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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혜展 / KIMJAHAE / 金慈惠 / painting 

2021_0407 ▶ 2021_0413

 

 

김자혜_doubt as a layer_캔버스에 유채_116.8×80.3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326e | 김자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단절되며 연결되는 시공간 ● 김자혜의 작품에는 해변처럼 시야가 탁 트인 장소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서있는 야자수 바로 옆에는 노을지는 붉은 하늘이 배치되어 있곤 한다. 풍경은 장소의 가치를 알리는 중요한 지표이다. 대개 그런 풍경이 가능한 곳의 실내 또한 넉넉하다. 실내여도 넓고 환하고 깨끗하다. 인적은 없고 주변의 빛과 그림자만 살랑거린다. 푸른 하늘과 물을 반사하는 평면들이 상호 상승효과를 발휘한다. 천정까지 이어진 통가림막은 보이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절경을 약속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의자(그리고 책상이나 조명)은 외적 풍경이 내적 심상과 연동됨을 알려준다. 다양한 계열의 푸르름으로 가득한 화면은 복닥거리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이나 바닥부터 휴양지같은 풍경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은 도시적 시점에서 본 자연이다. 자연은 대개 구조와 구조 사이에서 부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도시 풍경 자체가 추상에 기반하며, 순수한 추상적 요소 또한 존재한다. ● 그럴듯한 풍경이지만 여기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은 없다. 바닥을 발로 디딜 수 없는 반영상으로 채운 작품들은 그 점을 더욱 강조한다. 바닷가로 통하는 창문이 있는 작품에서 이편의 바닥 또한 풀장의 물 같은 느낌이다. 바닥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얕은 수면이 잔물결을 일으킨다. 식물 같은 자연물 또한 재현에 충실한 부분은 조금이며, 대부분 하얀 벽이나 푸른 물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처리되어 있다. 연못이나 분수대 등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 등은 자연의 현존을 암시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자못 견실한 건축적 구조나 실재의 대표라고 할 만한 자연 모두 불확실하게 다가온다. 김자혜의 풍경에는 도약과 비약의 지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원래 그림은 실제로 완보할 수 없는 가상의 장이지만,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그러한 속성을 가속화시킨다.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계단은 문, 창문, 거울, 그림 등과 더불어 잠재적 이동을 약속할 따름이다.

 

김자혜_two chairs on the line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20

 

 

공간이 또한 시간이라면 이 작품에는 하루의 여러 시간대가 공존한다. 여러 시공간들은 잘린 직선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연결하기 위해 자른다. 그림의 틀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사선을 지지해주며, 부드러운 천 소재의 커튼이 기하학을 완화시켜 준다. 다른 장소들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반영상들이 교묘하게 짜깁기된 작품은 언뜻 단일한 푸른 풍경처럼 보이지만, 직선 또는 사선으로 세워지거나 바닥에 깔린 거울들이 각을 맞춰있다. 휴양지의, 또는 그에 준하는 풍광들이 섞여 있는 작품들은 이국적이긴 하지만, 탐험가만 도전 가능한 오지의 자연은 아니다. 그곳들은 쫙 깔린 육해공 교통 인프라를 통해 매끄럽게 도착할 수 장소들로 보인다. 풍경은 여러 근심을 자아낼 인간사가 깔끔하게 정리된 시공간들로 뚫려있다. 여기에는 불연속을 통한 연결이라는 역설 어법이 있다. 부조리한 관계로 맞붙은 경계들로 이루어진 광경에서, 거기로 갈 수 있는 시각적 징검다리는 부재하다. ● 문, 창문, 거울, 그림, 얇은 수면 같은 반사면들은 공간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것들은 단지 풍경의 시각적 요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gate)'과 같이 작동한다. 작가에게 그림은 그자체가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문의 역할을 한다. 여기에 좌우로 접히고 상하로 늘려지고 급작스럽게 끼어드는 평면들이 가세한다. '순수' 회화에서 금기시된 패턴이나 장식도 배제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금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뛰어넘고자 하는 여러 경계에는 회화와 디자인/공예도 포함된다. 이미 그러한 경계는 사라졌는데, 그것이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이전 시대에 그어진 경계에 안주하고 있는 기득권의 입장일 따름이다. 모더니즘에서 (단순한)장식과 (심오한)조형성을 구별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경계는 미학적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선명하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공간이 혼재하는 상황은 마치 압축파일과도 비교될 수 있다. 김자혜의 작품은 가상현실 또한 비중이 높아지는 현대에 그러한 또 다른 현실에도 적용될만한 시공간적 상황을 보여준다.

