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미술 운동을 이끈 비평가이자 진보미술의 대부로 꼽혔던 김윤수(1936~2018)선생의

일주기를 맞아 그의 얼굴상을 새긴 기념비가 남양주 모란공원에 세워졌다.

 

지난 29일 오후1시 무렵, 김윤수선생 묘비 제막행사에 가기 위해 버스가 대기한 인사동 '수운회관' 앞으로 갔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화가 민정기씨 였다.

뒤 이어 손병주, 이광군, 유홍준, 박홍순, 이종구, 임진택, 두시영, 김영종, 구중서, 신학철, 김정헌, 박은태, 장경호,

김영동, 최석태, 박재동, 김천일, 홍선웅, 강성원, 노광래씨 등 버스 탑승인원 45석을 한 좌석도 남김 없이 채웠다.

 

버스가 출발하자 유홍준씨가 일어나 기념비 제막식에 맞추어 '창비'에서 출간한 김윤수선생 저작집을 소개했다.

'창비'에서 '리얼리즘 미학과 예술론', '한국 근현대사와 작가론','현대미술의 현장에서' 등 세권으로 묶었는데,

책값이 십만원인 저작집을 참석한 분에게 무료로 증정한다고 했다.

 

이어 '민미협'두시영 회장이 일어나 한 분 한 분 불러내 김윤수선생에 얽힌 이야기를 시켰다.

귀가 어두운데다, 맨 뒷 좌석이라 소리까지 왕왕거려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정영신사진 / 좌로부터 조문호와 민정기씨

말만 알아 들었다면 귀감이 될만한 내용을 소개하면 좋으련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김윤수선생으로 대신해야겠다.

평소 진보적 미학자로 존경한 분이나, 영남대 출신도 아닌데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 특별한 인연은 없다.

 

오랜 세월 전시장을 드나들다 선생님을 만나 뵈면, 인사나 드리는 정도였다.

김윤수 선생은 미술을 너무 사랑하는 분으로 무슨 일을 추진하면 그 열정을 아무도 따를자가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쉽게 생각한 것은 선생께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한 일이었다.

내가 아는 선생님 인품으로 관직은 어울리지도 않지만,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민예총'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많은 업무 중 작가 작품을 소장하는 업무도 있지 않은가?

인정에 약한 선생께서 실질적으로 '민예총'을 이끌어 가는 사무총장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어쨋던,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며 유인촌에게 당한 수모는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각설하고, 모란공원에 도착하니

미망인 김정업씨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미술평론가 이태호, 김준권, 박불똥, 박세라, 임정희, 김세규, 양기환씨 등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이 날 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한 분은 지인들과 후배 미술인 70여명이 함께 했다.


김윤수선생께서 돌아 가실 때 문상만 가고 장지에 가지못해 아쉬웠는데. 묘역이 잘 조겅되어 있었다.

기념비 제막식에는 미망인 김정업씨를 비롯하여 유홍준, 백낙청, 신학철, 구중서, 채희완, 임진택, 두시영씨

여러 명이 줄지어 서서 하얀 천을 거두어 내니, 검은 빛 화강암 재질로 된 묘비가 마치 선생께서 환생하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념비는 조각가 이태호 경희대 교수의 작품으로, 뒷면의 약력과 민주화 운동 이력은 유홍준씨가 썼다.

 

다들 기념사진을 찍었고, 영남대 출신과 '민미협' 화가 순으로 나누어 참배를 드렸다.

'민미협' 화가들은 너무 많아 두 패로 나누었는데, 장경호씨 연배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을 차례인데, 인원이 많아 찍을 장소가 마땅 찮았다.

부감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며 자연스럽게 찍으면 좋어련만, 다들 말을 안 들었다.

옛날부터 찍어왔던 전형적인 기념사진만 생각하는지, 비좁은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사진사 앞에서는 대통령도 말을 듣는데...

 

기념사진을 찍은 후 김윤수 선생 추모전이 개막될 평창동 '가나아트'로 이동했다.

올 때 처럼 다시 차례대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이어가 곤욕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김정헌씨 초대전이 열리는 '김영종 미술관'을 거쳐 '가나아트'로 갔는데,

묘역에 참배하지 못한 분도 많이 오셨다.

 

사진도 많지만 이야기가 길어 제막식 소식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추모전 소식과 만찬 사진은 나중에 올릴 작정이니 양지하시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일봉 조성국(1919-1993)선생은 ‘한국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영산줄다리기(당기기)의 기능보유자였다.



