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사진가 남 준씨의 '갤러리 시이'초대전 ‘무경계(無經界)’ 개막식이

지난 16일 오후5시, 신촌 홍대부근에 위치한 ‘갤러리 사이’[02-323-0308]에서 열렸다.

난, 옛날 사진들을 급히 정리해야 할 일이 생겨, 요즘 일에 쫓겨 산다.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지만, 작정한 사진전이라 모처럼 나들이를 한 것이다. 

지하철 홍대 역에서 구자호 선생을 만났다. 주말이라 사람들에 끼어 밀려 나와야 했다.

번잡함에 촌놈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 몸은 기상측후소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려 그랬는지 아침부터 온 몸이 쑤셨는데, 진짜 비가 내린 것이다.

전시장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최은경관장, 미술평론가 홍경한씨,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구자호, 엄상빈, 김남진, 성남훈, 강제욱, 김영호, 정영신, 김재훈, 유별남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함께해 전시를 축하하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작가가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었다,

종교적 신앙심 하나로 살아가는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적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범접하기 힘든 오지를 여행 삼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에 나오는 장면처럼, 오체투지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모방한 비틀어진 사진이 아니라, 정석의 앵글로 참 잘 찍었더라.

직설적인 그의 사진언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존재 의미를 일깨우고 있었다.

생생하게 드러난 어린이 눈동자에서 그들의 현실과 꿈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뒤풀이 장소로 옮겨서는 사진계 많은 뒷이야기들을 들었다.

유별남씨는 요즘 물의를 일으킨 장국현사진전을 반대하는 일인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연일 이어지고, 전시 작가는 '예술의 전당'전시장에 뒷구멍으로 들어가

뒷구멍으로 나온다는데, 쥐새끼같은 부끄러운 전시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구자호 선생은 신문의 위기를 말하기도 했다.
10년내에 모든 신문사들이 사라진다지만, 벌써 신문사 교열부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진부는 물론 취재 기자들까지 외주업체에 위탁할 처지이고, 심지어 사무실에 컴퓨터가 없는

언론사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기자가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현장에서 직접 일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에서 퇴임한 그가 지난 번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을 때 일이란다.

조선일보에 비엔날레 기사가 나지 않아, 4면으로 된 색션지를 만들어 신문에 나오게 하였다고 한다.

담당기자는 물론 문화부장도 모르는 대구사진비엔날레 특집이 나온 것이다.

세상, 참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사진,글/ 조문호








"내면으로 건져 올린 삶의 숨결, 시선에 덧대다."



미술평론가  홍경한





















































[김석종의 만인보]

 

인사동 전각 전문갤러리 앞에 앉은 육명심선생 / 조문호사진



망망한 티베트 고원지대를 서성대는 노년의 한 사진가를 떠올린다. 그는 아득한 세월 저편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짧은 명줄 길우려고 절로 보냈다. 스무살만 넘기자고 했는데 영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제는 집안에 대가 끊길 판이었다. 어렵게 설득해서 장가를 들였단다. 하지만 두 달도 안돼 집을 나가버렸다(말하자면 어머니는 씨받이였던 셈이다). 요 밑에 쪽지 하나 남겼더란다. 밝을 명(明)자 마음 심(心)자. 명심이 일곱살 때 어머니가 그랬다. “네 아비가 그예 서방정토로 가셨구나.” 아들은 황혼녘이면 아버지가 가셨다는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가 인생의 황혼녘인 일흔살이 되어 서쪽나라 티베트를 찾아간 거였다. 사진작가 육명심(84)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서방정토의 중심인 ‘수미산’으로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라스가 있는 곳. 티베트의 깊은 영성이 단박에 그를 사로잡았다. 고산병에 쩔쩔매면서도 히말라야 언저리에 있는 티베트 고원과 ‘오래된 미래’의 인도땅 라다크, 부탄을 10여년 떠돌았다. (세 곳 모두 티베트불교 문화권이다). 그가 이번에 티베트 순례의 여정을 담아 펴낸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글씨미디어)을 보니 ‘거장’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티베트 산악과 광야, 궁핍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들의 삶, 순례자들의 경건한 영혼, 길가의 돌무더기와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피어나는 흙냄새와 룽타(티베트 서낭당 깃발)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 딱 붙잡아낸 경지다. 마치 점묘화같이 아련한 흑백 사진 속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 어떤 영원의 길이 나있는 느낌이다. 흔히 보는 화려한 오색 빛깔 민속이나 산악풍경을 담은 티베트 사진과는 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는 1년 전 티베트 전 지역을 동서로 횡단한 뒤로 길었던 영혼의 여행을 접었다. 이 순정한 땅마저 속절없이 망가뜨리는 개발의 광풍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다.

