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아홉 번째 작가인 강제욱지난 21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의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나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 눈에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30일까지 이어진다.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고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2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 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 신은 죽었다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이광수씨의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사진의 미래는 없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조문호

 

 

[2023.4.22작성]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갤러리 브레송’의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론이 지난 22일 오후6시 개막되었다.

양승우,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씨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열리는 서준영 론은 ‘테마파크, ’오타쿠공화국‘,

’중간정산‘, ’캣워크‘, ’너에게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아’ 등 그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준다.

 

 '브레송' 송년회를 겸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 전시개막식에는

이번 기획전에 글을 쓰는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모였다.

요즘 전시 개막식엔 잘 가지 않지만, 더구나 그 날이 ‘홈리스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우리 교주님이 오시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에 관한 사진논문을 쓰고 있다는데...

 

여태 이광수교수를 교주라 부르는 것은 그로부터 많은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지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했을 때 부터다.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었겠나?

입바른 소리로 사진판에 외톨이가 된다는 걸 본인인들 어찌 모르겠나.

자기 밖에 모르는 사진판에 이런 분이라도 있어 숨통이라도 트이는 것이다.

 

서울역광장에서 열리는 ‘홈리스추모제’는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빈곤사회연대,

37개 단체가 함께한 ‘2022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주최하고 있다.

 

올 해 '홈리스 추모제'는 주거제공 우선 홈리스 정책 실행, 홈리스 차별 금지, 권리기반 정책 시행,

홈리스의 평등한 의료접근권 보장, 여성홈리스 존재 인정, 젠더 관점 기반 정책 시행,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의 애도받을 권리, 애도할 권리 보장 등

다섯 가지 요구를 중심으로 각종 토론회와 집회를 개최하며,

지난 12일부터 추모제가 열린 22일까지 11일간의 추모 주간을 보냈다.

 

2022년 한 해 동안 서울의 거리에서 숨진 사람은 442명으로 파악되었으나,

그것도 정부의 공식 통계가 없어 추모제를 진행하는 단체에서 자체 집계한 것이다.

전국 무연고 사망자는 3600여 명으로 3년 전보다 1.4배 증가했고

10년 전인 2012년보다 3.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전시 개막식과 홈리스 추모제가 한 시간 사이로 열려 개막식부터 들렸는데,

마침 이광수교수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입구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지켜 섰고,

안쪽에는 사진가 김문호, 성남훈, 강제욱, 김동진, 김영호씨등 반가운 분이 여럿 보였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을 추진한 김남진관장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코로나에 감염되어, 주인 없는 집에 나그네들만 잔치를 벌이는 격이었다.

 그렇찮아도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들락거리는데, 빨리 완쾌하길 바란다.

 

귀가 어두워 이광수교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작가에게 지적한 한마디는 귀에 들어왔다.

‘어깨에 힘을 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사진의 힘을 빼라는 말이었다. 학자다웠다.

전시 개막식에 대부분 듣기 좋은 공치사나 하는 판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겠나. 

 

개막식이 끝나 이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나니, 정영신 동지가 나타났다.

뒷일은 정동지에게 맡겨두고 서울역으로 달려갔는데, 기다렸다는듯이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숨이 턱턱 막혔다.

여태 추모제에 여러번 참여해 보았으나, 이렇게 추운 날은 처음이었다.

고생하는 활동가나 참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존경심이 일었다.

거리에서 죽은 442명의 영혼을 달래는 무용가 서정숙씨의 위령무에 마음 실어보냈다.

 

빨리 오라는 정동지의 전화를 받고서야 충무로로 갔더니, 이미 뒤풀이는 파장이었다.

모지웅, 이일우, 박찬호, 임성호씨 등 전시장에서 미처 보지 못한 분도 여럿 있었다.

 

그 자리에서 ‘눈빛’ 이규상대표가 인사동 '인덱스'를 인수한다는 반가운 이야기도 들었다,

사진집 한 권 만들면 사백만원씩 손해보는 무지한 출판 현실에서 살아 남으려면,

사진작품 유통업으로 확대시켜서라도 출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오후10시로 예약해 두었다는 부산행 열차 시간이 가까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광수교수더러 한 잔 더하고 주무시고 가라며,

박찬호씨를 비롯한 후배들이 가로 막았다.

 

차마 거절하지 못해 이광수교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가라할 수도 없고 있으라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라, 슬며시 합바지 방귀 새듯 새버렸다.

늙은이는 사라지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다.

 

그 순간을 뿌리치지 못해, 낮선 여관에서 자게되었다며 걱정했으나,

다음날 이광수씨 페이스 북을 보니, 늦게라도 간 모양이더라.

아무튼, 좋은 시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오니, 많은 관람 바란다.

그리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여섯 번째 사진가는 강제욱씨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진즉 알려야 하는데, 인터넷도 없는 정선서 삼일을 개기다보니, 늦은 소식이 되어버렸네요.

