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애를 업고 다니냐?’

 

지금은 남자들도 애를 보지만, 옛날에는 쪽팔리는 일이었다.

조롱하는 친구의 동작과 쑥스러워 하는 표정이 너무 정겹다.

등에 업힌 어린애의 눈길 한 번 보라.

이게 사는 재미고, 이게 사진이다.

 

1972년 이수종선생께서 찍은 사진을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동생을 업고 공부하는 학생

 

학교에서 동생을 등에 업고 공부하는 걸 생각이나 해 보셨나요?

모두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힘들게도 배웠다.

너무 많이 배워 탈인 요즘 보니, 아픈 추억도 그 때가 그립다.

 

부천의 김수열선생이 1974년 낙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고삐 풀린 소

 

소 몰고 나온 소녀에게 이변이 생겼다.

왜 소의 고삐가 풀렸을까?

안간힘을 다해 소꼬리를 움켜진 소녀의 표정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다.

 

1968년 장지영선생께서 포착했다.

‘동아사진컨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한정식선생의 “Don’t go!”

 

이 사진은 한정식선생께서 아마추어로 활동하시던, 1968년에 찍은 사진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한 사진이다.

지금은 선(禪)에 가까운 사진을 하는 선생의 사진세계를 헤아린다면,

너무 재미있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해학적인가?

특히 외래어 쓰는 것을 싫어하는 선생께서 “Don’t go!”라는 사진 제목을 붙인 것도 이례적이다.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봄 사건 났네.

 

모처럼의 봄나들이에 마냥 즐겁다.

봄바람에 치마만 날리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날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1966년 봄에, 진주의 이영달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꽃 팔러가는 처녀들

 

아침 햇살을 머리에 이고 꽃 팔러 나서는 처녀들의 뒷태가 너무 정겹다.

70년 전 임응식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의 처녀들은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셔도 백수가 가까운 할머니들이다.

임응식 선생께서 부산 계실 때는 주로 광복동에서 활동하셨으니,

아마 국제시장으로 국화 팔러 가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응식회고 사진집'에서 옮겼다.

 

 

그 시절이 그립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풀풀 날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 당시는 길을 오가며 흙먼지께나 뒤집어썼다.

때로는 자동차바퀴에 튄 자갈에 맞아 이마가 터지기도 했지만...

 

1962년 부산의 김복만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해방의 순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 사진가 현일영선생께서 찍은 감격의 순간이다.

 

"광복60년, 사진60년 / 시대와 사람들"도록에서 옮겼다.

 

 

여기는 마포 종점이 아니라 마포 나루터다.

 

1945년도 정남영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

'한국사진역사전' 도록에서 옮겼다

 

 

북녘, 도심의 한 모습이다.

 

유령의 도시처럼 텅빈 거리와,

군복을 입은 아버지 가슴에 안긴 애기의 모습에서 찡한 인간애를 느낀다.

 

1997년 평양에서 찍은 Martin Parr 사진이다.

-PRESTEL- 'A YEAR IN PHOTOGRAPHY'에서 옮겼다.

1966 세월


현일영(1903-1975)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진가로 평가받는다.
객관적인 향토서정주의가 판치던 시절에 신즉물적인 경향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분이다.


좌로부터 현일영, 박필호, 서순삼선생


1958 무제


그는 일본에서 사진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에 심취한 지식인이었다.
30년대에 종로에서 ‘현일영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고, 
5-60년대에 세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며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1960 실패


1960 태극기


그는 이야기를 끌어 담는 걸작주의를 피해, 사물과의 관계성에 치중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독한 탐색’이란 작가의 말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선생의 고뇌에서 나온 사색의 파편이었다.


1960 무제


1960 손목시계


사진만 봐서는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혁명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알 수도 없었지만, 너무 깊숙이 알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그 정도만 알고, 존경의 마음을 가져 왔었다.


1958 무제



지난 2일, 원로사진가로서 제일 연세가 많은 이명동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새해 인사차 약수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모님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다, 85년 “예술계”란 잡지에 투고한, 내 사진에 대한 글을 찾았다며
전해 주기도 했다. 꼼꼼하게 챙기시는 성격은 여전하셨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 들렸는데, 기어이 설렁탕 먹으러 가자신다.
밥값 낼 요령인지, 얼핏 사모님에게 용돈 타시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선생님도 사모님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걸, 안 것이다.



설렁탕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소주까지 주문하셨다.
나를 위한 배려지만, 새해에 건배라도 한 번 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건배를 하고, 이 날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여쭈었다.
현일영선생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발동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돌아가신 현일영선생님, 아시는 것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이소.”


그 분은 남다른 면모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모두가 그 분 사진에 관심은 많았지만, 동조한 사람이 별 없었다는 것이다.
좌익이란 빨간딱지까지 붙어, 요시찰인물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거라 하셨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더 깊숙한 얘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사물이 주는 시적 울림까지 드러낸 현일영선생의 사진은, 앞서가도 한 참 앞선 것이다.
그러니 사진계 이단아로 취급되어 뒷전으로 밀려난 게 아닐까?
한 발 앞서면 지도자가 되고, 두발 앞서면 미친놈 소리 듣는 다는
스코트 니어링의 명언이 생각난다.


글 / 조문호


현일영선생 작품사진은 '한국사진역사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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