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ers

김소정展 / KIMSOJEONG / 金昭廷 / painting

2023_0615 2023_0715 / ,,공휴일 휴관

김소정_IYKYK_한지에 먹, 3단화_75×146.5cm_2023

                                                           

                                                                                                                                       2023 OCI YOUNG CREATIVES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김소정은 사물의 온전한 형태만을 그릴 뿐, 그것의 본질은 설명하지 않는다. 집결한 군중을 그리지만 표정은 그리지 않고, 그들이 쥐고 있는 깃발과 현수막은 그리되 외침과 주장은 비운다. 그의 헌신적인 먹 선은 구체적인 현실로 향하지 않는다. ● 아무도 기억에 남기지 않을 것들,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일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되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목도한 것들이 어딘가 어긋나 보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기에 그저 형태를 분해하고 다시 배치하고 가려보며 이 흥미로운 불편함을 작품이라는 창을 통해 내보일 뿐이다. ● 강한 전달은 이해와 해석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때로는 은유적인 것이 더 예리하게 새겨지고 오래 기억되곤 한다. 없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무엇'이라 기록하는 행위는 이 시대에 대한 김소정의 나지막한 발언이다. ■ 이영지

 

김소정_Cien Asuntos_한지에 먹, 채색_100×410cm_2023_부분

김소정의 군상 ● 참사와 재난, 전쟁과 분쟁, 긴장과 무장, 범죄와 비리, 차별과 착취, 고독과 중독, 빈곤과 격차. 우리 삶의 망가진 곳은 늘어만 가는데, 고치는 사람보다 망가뜨리는 사람이 많다. 내버려 두면 영영 망가지기에 고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 군중을 이룬다. 마음속에 의지를 품고, 머릿속에 문제를 채우며, 귓속에 목소리를 담고, 손안에 해법을 쥔 채, 입으로 해결을 말하며, 몸으로 실천을 행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우리 사회는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발전시킨다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군중은 곧 우리 조국과 사회를 사랑하여 발전시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1894년 동학 농민과 1919년 조선 민족 그리고 1948년 제주 도민과 1980년 광주 시민은 모두 그런 군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세력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서로 다른 때와 다른 곳에 살았지만,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선은 한결같았다. 이 한결같은 시선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하며 강력하다. 강력하게 외면하고 왜곡한다. 법률로 죄를 씌우고 벌금으로 짐을 지운다. 배척하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김소정의 군상 속 인물은 얼굴을 가렸다. 자칫하면 고치기는커녕 죄와 짐만 얻은 채, 배척과 고립 속에 쉬이 놓이고 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중은 계속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김소정은 그런 군중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일은 슬픔과 노여움을 가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자, 몸과 마음이 무너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며, 망가진 곳을 고치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김소정은 바라보았기에 첫걸음을 내디뎠고, 그림으로 옮겼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계속 나아간다면 틀어진 시선을 바로 잡을 것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과 경청해야 할 소리를 짚어줄 것이다.

 

김소정_Cien Asuntos_한지에 먹, 채색_100×410cm_2023_부분

이러한 태도는 정조와 닮았다. 정조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른일 때는 아이를 잃고 연인도 잃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거나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 한 가운데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 배척과 고립 속에 살았을 것이다. 슬픔도 알고 분노도 알았을 것이며, 몸도 마음도 무너진 적 있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망가진 세상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주인인 양 행세하지만, 제 도리는 못하는 수많은 관료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나의 나라를 뜻하는 아국이 아닌 백성의 나라를 뜻하는 민국이란 말을 썼다. 나라의 주인을 고쳐 잡는 말이었다. 재위 기간 대비 가장 많은 능행을 하며 어떤 임금보다 백성을 자주 만났다. 과거와 달리 행차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했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길을 막고 호소할 수 있게 했다. 군주로서 정조는 자신과 같은 군중을 보았다. 그렇기에 망가진 곳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고칠 수 있었다. 국가가 아이를 돌보게 했고 노비와 차별을 없앴다. 상권을 독점하지 못하게 했고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게 했다. 학문만큼 무예를 중시하여 방어에 능한 성을 짓고 전투에 능한 군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많고 다양한 백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김소정_Korean Church Christmas_한지에 먹_75.5×60.6cm_2023