 

김자혜_sign beyond the line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20

 

 

요컨대 유화로 그린 그림 안에는 순간적인 시공간 이동이 편재하는 인터페이스같은 국면이 존재한다. 공간은 시간과 연동되므로 복잡한 공간은 여러 시간대를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층(Layer)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층은 순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지질학적 시간대와 달리 이 층들은 매우 얇다. 하지만 차이를 각인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 안에서 운동은 효과로서 산출된다고 본다. 차이들로 가득한 강렬한 세계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층과 층 사이는 여백처럼 보일만큼 크기도 하고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맞닿아있기도 하지만, 그 불연속 지대가 변화의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 따스한 색감의 사물이 군데군데 배치된 작품은 물을 비롯한 여러 반영 상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공간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는 조형 요소들은 시각적인 산책이 가능하다. 그러나 면과 면 사이에 내재한 간극은 합리적인 공간과는 거리가 있다. 간극과 균열은 보다 커져 여백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명암법이 적용된 하얀 커튼이 제쳐지고 풍경이 보이지만, 그 안쪽을 실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공간성을 보여준다. 대지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 공중에 붕 뜬 듯한 공간들의 조합이다. 순수 여백의 공간도 보인다. 실제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기저 면은 좁거나 부재하다. 노랑, 빨강, 파랑 등 발랄한 팝적인 분위기의 여러 실내의 장면들이 모인 작품은 바닥이 없다. 많은 작품에서 바닥은 반영 상으로 이루어졌다.

 

김자혜_boundary stair; for potential movement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0

 

 

그것은 공중에 붕 떠 살고 있는 현대를 반영한다. 초고층 빌딩의 거주자들은 자신의 바닥이 누군가의 천정이다. 토지 소유권은 1/n로 설정된다. 서로 다른 층들로 이루어진 다차원 공간 속에서 '평면으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시간은 멈추게' 된다. 건물이나 물건으로 대변되는 인공물이 이 직선적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자연물은 변화하고 있다. 작품 속 식물, 물, 구름은 그자체가 유동적이며, 반영 상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자연은 이제 그 자체의 본질을 가지기보다는 막에 싸인 듯이 거듭되는 해석을 통해서만 자신의 몸체를 드러낼 것이다. 또는 작품에 간혹 등장하는 계단처럼 인식의 층을 통과해야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통상적으로 보기 좋은 풍경은 입구와 출구가 있고 그 사이에 시각적 산책이 가능한 통로들이 있다. 반면 김자혜의 '풍경'은 끝없이 열리는 창 같으면서도 막다른 길목 또한 산재한다. 고즈넉하고 넉넉한 풍경에 초대하지만, 관객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방법을 모른다. 복잡한 공간을 미로 삼아 추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든지 도약과 비약을 요구받는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에서 인간 운명에 관한 하나의 의미, 즉 세상의 질서를 추상화시킨 것이 미로라면, 현대인은 미로를 헤매는 가상 유목민, 즉 이미지와 환영을 좇는 여행자로 바뀌고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미로는 불투명한 장소이며 그 길을 설계하는데 어떤 법칙도 없다. 오늘날 미로란 불안정하면서 위험스러운 통과지점이며 두 개의 세계 사이에 터져 있는 틈바구니와 같은 것이다.

