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월20일자에 실린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는 기사다. 

인사 구술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해방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나온 말인데,

소 선친께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와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해방될 무렵의 채현국씨 나이는 10살로 그 정도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만한 나이인데,

학교친일교육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건 일제 황국신민으로 생활화된 가정교육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가진 근현대사 구술채록 대담에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문제되는 인터뷰 내용-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인터뷰 기사 전문이다-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
개인사 구술 작업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2019.03.20 / 한국일보 / 스크랩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과 대칭되는 말을 꼽으라면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가 있다. 하지만 앞의 말과 달리, 뒤의 말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회 변화가 급격해 노인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영향력 좀 있다는 노인들이 한다는 얘기는 ‘이만큼 먹고살게 된 게 다 누구 덕이냐’는 것이 대부분이어서다.

조선시대 행장(죽은 이의 언행을 기록한 문장)의 전통까지 겹쳐져서일까. 번듯하게 한자리 차지했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며, 그런 자리 하나 못 차지해본 사람은 바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 깊이를 제거해버리고 나니, 우리 사회엔 제대로 된 자서전, 평전, 구술 문화가 없다.


[저작권 한국일보] 장신(왼쪽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가 채원국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노인에게 속지 말라

그래서 ‘채현국’의 존재는 소중하다. 1935년생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하 ‘선생’)은 1945년 8ㆍ15 해방, 1950년 6ㆍ25 전쟁, 1960년 4ㆍ19혁명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고, 민주화 운동을 후원했고, 학교를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내 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건달 할배’라는 별명답게 오히려 젊은이들더러 “늙으면 뻔뻔해지는 비열한 꼰대들에게 절대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요즘도 여전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곤 하는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도 거부했다. 채 선생은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가 사람을 속이는 말”이라 본다. 그는 “돼먹지 않은 이들이나 세대갈등이라 부르며 수작을 붙이려는 것”이라더니 “그런 사람들은 원래 젊어서도 형편없었는데, 젊은 시절엔 드러내놓질 못하다가 늙으니까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서울대 출신임에도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역 일대에 자주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를 두고서도 “서울대 나와 의사하거나 법대 나온 내 주변 사람들도 앞에 안 나서고 뒤에서 100만원, 200만원씩 후원한다”며 “일제시대 때 공부 잘하는 게 수지 맞는다는 걸 알고 그저 공부만 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매섭게 쏘아댔다.


◇8ㆍ15 해방이라는 ‘충격’

그런 채 선생은 요즘 구술 작업에 재미를 들였다. 일제시대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기억,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 연극단원으로 활동했던 추억, 아버지 채기엽씨와 연탄공장과 탄광사업을 일으킨 경험 등을 바탕으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주로 문헌자료를 뒤적이던 현대사 연구자들도 그의 생생한 기억에 호기심을 내보였다. 실제 몇몇 학자들은 올해 초부터 채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채 선생은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마주했다. 두 번째 자리였다.

채 선생이 파격적 언행을 거듭하는 건 1945년 8ㆍ15 해방이 안긴 충격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이 아니라 ‘해방의 충격’이라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채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 “생각하며 살자”

세상이 한번에 뒤바뀐 뒤 이제껏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세뇌된 친일파’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그 이후 채 선생에게 세상을 달리 보는 눈, 달리 사는 법을 일러줬다.

그걸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하며 살자’다. 해방은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권력자가 훈련시킨 데 따른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일제시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말하지 못하면 얻어맞았다. 뜻도 희미한 일본어 군가(軍歌)를 수없이 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 한잔 들어가면 그 노래가 잘도 나온다”고 했다. 생각 없이, 주어진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다가는 어떤 엉터리 같은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채 선생은 “해방 이후,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서울대? 가정 학대의 정점

해방 뒤 상황은 처참했다. 그 전까지 일본어만 썼으니 중ㆍ고등학교 가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선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릴 적 우리말 소설을 즐겨 읽었던 채 선생은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지금도 “서울대가 최악의 학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말이 낯선 이들은 한문으로 된 시만 읊었다. 전공 수업도 교수가 우리말을 겨우 외워서 가르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해방됐으나 그들은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땐 연극반에 심취했다. 배우 이순재와 같은 극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채 선생에게 서울대란 그저 시험 잘 치는 학생을 뽑는 곳일 뿐이다. 그는 그런 시험 중심 체제를 가학, 그러니까 ‘가학(家學)’이 아니라 ‘가학(家虐)’이라 부른다. 집안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집안의, 가정의 학대다. 자기만의 독서, 탐구를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집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직장을 구한다. 채 선생은 이걸 “통치에 방해되는 생각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방식”이라 부른다. 이런 방식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탄광 부자 … 과감히 접다

채 선생의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준 1960년대 광산 경영에까지 이어졌다. 광산은 원래 아버지 사업이었다. 1952년 연탄공장을 시작한 아버지는 광산주와 계약을 맺고 채굴한 광물 가운데 일부를 수수료로 내는 독립 경영인 ‘덕대’였다. 광산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연극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배우가 되려고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 들어갔던 채 선생이 뛰어들었다. 공격적 경영으로 그야말로 떼부자가 됐다. 당시 소득세 납부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개발 독재시대였지만 광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무료 진료를 제공했다. 또 흥국탄광은 그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숨던 도피처이자, 해직기자들의 궁한 살림을 돕는 융통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 사업 잠깐 거들어 드리는 게 목적이었지 돈을 크게 벌 생각도 없었고 부자가 되는 게 창피했다”는 이유로 채 사장은 1973년 그간 잘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10년치 퇴직금을 광부들에게 쥐여주는 방식 등으로 모두 정리했다. 채 선생이 그나마 아버지에게 이어받았던 것은 효암학원 이사장(경남 양산 효암고, 개운중)직이다. 이건 아이들을 키우는 거니 할 만하다 생각했다.