지난 16일 외국 출장 간 김봉규씨가 김문호씨 자당께서 소천하신 가슴 아픈 사연을 페북에 올렸는데,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상주 김문호씨는 하는 수 없이 댓글로 하소연 했습디다.
행여 걱정할까, 편안하게 돌아가신 호상이라지만,
자신의 몸을 잉태한 어머니의 임종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정선 가려던 일정을 바꾸어,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안양 장례식장 부터 들렸다.
찜통같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은 문상객들로 넘쳐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 을의 입장이었던, 김문호씨 보고 찾아 온 문상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김문호씨가 독자이거나 남매 한 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집 안에 형을 비롯하여, 딸만 넷이나 되는 딸부자였다.
김문호씨를 알게 된지가 어언 30여년 가깝지만, 그동안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큰 절로 예를 올리고 나니, 그 많은 문상객 중 사진가는 부산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 뿐이었다.
뒤늦게 사진가 강제욱씨를 비롯하여 김남진, 이규상씨가 나타났지만,

그 밖에 아는 분이라고는 중문학자 임계재선생이 유일했다. 
이광수교수의 쌍스럽고도 시원한 농아리를 안주삼아 졸라 빨고 싶었으나,
정선 갈려고 차를 끌고 갔으니, 어찌 술을 넘 볼 수 있겠는가?

소주 한 잔을 보약삼아 입만 적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리의 화두는 이광수교수가 다음 달 펴낼 사진 소설 ‘구보의 하루’였다.
눈이 나빠 글은 다 읽지 못했지만, 소설 형식을 따른 사진인들이 꼭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런데, 실린 사진이 장난이 아니었다. 언제 그 좋은 사진들을 찍었는지 깜짝 놀란 것이다.
얼마나 바쁜 사람이던가? 동에 뻔쩍 서에 뻔쩍 종횡무진 하는 양반이 사진까지 잘 찍어 바리면,

사진에 목숨 건 찍사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역시 사진은 사진을 전공한 사진가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의 사진이 더 좋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기계의 장난에 불과한 사진에 전전긍긍하는 것 보다, 생각이 앞서고 규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오는 8월30일부터 충무로 '반도카메라'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 

김문호씨 사진집 제작과 함께, 열반하신 범어사 관조스님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사진판을 좌지우지하는 갑들이 긴장하게 될 김문호씨 사진집도 사진집이지만,

불교사진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좋은 일들이니 쌍수로 환영할 뉴스였다.






그 무렵, 사진하는 양아치 한 놈이 나타난 것이다.
눈앞에 있는 선배들을 무시하고, 다른 자리에서 마신 후,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져버렸다.
못난 놈, 그러니까 양아치 소리 듣는게지.

열차 예약시간을 놓쳐 난감해진 이광수교수 따라 일어나니, 그 많던 문상객은 대부분 사라졌고,
눈에 보이는 건, 국화로 뒤덮인 조화였다.
세상에! 저 많은 꽃 값을 돈으로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했는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이광수교수가 말했다.
때로는 명사가 주위에 있다는 가오도 좀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오 좋지! 그럼 난, 뭣으로 가오 세울 수 있을까?
돈도 명예도 인물도,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가오 세울 것이 없었다.
차마 입으로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나도 한 때 가오 좀 세웠지. 요 모양 요 꼴 만든 계집 질로..,.”

내가 미쳤나보다. 문상와서 계집 질 타령이라니..

어머님 죄송합니다.
웃어려고 한 이야기니

그냥 웃어 넘기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는 21일까지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려

2017년 11월 06일 (월) 23:12:00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ss@sctoday.co.kr


▲ 'THE PLANET' 강제욱 사진집



지구의 자연변화를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제욱의 “THE PLANET"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2일 오후 6시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렸다.

강제욱은 10여 년 간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 내몽골의 고비사막, 필리핀의 맹그로브숲을 비롯하여 인간과 자연의 치열한 대결이 이뤄진 쓰촨성 대지진, 아이티 대지진, 태국의 대홍수 등 세계 곳곳을 쫒아 다니며, 그 현장을 담담하게 기록해 온 배태랑 다큐 사진가다. 이 전시와 함께 그 장정의 기록을 집대성한 “THE PLANET" 강제욱 사진집도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다.

강제욱은 사진집에서 “재난의 참혹한 풍경 앞, 겨우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려보면 오히려 넘치는 생명력과 문명의 때를 벗은 아름다운 자연으로의 회귀를 발견한다. 초원을 호령했던 제국들도 결국 한줌의 모래로 사라진다. 꽃은 활짝 피고 시간이 지나면 떨어진다. 언젠가 도로는 강이 되고 시멘트에도 식물은 뿌리를 내린다. 새들은 지저귀고 문지기 개들은 자유를 얻는다. 빛은 찬란하게도 이들을 비춘다.”고 말했다. 바로 자연과 문명의 순환을 말한 것이다.



