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1

지난 17일은 정선에 다녀왔다.

매년 명절을 앞두고 성묘도 할 겸 연례 행사처럼 갔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묘를 이장해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소지가 정선으로 되어있어 재난지원금을 정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사장도 보고 신세 진 분들에게 선물이라도 전할 겸 정영신씨와 정선에 간 것이다.

 

서울서 챙겨 온 선물을 전하러 아랫 만지골의 최영규씨 댁부터 들렸다.

마침 두 내외가 집에 있어 직접 전해 줄 수 있었는데, 최영규씨 인사가 걸작이다.

“이제 모친 무덤을 파갔으니, 선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가져 왔냐?”는 것이다.

‘십여 년을 해 온 일인데 어찌 그만둘 수 있냐?“고 답했지만, 듣기는 좀 그렇더라.

 

마침 일하러 오기로 한 일꾼들 주려고 가마솥에 곰국을 잔뜩 끓여 놓았는데,

펑크를 냈다며 곰국이라도 한 그릇 하라며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달려 온 터라 한 그릇 맛있게 얻어먹었으나,

이놈의 차 때문에 반주 한 잔 못 걸치는 심정,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윗만지골 창수네 집도 들렸다.

그 집에는 일찍부터 손님들이 찾아와 음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물만 전하고 떠나려 했더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통 사정이다.

지난 번에 방황하는 아들 창수 주라고 카메라 한 대를 맡겨두었는데,

”창수가 너무 좋아한다“며 고마워했다.

아무튼 사진에라도 재미를 붙여 마음을 다잡았으면 좋겠다.

 

장 볼 일이 있어 서둘러 정선 읍내로 나갔다.

정선 장날로 맞추어 갔는데, 이렇게 서울과 정선의 물가 차가 큰지는 미처 몰랐다.

서울보다 시골이 물가가 더 비싸다는 이야기야 들었지만,

그것도 공산품도 아니고 시골에서 재배하는 농산물 가격 차이가 이리 심할 수 있단 말인가?

재래시장도 아니고 정선 축협 하나로마트와 서울 은평구 ‘하모니마트’의 가격 격차가 말이다.

 

그렇다고 장 보지 않을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한 것만 골랐다.

손이 오므라들어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지원금은 남았다.

덕분에 추석빔으로 신발가게에서 신발까지 한 켤레 얻어 걸쳤다.

주인에게 정들었던 헌 신발도 싸 달라고 했더니,

“구멍 난 쓰레기를 왜 가져가냐?‘는 타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새 신발을 신어보니 너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한 판 뛰어도 좋을 것 같아 ”사모님! 블루스나 한번 땡기시죠“라며 능청을 떨었다.

 

언제 올지도 기약 없는 정선을 떠나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선과의 연을 이어갈 것인지 끊을 것인지를 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더 두고 보기로 세월에 맡겼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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