◇제대로 된 기억 전승, 그게 어른의 임무

채 선생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구술 채록은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끝났다. 3시간 가량 이어진 이야기 행군 뒤에도 고령의 선생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채 선생이 구술에 열정적인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기억 전승’에 나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해방의 충격’ 같은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직접 역사를 써야 한다. 채 선생은 도서관 분류법을 펼쳐 보였다. 철학, 종교, 사회ㆍ자연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 등. 그는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시대 경험을 구술하면 광범위한 정보들이 쌓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용비어천가식 구술은 안 된다. 돌직구처럼 묻고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채 선생은 “묻는 사람이 혹시 노인의 체면을 구길까 봐, 질문의 내용이 가혹할까 봐 망설여서는 안 된다”며 “더 엄격한 기록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선생은 노인들에게 기록을 하라고 외쳤다. 대신 이런 조건을 붙였다. “결코 자신의 과거 잘못을 외면하는 합리화는 하지 말 것.”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이건희, 이명박 그리고 홍성대는 그의 인터뷰를 읽었을까?

"미디어스" 미디어뉴스비평 / 김완 기자

언론은 곧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실을 논하는 장이다. 그래서 인터뷰는 가장 흔한 언론의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의 인터뷰이가 언론을 장식한다. 인터뷰로 감동을 전하기란 그래서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한 편의 인터뷰가 실로 엄청난 울림과 반향을 일으켰다. 출고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무려 3만여 건에 달하는 SNS 공유가 발생했다. 이쯤 되면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실로 오랜만에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인터뷰가 등장했다.

뜻밖이다. 화려한 연예인도 아니고, 동경의 대상이 될 스타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어르신이다. 아니, 이제는 진귀해진 진짜 어른이다. 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은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한겨레가 뽑은 인터뷰 제목은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였다. 굉장히 공세적이면서도 역설적인 제목이었다. 그리고 단 한 문장만으로 당대가 마주하고 있는 모순의 지점들을 모두 뒤섞어 버린 ‘일갈’이었다.

                                    ▲ 1월 4일자 한겨레신문 20면에 실린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인터뷰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언론학자 이진순은 채현국 이사장을 만난 이유에 대해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고 밝혔다.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진순의 이 바람과 고백은 인터뷰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채현국 이사장은 인터뷰에 앞서 “독지가라고 쓰지 말고, 미화하지 말고, 누구를 도왔다고 쓰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채 이사장의 인터뷰는 사실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매우 특별하다. 시대를 관통해 온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비범하다. 하지만 그 비범함의 끝에서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그 비범함의 대가로 거머쥐게 된 ‘성공’과 ‘명예’를 과시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읽는 이들은 어떤 이가 인터뷰이로 선정된 까닭이 시대를 관통해온 비범함인지 아니면 그 비범함 이후의 당연한 성취를 ‘관람’하라는 것인지 헛갈릴 때가 많다. 하지만 채현국 이사장은 그야말로 비범함 이후에 철저히 평범해지는 길을 선택함으로서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담대한 세계를 구축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한때, 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력에 대해 채현국 이사장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것”이라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은 탄광”을 한 자신은 절대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신선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반도체 산업을 일구며 국내 제일의 재벌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되며 건국 이래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어떤 재벌의 세상에서 채현국 이사장의 이런 견해는 전복적이기까지 하다.

재산을 정리하고 이후 재산을 활용한 방식에 있어서도 채현국 이사장의 행태는 가히 ‘기인’이라고 할 만하다.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이야 많지만 채현국 이사장은 아예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엄청난 재산을 갖고 권력까지 탐하다가 그 재산이 문제가 되자 허울뿐인 공익재단을 세워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은 다 내며 재산을 환원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전직 대통령은 채현국 이사장의 이 말에 어떤 생각을 갖을지 궁금하다.

채현국 이사장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그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돌멩이에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써있다고 한다.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믿는 그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해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맙다”며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산다”고 말했다. 덧붙여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고 당부했다. 채현국 이사장의 이 말을 그와 엇비슷한 연배이고 사립학교 이사장이란 엇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전주 성산고 홍성대 이사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성산고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역사왜곡 논란이 있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채 동문은 물론 신입생과 재학생 그리고 전국적 시민사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중이다. 이 꿈쩍없음의 뒤에는 <수학의 정석>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한 홍성대 이사장의 의지가 있고 말이다.

이건희, 이명박 그리고 홍성대 같은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을 모두 거두고도 여전히 한 치의 기득권도 내려놓고 있지 않은 노인들에게 채현국 이사장이 물었다. 이 사회에서 노인들은 왜 이 모양이냐고.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당부했다. 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말라고. 날이 갈수록 ‘노인을 위한 나라’로 향하고 있는 정치적 파국의 시대에, 이 특별한 노인의 얘기는 앞으로도 꽤 오래 화두로 떠다닐 것 같다.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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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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