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 나가는 게 습관이 되어 토요일만 되면 엉덩이가 들썩인다.

지난 토요일은 집회가 없었지만 나갈 채비를 했는데, 마침 ’눈빛출판사‘의 이규상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류가헌‘ 전시장에서 만나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다.

사실 ’류가헌‘이 옮긴지가 제법 되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더구나 나도 출품한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첫 날 일이 있어 못 들리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길눈이 어두워 물어물어 찾아 갔는데, 가보니 촛불집회 때마다 들락거린 청와대 가는 청운동이었다.

전시장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이규상, 이규철씨가 나와 계셨고, 뒤이어 석재현, 박진영, 하지권씨도 만났다.

다들 반가웠으나 황규태선생을 뵈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몇 일전까지 ‘류가헌’에서 열었던 황선생님 개인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좋은 전시를 못 본 건 내 손해인데, 스스로의 게으름을 자책해야 했다.






2관에서는 강제훈씨를 비롯한 13명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찍은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었고,

1관에서는 사진가 이규철씨가 컬렉션한 ‘我 之 我’전이 열리고 있었다.

매년 한 장씩 20년 동안 모은 작품 20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진가가 매년 사진작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진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기에 허턴 작품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잘 알려진 작품도 있었는데, 사진보는 안목이 덜한 분은 믿고 살만한 작품들이었다.

전시된 작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작가와 연결시켜 주는데, 부담 없는 가격이라 제법 팔렸다고 한다.

또한 사진집을 구입한 분께는 작품사진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고 있었다.

사진 컬렉션에 다시 한 번 관심 갖게 하는 좋은 사진나눔운동이었다.






이규상, 황규태 선생과 전시장 옆에 있는 떡 만두국 집에서 식사를 하고 ‘광화문광장’까지 걸어왔는데,

경복궁 앞길에는 유난히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았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은 여느 때와 달리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순신동상 부근에는 ‘사회를 위한 대학생공동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인사동터줏대감 강 민시인과 방동규선생이 계셨고 옆에는 미모의 소설가 김단하씨의 모습도 보였다.

술 한 잔 하자는 강 민선생의 말씀에 간재미집으로 안내했다.

방배추선생의 구수한 옛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방동규선생 사모님께서 광장에 기다린다는 전갈이 받고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사드저지 및 세월호 진상규명, 적폐청산의 날‘이란 퇴진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사진가 고 헌씨의 모습도 보였고, 무대에는 장순향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문제는 눈앞에 닥친 대선에서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는 분은 이재명, 심상정 후보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드철회는 물론 모든 진상규명과 적폐가 청산될 때까지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

토요일마다 ‘광화문광장’을 문화예술난장으로 만들어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진기지로 만들자.


사진, 글 / 조문호












































 

심신이 지쳤나보다.

이틀 동안 쪽방에 들어 누워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토요일 햇불 집회 생각으로, 더 이상 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다.

광화문에 가야하지만, 한 두시간 더 쉬고 싶었으나,

서울역에서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그만 일어나야 했다.



 




빈속이라 뭘 좀 먹어야 했으나, 밥 때를 놓쳐버려 그냥 나갔다.

서울역으로 갔더니, ‘박대통령을 모함하는 검찰을 구속하라

현수막을 펼쳐잡은 노인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요즘 토요일만 되면 광화문 집회에 맛 불 놓느라, 노인들이 종종 난리를 피운다.

이전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치부하며, 엄청 멸시했.


  

 




그런데, 그 날은 잘 아는 이웃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돈이 탐나 일당 받으러 나왔을까?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할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일 뿐이지, 개짓하는 지식인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고도 나쁜 짓 하는 인간들보다, 잘 몰라 그러니 용서라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여지 것 권력가진 인간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이 바로 돈 없고 못 배운 서민들이었다.







우리민족은 유달리 긴 세월동안 권력자들에게 짓밟혀 온 서러운 민족이다.

그러나 이젠 그 틀을 깨야한다. 아니, 얼마나 앞 당기냐의 문제지, 깨어 질 수밖에 없다.

예전처럼 무지한 국민보다 깨어 있는 국민들이 더 많으니,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더구나 SNS의 위력은 나쁜 짓하는 놈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구조다.


그날도 서울역에서 카메라 들고 설치던 MBC같은 사이비 언론도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소수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명분이야 그럴싸하지만, 그 속내는 뻔하다.







더 이상 이웃과 얼굴 부딪히기 싫어, 얼른 지하도로 내려갔다.

종각역에서 내려 광화문 방향으로 갔는데, 오후 3시쯤인데도 사람들이 몰려와 도로가 혼잡했다.

예술인 캠핑촌에서 아는 분들을 만나려 했으나, 사람에 막혀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어쩌다, 판화가 류연복씨와 김사빈씨를 간신히 만났을 뿐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앞 장선 행렬에는 백기완선생과 이재명, 장경호, 하태웅씨의 모습도 보였으나, 사람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 가 양쪽을 경찰차로 방벽치고 인도는 경찰이 점거하고 있었으니, 4차선 도로가 북새통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시달리고 나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이 정상이 아닌데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으니, 그런 것 같았다.



 


간신히 경복궁 지하역으로 빠져 내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메우고 방으로 올라오니, 4층에 사는 정씨가 말을 건다.

오늘은 데모하는 날인데, 왜 벌써 와요?”

차마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 늙은이는 빠졌다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보수성향의 정씨가 반색을 한다. “그래요. 앞으론 그런데 가지마세요

 

말할 기력도 없었으나, 한 마디 했다.

가고 싶어 가나요. 세상 좀 바꾸어야지요.

우리야 어차피 그렇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잘 살게 해야 지요

 

사진 /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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