_2017

 

김봉경_초로 草露 2_비단에 채색_23×25cm_2017

 

이같은 도상을 회화의 양식을 통해 완성하기 위해서 본인은 보수적인 기법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리고자 하는 소재들의 특성상, 섬세한 표현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양화 염료와 종이로는 작품을 제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비단 위에 그리는 견본채색의 양식을 선택하였다. 이전부터 명말청초(明末淸初)에 활약했던 화가들의 치밀한 묘사, 일본 근대의 화가들이 보여준 채색기법에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이들이 보여준 기법의 장점들을 절충하여 본인 나름의 화풍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김봉경_모정 母情 10_비단에 채색_26×20.3cm_2020

 

김봉경_첫눈 初雪_비단에 수묵채색_50×26cm_2020

 

 

세상으로부터의 고립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던 사람들의 흔적은 이미 수많은 역사와 예술의 형태로 남아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일을 살아갈 이유를 알려준다. 사람은 세상에 휩쓸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때야 자신의 위대함을 오롯이 드러낸다. 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을 의연한 태도로 버티어 나가는 "나 자신"의 모습. 본인은 그런 삶의 태도를 일련의 작업을 통해 드러내보고 싶었다. ■ 김봉경

 

Vol.20201223b | 김봉경展 / KIMBONGKYOUNG / 金鳳卿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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