 

김자혜_the point on the diagonal line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20

 

 

미로는 보편적이다. 『미로』에 의하면 신화에서 소설까지, 동화에서 비디오 게임까지, 가장 신비로운 서사시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학과 오락은 절대의 추구로, 또는 미로와 같은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고 쫒고 쫒기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근대에 미로는 잊혀졌다. 직선과 투명함, 단순함을 옹호하는 근대 문명은 미로를 쫒아냈다는 것이다. 경제란 빨리 가고 똑바로 걷고 시간을 벌고 시야를 넓히고 미래에 대해 예측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합리성의 정점에서 불합리 또한 번성한다. 그에 대한 자의식이 근대 이후에 대한 비전이다. 곧고 투명한 것이 수시로 나오지만 결국 그것을 배반하는 김자혜의 작품은 미로적이다.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작품 속 시공간은 미로처럼 불투명하지만 그것이 유연한 공간임은 틀림없다.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는 것은 신화시대에 천지창조 행위 같은 초월과 자유로움을 줄 것이다. 한계 지어진 지금 여기에 앉아서 무한을 꿈꾸는 것이다.

 

김자혜_lights cross the place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21

 

 

김자혜의 작품은 거의 실험실적인 깔끔함이 특징이지만, 현실은 편재한다. 관료주의와 상업주의를 모두 관통하는 익명적 체계 자체가 중성적이다.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이 익명적 체계의 작동방식을 가속화시켜 눈에 띄게 만들 따름이다. 예술작품 특유의 낯설게 하기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더 흥미롭고 불가사의하게' 만든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도시 문명 또한 황야처럼 열린 집합이다. 그는 바다만이 이 마력에 비견될만하다고 본다. 또한 구름 역시 애초부터 분리 불가능한 것의 모델이다. 카오스는 열린 공간이다.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카오스의 공간은 대개 직선이 사라지는 공간이다. 김자혜의 작품처럼 준거 없는 어떤 공간에 그려진 선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술이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의 구성이라고 본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결합이 중요하다.

 

김자혜_between vertical line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20

 

 

예술은 조이스의 말대로 하나의 카오스적 우주론(chao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카오스와 투쟁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오스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카오스의 여러 경계턱들을 통과하게 된다. 예술은 카오스의 한 조각을 틀 안에 고정시켜 감지 가능해진 구성된 카오스를 형성하거나 그로부터 다양성으로 재편된 카오스적 감각을 끌어낸다. 끝없이 열리는 창같은 화면은 예측 불가능한 단편들로 조합된다. 미셀 세르는 이러한 공간에서 카오스의 비유를 본다. 그는 하나의 통일된 공간이 아니라 한없이 다시 나타나는 어떤 평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몸은 어떤 유일한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공간들 전체의 힘겨운 교차의 지점이다. 이 교차지점, 이 연결지점은 언제나 구성해야 할 어떤 것이다. 김자혜의 작품은 과학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만, 사회적 요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김자혜_between the curtains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서사가 부재한 듯하지만, 켜켜이 중첩된 시공간이 진공은 아니다. 작가가 주로 다루는 공간, 즉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는 공간은 물신주의의 정점에 오른 값비싼 재화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의 물질적 진보를 낳은 생산력의 혁명은 대량소비를 필요로 하고, 이 조건은 다시 생산 관계에 피드백 된다. 대부분 각자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던 전통사회는 기회를 찾아 끝없이 이동하는 사회로 변했다. 도시화와 세계화는 비슷한 과정의 다른 차원이다. 소비 밀집 지역에 생활 인프라가 깔리다 보니 지방보다는 수도(권)이 개인주택보다 아파트같은 공동주택이, 소규모보다는 대단지가 더 선호되는 흐름을 낳았다. 수도권에 인구의 반 이상이 밀집돼있는 상황은 인구 대비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인 듯하다. 분단으로 반이 뚝 잘려 있는데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국의 정치적 물리적 조건, 그리고 불과 몇 십 년 동안 압축적 근대화가 진행된 경제적 조건까지 더해져 공간은 사회적 관심과 갈등의 중심이 됐다.

 

김자혜_The new layer in the lair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과도하게 모여 살아야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공간은 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집을 포함한 공간의 부족은 후세에 유전자를 전달하려는 자연의 추세마저도 무력화 시켰다. 다수의 사회인이 참여하는 경쟁의 꼭대기에 바로 공간이 있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현대주의적 지배는 수평적으로는 기하학적 도로계획이, 수직적으로는 국제양식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낸 격자화된 도시의 이미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격자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비판하듯이 그러한 근대적 공간은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근대주의는 형태가 기능뿐 아니라 이윤을 따른다는 법칙을 강요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탈근대의 조건으로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시공간 압축의 강도를 지적한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이 과정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비워지고 더욱 추상적으로 되며 사물과 사람은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탈피되게 된다고 본다.