'창녕을 사랑하는 사람들'카페에서 스크랩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태어 난 선생께서는 일제 때 맥이 끊겨 잊혀져가던

영산줄다리기를 되살려 마을 놀이로 자리 잡게한 장본인이다.





영산줄다리기는 애살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잡이로 신명을 일으키며 답합으로 이끄는 대동문화다.

선생께서는 198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지방대에서 줄 바람을 일으켰는데,

그 신명난 대동놀이로 삼일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민주화에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10여 년 동안 영산중학교에 근무하는 등 향토교육에도 기여하셨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며, 양파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는 등 농촌경제를 일으키려는 향토애도 대단하셨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되도록 이끌며 '양파재배법'(1972)을 비롯한 여러 권의 문화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다.





난, 조성국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영산중학교 은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이라 어린 시절 기억들이 너무 새록새록 하다.

학기가 바뀌어 교실에 들어와 처음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 기억난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자신을 소개하며, “곰보도 정이 들면 구멍구멍마다 든다”며 웃기셨다.





국어와 농업을 가르쳤는데,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유달리 기다려졌다.

가끔 여러 학생에게 각자의 대사로 연결하는 연극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수업의 지루함을 해소시키며 머리에 주입시키는 선생의 교육방식은 틀에 박힌 다른 분들과 사뭇 달랐다.

한 번은 내게 여자 배역을 맡겼는데, 너무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 친구들로 부터 웃음을 산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선생님께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당분간 못 나오신다고 했지만, 동내 소문은 “빨갱이로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교원노조에 연루돼 구속되었다고 하셨다.

석방되어 해직된 후로는 농사꾼으로 변신해 양파재배와 줄다리기를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 이후 고향을 떠나 와 잊고 있었는데, 1970년대는 인간문화재의 권익과

올바른 전통 계승을 위해 '한국인간문화재연합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이후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민예총’ 창립총회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고은시인과 미술평론가 김윤수선생, 조성국선생. 세분이 '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신경림시인은 사무총장,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은 김용태씨가 맡게 되었다.





너무 반가워 이런 저런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려 찾아보니 한 장도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선생의 사진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필름이라 정선에 쳐 박아 둔 모양인데,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이 찍는 일보다 더 급한 것 같았다.





문화운동, 지역운동, 사회운동으로 기여한 공적이 큰 분이지만, 세상에 덜 알려진 것은 틀림없다.

부산대 명예교수 채희완씨는 장일순선생과 조성국선생께서 닮은 데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시며 당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품까지 꼭 같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꼭지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참여한 영산줄다리기를 소개하는 면이다.

그러나 오늘의 줄다리기가 있도록 만든 조성국 선생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는데다,

공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부터 늘어 놓게 된 것이다.




지난 26일부터 시작된 3,1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진즉 듣고,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찾아 간 것이다.

더구나 조성국선생님께 줄다리기를 물려받는 신수식씨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던가.

참여한 보존회 회원 대개가 고향 선후배인데다 사촌까지 있었다.





신수식,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 등 향에서 열 두 명이 올라왔는데, 두세 명 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몇 십 년을 떨어져 늙어 왔으니, 모를 만도 했다.





덕분에, 같은 서울 살지만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고향 동창까지 만난 것이다.

김상현씨와 송장식씨를 만났고,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3월1일이 되면

더 많은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해마다 3,1절에 맞추어 열리는 영산 3,1문화제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물어보았더니,

서울 광화문줄다리기가 끝나는 즉시 내려 가야한다고 했다.

정말 불알에 요령소리 나게 됐다.





가닥 줄은 영산에서 가져왔지만, 엮고 밟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옛날 생각도 났다.

줄다리기를 전수받은 신수식씨의 능란한 지휘와 통솔력은 조성국선생을 너무 닮아 있었다.

기능에 이어 선생님의 정신까지 이어 받은 게 너무 장하고 고마웠다.





첫 날은 숙소에 띠라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오랜만의 회포도 풀었다.

술 자리에는 서울 ‘에이스다원’ 대표이사인 오정혁씨와 직원 한 분이 합류하였고,

이차로 옮긴 ‘봄 여름 가을 겨울’에는 본 축전의 예술감독인 채희완씨도 오셔서 함께 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듯이 기분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1절 백주년을 맞는 오늘 다들 청계광장으로 나가자.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의 하이라이트인 줄다리기가 오후3시 부터 열린다.

광화문광장으로 줄을 옮겨 4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니, 다들 신명난 한 판을 벌여 보자.


"이어~차, 이어~차, 이어~차"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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