▲Bako National Park, Borneo Island, Malaysia, 2008



일단은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돌아보며 받은 느낌이란, 온몸에 힘이 빠지듯 나른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햇볕이 강한 날씨나 화려한 색을 피한 흐린 날씨에 의한 회색 톤이 주는 나른함 일수도 있겠고, 사람이라고는 코딱지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하는 방식에 앞서 물질문명이 가져 올 미래 풍경을 예견하고 진단했다는 점이다. 아마,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날의 미래 풍경을 내다보는 것 같은 참담함이 그런 나른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Typhoon Haiyan (Anibong), Tacloban City, Philippines, 2014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는 쉽게 전달될 수는 있는 대신 쉽게 잊혀 진다. 다소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이러한 묵시적인 메시지가 보는 이의 마음을 붙들어, 그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다시 일러주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연예찬도 환경 비판도 아니고, 무엇을 강제하거나 계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역과 년도 외는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없이 마치 독백처럼 구시렁대는 나른함이 이 사진이 주는 매력인 것이다.



▲Mangrove Forest, Olango Island, Philippines, 2012



때로는 인적 없는 원시림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유령도시 같은 건축물과 황량하기 그지없는 재난의 현장들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폐자재들이 뒤엉킨 파괴현장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문명의 잔재들이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로, 다 부질없는 것이란 말이다.



▲The Arch, Kowloon, Hongkong 2010



원시적 숲에서 비롯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도 언젠가는 허물어져 밀려나고, 결국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란 게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흩어졌다 다시 생성되는 자연이치, 즉 윤회를 뜻하는 철학적 사유가 깔린 것이다.



▲Typhoon Haiyan (Anibong), Tacloban City, Philippines, 2014



사진집 서문에 적은 이광수교수의 글 한 단락을 들어보자. “The Planet”는 사건 중심의 기록이 아니라 무한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유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드러난 현장을 저널리즘 관점으로 기록한 것도 아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도 않고, 사진으로 재현된 어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헤치려 하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흔히들 하는 소재의 기이한 면이나 자극적인 현상을 부각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가 평범하다. 사진가의 시선은 최대한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문명의 이기를 보여주고자 할 때는 대상에 좀 더 다가가 있다. 그가 다가가서 찍은 문명의 이기들은 주로 자동차, 오토바이, 배와 같은 이동 수단인데, 이주와 정착으로 인해 문명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려는 방식이다.

(중략)

▲Gobi Desert (Shapotou), Inner Mongolia, China, 2010



“더 플래닛, The Planet”는 지구사를 전유(專有)로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모사에서 기록을 지나 이야기로 간 다큐멘터리 사진의 지평이 강제욱에 의해 이렇게나 넓혀졌다“고 평가했다.

강제욱 만의 언어로 우주 변화의 대서사를 기록한 대표작 21점 외에도 옆 라운지 갤러리에선 작가 데뷔 초기부터 The Planet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강제욱 사진가



전시는 강남역 1번 출구, ‘스페이스22’(02-3469-0822)에서 오는 21일까지 열린다






10여년간 지구의 자연변화를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제욱의 “THE PLANET"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2일 오후 6시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렸다.

전시와 함께 그 장정의 기록을 집대성한 “THE PLANET" 강제욱 사진집도 ‘눈빛출판사’에서 나왔다.





개막식에는 강제욱 사진가 내외를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부부, 이광수, 김문호, 엄상빈,

박종우, 김남진, 양재문, 성남훈, 김봉규, 정영신, 이규철, 남 준, 곽명우, 이은숙, 곽대원씨,

그리고 수원국제사진축제에 참여한 외국의 사진가 등 많은 분들이 전시를 축하하며 밤늦은 시간까지 축배를 들었다.






강제욱씨는 그동안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 내몽골의 고비사막, 필리핀의 맹그로브숲을 비롯하여

인간과 자연의 치열한 대결이 이뤄진 쓰촨성 대지진, 아이티 대지진, 태국의 대홍수 등

세계 곳곳을 쫒아 다니며, 그 현장을 담담하게 기록해 온 배태랑 다큐 사진가다.






일단은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돌아보며 받은 느낌이란, 온몸에 힘이 빠지듯 나른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햇볕이 강한 날씨나 화려한 색을 피한 흐린 날씨에 의한 회색 톤이 주는 나른함 일수도 있겠고,

사람이라고는 코때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하는 방식에 앞서 물질문명이 가져 올 미래 풍경을 예견하고 진단했다는 점이다.

아마,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날의 미래 풍경을 내다보는 것 같은 참담함이 그런 나른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연예찬도 환경 비판도 아니고, 무엇을 강제하거나 계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역과 년도 외는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없이 마치 독백처럼 구시렁대는 나른함이 이 사진이 주는 매력인 것이다.

때로는 인적 없는 원시림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유령도시 같은 건축물과 황량하기 그지없는 재난의 현장들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폐자재들이 뒤엉킨 파괴현장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문명의 잔재들이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로, 다 부질없는 것이란 말이다.
원시적 숲에서 비롯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도 언젠가는 허물어져 밀려나고,

결국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란 게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흩어졌다 다시 생성되는 자연이치, 즉 윤회를 뜻하는 철학적 사유가 깔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우주 변화의 대서사를 기록한 대표작 21점 외에도

옆 라운지에서는 작가 데뷔 초기부터 The Planet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이 전시는 강남역 1번 출구에 있는 ‘스페이스22’(전화 02-3469-0822)에서 오는 21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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