 

김자혜_where the shdows shine_캔버스에 유채_116.8×80.3.cm_2021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가속화는 주체와 객체 모두의 비워짐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공간이기 보다는 공유공간, 머무르기 보다는 지나가는 공간, 어디에 가도 비슷한 공간이 현대를 특징짓는다. 데이비드 하비는 공간을 통제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분쇄와 분절화를 통한 것이라면 그러한 분절화의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주장하듯이 공간이 항상 사회적 권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공간의 재조직은 언제나 사회적 권력이 표현되는 틀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사회적 결정이라는 뿌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적 이미지'(푸코)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재현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현대의 예술가가 공유할만한 목표이다. 공간은 무엇인가 담는 물리적인 그릇을 넘어 물신적 체계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는 추상화되어야 한다. 비워진 공간은 한없이 가벼워져서 예술적 유희의 대상이 된다. 현실 속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예술의 해방적 기능이 있는 김자혜의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는 유토피아 속의 이질적 장소, 즉 헤테로토피아에 해당된다. ■ 이선영

 

 

Vol.20210407b | 김자혜展 / KIMJAHAE / 金慈惠 / painting



김상표씨의 ‘나르시스 칸타타’전이 ‘이즈 갤러리’ 1,2,3층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연세대를 졸업한 경영학박사로,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수다.

이년 전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갖는 열혈 작가다.



다소 아리송한 작품들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미술에 대한 기존 형식을 과감하게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벌그림을 그렸으면 어느 정도 마르고 난 후 그리는 게 원칙이지만, 기다리지 않고 덧칠을 한다 던지,

붓을 칼처럼 휘두르는 등 모든 게 파격적이었다.

자신 안에 넘실대는 감정의 기복을 격식 없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 선 첫 느낌은 일렬로 도열해 선 사천왕상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오늘의 시대상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야생의 힘이 꿈틀거렸다.

프레임에 갇힌 죽은 초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적인 욕망과

이글거리는 분노가 뒤섞인 살아 꿈틀거리는 날 것의 실체였다.



아무런 격식 없는 원시성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방에 뿌리 둔 현대미술보다 은유에 뿌리 둔 원시 미술이었다.



3층에 걸린 작품들은 무위당 장일순선생의 모습이라 했다.

모심과 살림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수행성으로서 그리기 행위’로 끌어들여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무위당의 얼굴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정신을 그린 것이었다.



김상표씨의 작업은 얼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었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린 여러 가지 감정이 때로는 괴물로 때로는 악귀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어찌 보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군상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자화상이 스스로를 비워내는 수행 방식이라고도 했다.



작품의 완성도가 낮고 다소 주관적이라 객관성을 잃은 작품도 있지만,

미친 듯 몰입해 덧칠한 붓 자욱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종길씨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상표의 회화에서 주목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술수적 변태로서의 자화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가 미륵을 그리면서 '미륵자화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륵'과 '나'를 서로 빗대어 마주 보게 한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현대로 광대무변의 실체를 그리기 위해서이다.”



인사동에 볼만한 전시가 여럿 열리고 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광풍에 전시장은 텅텅 비었다.

마침 작가 김상표씨를 만나 기념사진도 찍고, 도록을 선물받는 횡재를 했다.