그건 이 땅에서도 익히 봐온 모습이다. 1960년대 이래 ‘인상’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으로 사라져가는 기층과 토속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 한국 사진역사에 뚜렷하게 획을 그었다. “민중이 깎은 장승이 바로 백민(기층민), 우리 토박이들의 얼굴이더라고. 무를 장에다 박아 놓으면 장아찌가 되듯이 천지조화와 풍토가 곰삭아 우러난 게 장승의 매력이지. 너무 쉽게 내다버린 우리 얼굴이고 정신성이랄까.”


 

육명심이라면 단연 ‘예술가의 초상’을 꼽기도 한다. 10여년 동안 찍은 당대 최고 예술가 70명의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의 사진은 그 자체가 보석이다. 대표적인 게 미당 서정주인데,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양손을 소매에 끼고 ‘햇빛 속의 갈맷빛 등성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에서 ‘팔할은 바람이 키운’ 미당 삶의 내면과 시세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거다. 어찌보면 뒷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것 같은 모습의 이 사진을 미당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사람의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평하는 대로 그야말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인상의 박두진 시인, 앞섶을 풀어헤치고 파안대소하는 고은 시인, 반나체로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레 스님 중광, 동백림 간첩단사건의 고문 기억이 각인된 듯한 천상병 시인 등의 사진은 당대의 명장면으로 지금껏 회자된다. “그들의 거실을 지나 안방 깊숙이 들어간 사진이다. 당대의 소중한 정신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순전히 독학의 늦깎이로 사진을 하게 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성장기 내내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까지 절에 뺏길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꺾었다. 끝까지 독신을 고집하다가 서른세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혼수품으로 카메라를 가져왔다는 거다. 신혼여행지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조작법을 배워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지 반년 만에 첫 전국 촬영대회에 나갔다. 처음에는 남들이 찍는 것만 지켜봤다. “잘 관찰해서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그게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육명심의 카드’다. “예술이란 도매금에 넘어가지 않는 것, 통념의 쳇바퀴에서 최대한 멀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육명심과 그의 후배 사진가 황헌만의 경북 문경 장승 촬영길에 동행했다. 그랬는데 대사진가 육명심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거였다. “하하. 이것도 필요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걸어두는 사진도 있는 법이지.” 그는 1박2일 동안 정말 한 장의 사진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선승’이란 말도 듣는다. 더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가 1982년 당대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 사진을 찍겠다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에 쳐들어갔다. 사진은커녕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 스님이 웬일인지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씨익 웃더란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여기서 그의 대답이 예상밖이다. “안되겠습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성철 스님의 눈두덩이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예. 나중에 다시 와서 찍겠습니다.” 그 후 다른 사진작가가 먼저 성철 스님의 사진을 찍은 걸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 정말 천하무구의 사진 한 방을 남겼지.”

그가 대학에서 28년 동안 변함없이 가르친 사진론이 있다. “잘 찍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찍어라.” 1998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모든 직책을 싹 그만뒀다.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 10층에 작은 작업실을 내고 들어앉았다. “정년이야말로 마지막 주어진 찬스거든.” 이번에 가보니 사무실이 그대로 하나의 선방이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 참선용 좌복이 놓였다. 그는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1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40분간 포행(산책)을 한다. 오전에 2시간을 더 수행한다. 산중의 스님들과 똑같이 15년을 꼬박 지켜온 일과다. 벌써 다음 작업에도 돌입했다. 이번엔 우리 삶에 오래된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는 일상의 불교를 찍겠단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되겠지. 보다 성숙하고 심화되고 나다운 삶을 찾아내려고 해. 삶과 사진이 하나의 도(道)가 되는 것, 그 생사일여(生寫一如)의 작업이 될 거야.”

 

 

[경향신문]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