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터줏대감이신 강민 선생께서 ‘백두에 머리를 두고‘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창비'에서 냈다.

용인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28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시선집 전달을 겸한 오찬회를 갖는다는 반가운 기별이 왔다.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에 갔더니,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씨도 나와 있었다.

선생께는 송구스러웠지만, 시집 때문에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밥 값은 김명성씨가 계산했고, 시집은 정영신씨가 받았으니 부담도 없었다.

원님이 아니라, 강민 선생 시집 덕분에 나팔 좀 불었다. 낯 술엔 쥐약인 놈이지만...





1962년 등단한 강민 선생께서 팔순이 넘은 연세에 펴낸 이 시선집은 4부로 나눠 98편의 시를 싣고 있었다.

시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지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의 문단사였고 역사라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선생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사적 심성을 늘 간직하고 살아온 서정과 우국의 적절한 조화”라고 했는데,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이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마다 광화문광장에 나타나 후배들을 격려해 주며 바른 세상을 염원하였듯이

인사동 또한 선생처럼 애착을 갖고 사랑하시는 어른이 드물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시 ‘광장에서’에 적혀 있는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소재로 한 시다.





그 때 80대 중반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아서 피가 끓어 나갔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이념이 아니라 양심과 죄책감에서 우러난 시여서 그대로 가슴에 사무친다.

보수 꼴통 노인이거나,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벙어리 노인들만 판치는 세태가 아니던가?





그리고 시선집에 있는 ‘꿈앓이’는 분단시대의 아픔과 북녁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6.25전쟁과 4.19혁명, 그리고 5.16쿠테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시대를 양심으로 지켜 본 체험에서 우러난 시다.





강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여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동안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그리고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 문학상도 받았다.





등단 이듬해인 1963년 김수영, 신동문, 고은 시인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활동을 펼쳤다.

5.16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의식적인 타이틀을 내건 시인이다.

1974년 진보적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한 이래, 꾸준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강민선생을 뵙게 된 인사동과의 인연이다.

시집에 나와 있는 ‘인사동 아리랑’의 유목민 이야기는 잊혀져 가는 그리움을 호출하고 있었다.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 그의 부인 목순옥 /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 방송작가 박이엽 /

그 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 (중략) 다시 한 세월은 가고 /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선생은 천상병시인과 함께 인사동 풍류를 노래한 인사동시대의 초창기 멤버였다.

거명했던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신경림, 민영, 황명걸시인 등 생존 작가마저 몸이 불편해 못 나오지만,

강민 선생만이 지팡이를 이끌고 인사동에 나타나신다. 만날 사람은 없어도 그리움에 배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냈고, 친구들도 대부분 떠나보냈다,

선생의 시에는 자신의 늙어감에 대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가자는 시인의 순정이 아직까지 뜨겁다.


의리도 지조도 인정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이 비정한 세상에 선생 같은 분이 계시니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예술을 빙자하는 그림이던 문학이던, 사기꾼소리 듣지 않으려면 선생처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날 오찬회에서 술 한 잔 마신 김에 선생께 감히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기억을 들춰, 못 다한 이야기를 페북에 좀 올려주십시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다른 원로 시인과는 달리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페북도 하니, 후진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남겨 줄 수 있는 분이다.

내가 듣고 옮길 수도 있겠지만, 선생께서 귀가 어두운데다 나는 말이 어눌하니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에 이르기까지 겪은 애환과 아픔을 시로 노래하셨지만,

돌아 가시면 묻혀버릴 시대적 역사를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민주주의와 통일,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사적 심성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노장이시다.

이번에 발표한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강민시인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2016∼2017년 겨울, 노시인은 촛불을 들고 매주 거리에 나왔다.

함께 나온 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그동안 시인임에도
사회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한 죄책감을 조금씩 덜어냈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 (…) / 밖에서는 다시 촛불의 열기가 올랐는지 / 백기완 작시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광장에서' 부분)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잔잔한 창작 활동을 한 시단 원로 강민 시인의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가 출간됐다.





시인은 문단에 발을 들인 지 30년 만에 첫 시집을 냈고, 시력 57년 동안 단지 네 권의 시집을 펴냈을 뿐이지만 '걸어 다니는 한국문단사'라 불릴 만큼 문단의 산증인으로서 문학의 삶을 살아왔다.

그의 시집 4권 중 94편을 가려 뽑고 신작 시 4편을 더해 완성된 이 시선집에는 혼돈의 시대를 힘겹게 산 시인의 미로 같은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까지 노시인은 80여년을 살아오며 몸소 겪은 삶의 애환과 시대의 고통을 가슴에 안아 들고 자기만의 목소리로 노래했다.

늘 밑바닥을 견뎌온 그의 시에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도 생생히 눈앞에 그려볼 정도의 치열한 시대 인식과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 나더니 / 깃발, 옷가지, 손수건 따위를 흔들며 소리치는 / 신문팔이, 구두닦이, 막노동자, 노점상, 지게꾼 같은 / 누추한 몰골의 젊은이들을 뒤칸에 잔뜩 태운 소방차가 와 멎었다 / (…) // 시내 곳곳에서 함성이 일고 / 저녁 어스름이 깔린 거리에서 / 나는 비겁한 방관자였다 / (…) // 그때 학생들이 앞장선 4·19의 혁명은 / 어쩌면 이렇게 소위 양아치들, 밑바닥 민초들의 가담으로 승리했는지도 모른다'('비망록에서1' 부분)

'"이놈의 전쟁 언제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 때와 땀에 절어 새카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 (…)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 그는 가고 없었다'('경안리에서' 부분)

"전쟁 때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해 자꾸 자기네들에 협력하라고 하니 시골에 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걷다가 경안리 부근에 주막에 묵으러 들어갔는데 밤이 되니 북한 인민군이 들어오더라고. 얼굴이 빨갛고 뿔이 났다고 배웠는데 걔네가 그렇게 신사적이데. 그중 한 친구가 내 옆에 앉았는데 함흥에서 왔다며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니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오니까 남쪽으로 도망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픽 웃네. 밤새 얘기하다가 이 친구가 먼저 떠나는데 배웅하러 나갔더니 손 내밀면서 '야 우리 죽지 말자' 그러더라고."(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시인은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도 시대의 억압 속에서 운동권 젊은이의 죽음을 담은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등 은유를 담은 시 여러 편을 썼다고 설명했다.

'노을 비낀 유연한 강물에 / 네 짧았던 생애가 / 눈물로 피는 데 / (…) // 너는 사자였지 / 아니, 호랑이였지 (…) 못난 놈 / 잘난 놈 / 보다 못해 뛰쳐나온 / 한국의 호랑이였지 // 물이야 막힌들 못 흐르랴 / 잠시의 고임 뒤엔 넘쳐서 흐르지 / 영산 낙동 금강 / 한수 살수 두만 압록 / 막아도 막아도 물은 넘치고 /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부분)

통일과 민주주의,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그는 지사적(志士的) 심성을 늘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지금도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염무웅 평론가가 "80대 중반을 넘긴 강민 시인의 건강이 많은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는 까닭이다"고 적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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