사람이 없으니 코로나에 감염될 염려도 없지만, 조용하니 작품 감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3월24일까지 열리는 ‘나르시스 칸타타’전을 놓치지 마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오늘이 내일에게_마음에 닿다

2019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 선정작가展
2019_0717 ▶︎ 2019_0722



초대일시 / 2019_0717_수요일_03:00pm



참여작가

노현우_염지희_윤상윤_윤준영

이성경_이혜성_최민국


주최 / 남도문화재단

후원 / 호반건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제1,4전시장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우리 재단은 젊은 작가들의 다양하고 새로운 시선을 통해 국내 시각예술의 새로운 미래를 확립하며, 나아가 국내 문화예술발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 위한 취지로 매년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노현우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9


염지희_Before the dust wall(먼지 사막 앞에서)_종이에 콜라주, 연필, 철가루_130.3×162.2cm_2012


윤상윤_Into the trance2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7


윤준영_달과 검은 바다_한지에 먹, 콘테_130.3×97cm_2019


이성경_빛을 등지고2-2_장지에 채색, 혼합재료_130×162cm_2019


이혜성_Nameless Flowers3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최민국_여행의 오후 32.0℃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8


금번 공모전에서는 회화 작품을 비롯해 사진 및 조소 작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기법과 창의적인 작업으로 완성된 작품들이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노현우, 염지희, 윤상윤, 윤준영, 이성경, 이혜성, 최민국 작가가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 최종 순위는 시상식 당일 발표 예정)


● 선정작가 7인이 참여한 『오늘이 내일에게_마음에 닿다』展이 7.17(수) 개최 예정이오니,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남도문화재단



Vol.20190717a | 오늘이 내일에게_마음에 닿다-2019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 선정작가展


강순득展 / KANGSOONDEUK / 姜順得 / painting
2019_0403 ▶︎ 2019_0409



강순득_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0.9cm×3_20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 (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누구나 쉽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 왔으리라, 나 또한 누구 못지않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개인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를 만든다고 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나의 역사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가!



강순득_결혼 그리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5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내란과 어려움을 겪으며 고도의 경제성장을 해왔고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문화의 상황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결혼 후 가정주부, 아줌마, 개인, 대중으로 살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바쁘게 흘러가는 무심한 일상을 돌아보며 매듭처럼 걸리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바라본다. 결혼, 가족, 생존, 이주, 어머니죽음, 인간관계, 사회 상황 등은 나를 힘겹게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했다.



강순득_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아줌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5.1cm_2017


강순득_이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8


나의 작품들은 시대에 담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나를 돌아보며 또 주위를 돌아보고,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에서 주제를 찾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창작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한 작업이 가사노동에 관한 작품이다. 가사노동은 여성에게 있어 인생의 전반을 지배할 만큼 막중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사노동의 가치는 인정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온 것이다.



강순득_한국남(195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5.1cm_2018


강순득_아라리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7


여성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가정을 위해 고군분투 하다보면 초라해지기 짝이 없다. 누가 공연히 아줌마를 폄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30대에 예기치 못한 어머니와의 사별로 의지가지를 잃고 혼자가 되었다. 힘든 시기에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내 편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나는 십여 년 간 여러 병원들을 전전하며 어머니와 나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며 살았다. 이제는 어머니의 나이를 지났고, 지금도 그 상실감은 남아 있지만 우리는 생애 얼마나 많은 실망과 절망을 겪고 또 극복해가며 살아가는 것일까?



강순득_극복의 시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9


강순득_산다는 건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9×53cm_2019

누구나 겪는 다반사가 특이할 것은 없다 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힘겹고 치열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면 기적에 가깝다. 나는 그 특이할 것 없는 다반사를 관객들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 강순득



Vol.20190403e | 강순득展 / KANGSOONDEUK / 姜順得 / painting




I am-나를 인식한다는 것, 나를 의식한다는 것, 나를 아는 것

김은정展 / KIMEUNJUNG / 金恩廷 / mixed media
2017_0607 ▶ 2017_0613



김은정_갑옷1(엘리자벳) Armor_스테인리스 와이어, 천_100×72×26cm_2016

초대일시 / 2017_060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

Tel. +82.(0)2.736.6669

www.galleryis.com



I am ● 나를 인식 하는 것, 나를 의식 하는 것, 나를 아는 것 지금 나는 무엇으로 존재 하는가? 우리는 자신을 외부에, 세계 속에, 타인들 틈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 한다. ● 모든 것은 외부에 있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 이렇게 외부에 속해 있는 우리의 의식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대상을 향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종종 타인을 향한 방향성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함으로써 충돌하게 되고 결국 방향성을 잃게 된다. ● 사랑이란 이름으로, 또는 옳다는 이유로 모두를 자신의 의식에 동화시키려는 것이다. " 갑옷 시리즈" 는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함으로서 독립적 자아를 꿈꾸는 인간의 본능을 표현한 작품이다. 주변의 오브제를 스텐 와이어로 가득히 wrapping 함으로써 자신을 향한 보호 본능을 갑옷으로 나타냈다. 결국 갑옷을 입은 '나'는 관계 속에 만들어진 경험적이며 주관적인 또 하나의 우리의 형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I am' 즉 선험적 자아를 잊은 채 관계를 통해, 외부를 인식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또 다른 ego의 '나' 들로 살아간다.


김은정_갑옷2-1(잔다르크) Armor_스테인리스 와이어, 천_123×50×28cm_2016


김은정_갑옷3 Armor_스테인리스 와이어, 천_40×44×23cm_2016 


김은정_청년에게(to the youth) 스테인리스 와이어, 오브제_116×58×25cm_2015


김은정_지나치지 않는 것1 360ml 한병(Not too much)_천, 핀_90×64×6cm_2016


김은정_우유와 콜라 (milk and coke)_천, 핀_65×91×6cm_2017

그렇다면 본성의 '나'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얼까?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것의 '너'는 'I am' 상태의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세상 속에 나, 관계 지어진 나, 비교속의 나, 즉 경험적 자아가 아닌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나를 인식해 본다. ● 정보와 경쟁의 홍수시대의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우위에 서기 위해 달린다. 이제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의 고유 가치 안에서 자기와의 경쟁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나를 알고 세상속의 내가 설 자리를 찾아가는, 그곳에서 진정한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우리를 바라본다. 이번 " 평면 작업" 은 나를 의식하고 나의 절대적 가치를 향한 과정을 평면위에 옷을 씌워 그 위에 작은 핀으로 가치를 찾아 형상화 해나가는 과정이다. 또한 타인의 고유 가치와 능력을 수용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 있는 사물의 형태를 핀으로 극대화시킴으로써 인내와 노력의 흔적을 나타내고자 했다. ■ 김은정

 


김은정_비우고 채우고 다시비우고, 또 채우고 (empty, fill, empty, fill)_천, 핀_97×72.5×6cm_2017


김은정_그 사과로부터 (From that Apple)_천, 핀_78×75×6cm_2016


김은정_작은집 이야기 (Tale of home)_천, 핀_68×91×6cm_2017


김은정_지나치지 않는 것3 (Not too much)_천, 핀_40×40×6cm_2016

I am ● As what am I existing? We often discover us being among the world, strangers, or even outside of ourselves. ● Everything can be found from outside of you. Even yourself. ● Our consciousness exists pointing toward consistent subject, within specific relationships with them. ● Inside these relationships, our consciousness not only points toward others or matters, but often forces our own thoughts to them and collide, and loses direction. ● By the name of love, by the reason that it feels right, people's mind tends to assimilate everyone else's thoughts with theirs. ● My " Armor series" represents human being's instinct to protect themselves from tendency of others like this. By fully wrapping random, ordinary objet with stainless steel wire, I have expressed the protective instinct of mankind. After all, myself inside the armor shows the empirical, subjective shape of human consciousness formed by relationship. ● We, the human being lives through our life not by transcendental self, a.k.a " I am" . However, by another acquired ego that has been obtained from relationship and realization of exterior factors. ● Then, what is it like to be perceiving the natural 'ME'? Could 'Yourself' from the famous ancient quote " Know Yourself" mean the same me as " I am" ? Now, it is time to begin realizing genuine, independent me that is free from the world, relationship or comparison. ● As our era is flooding with information and competition, we run to gain success, which is relative to our surrounding others. Instead of competing with others like this, isn't it the time that we should start challenging ourselves for our own values? ● During the work on my relievo, I tried to give shape to the procedure of forming my absolute value and establishing the " natural me" , by covering 2-demensional plane with clothes and sticking pins on it. Also, through maximizing the form of meaningful objet of mine, I tended to convey the sequence of embracing others' absolute values and abilities. ■ Kim eun jung



Vol.20170507e | 김은정展 / KIMEUNJUNG / 金恩廷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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