과거의 전승과 시대의 변주 ● 김소정은 정조 때 그림을 참고한다. 바라보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다. 이때 묘사나 장황 방법은 참고하기 쉽다.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족자, 책자, 병풍'으로 나누어 장황한 '초상, 도상, 군상'이 가지는 구성의 이점은 집중하지 않으면 참고하기 어렵다. 이 점에 집중해 보자. 정조 때 그림은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어진, 의궤, 계병'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그렸다. 어진으로 군주의 의지를 나타내고, 의궤로 행차의 방식을 전달하며, 계병으로 행사를 기념한다. 목적이 다르기에 방식도 달랐다. 덕분에 우리는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관점으로 살필 수 있다. 어진으로 중심 인물을 깊고 섬세하게 살필 수 있고, 의궤로 주변 인물과 여러 사물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살필 수 있으며, 계병으로 모든 '인물, 동물, 사물, 건물, 지형, 산세'를 다양하고 실감 나게 살필 수 있다. 하나의 주제와 그림 간 수직적 연결이 긴밀하고, 세 가지 다른 방식 간 수평적 연결도 긴밀하다. 김소정은 현재 대주제가 넓고 소주제가 약하다. 그래서 낱장과 병풍으로 나눈 그림 간 연결이 비교적 긴밀하지 않다. 어진 속 임금은 의궤와 계병에 나타나고, 의궤 속 행렬은 계병에 나타난다. 세 가지 그림은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 덕에 서로 연결된다. 이 점을 참고한다면 구성이 조화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양식의 전승뿐 아니라 구성의 이점까지 취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소정_똑바로만 앉으세요 Sit Straight Only_한지에 먹_76×60cm_2023

이어 다른 선례와 비교해 보자. 조선시대 채색 안료의 수는 26색이다. 정조 때 〈화성능행도〉는 이 중 12색을 썼다. 인물의 형태는 80종류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 7명 이상 붙어 1년 넘게 그렸기에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지만 관료만 그렇다. 백성은 겨우 넷으로 추릴 만큼 단일하다. 이응노의 군상 〈3·1 만세운동〉은 1945년의 그림인데, 150년이 지나도 백성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긴 화가는 서세옥이다. 1986년에 그린 〈3·1 만세운동〉으로 14가지 색채와 57종류의 형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상은 점차 하나의 색채로 동종의 형태를 반복해 그리는 방식으로 변한다. 일본의 침략과 미소의 냉전이 민족을 말살하고 분열시킨 때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묵색으로 엮은 수많은 인물. 이는 사라지고 갈라진 민족을 되살리고 엮어내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은 정권을 찬탈한 군인에 의해 획일성으로 바뀌었다. 이에 하성흡은 〈화성능행도〉를 참고하여 박승희 열사의 장례 행렬을 그렸다. 이는 단색으로 그린 수묵화가 아닌 여러 형태와 다색으로 그린 채색화였고, 획일화에 시달리는 군중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주는 회화적 시도였다. 이러한 선례는 후대에 좋은 참고이자 기준이다. 하지만 이르지 못하면 그에 준하는 평이 뒤따른다. 김소정은 서세옥이나 하성흡과 달리 군중에게 색을 입히지 않았다. 군상 속 인물이 얼굴을 가린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칠해야 한다. 단일성을 강조할 시대가 아니며, 선례에 비해 묘사 수준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 안료의 수는 최소 60종이다. 이러한 이점을 살려 색채를 늘려야 한다. 그러면 두 가지 변별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 구성원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지향을 가졌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군중으로 뭉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결국 뭉친다. 뭉쳐야만 풀 수 있는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 때문이다. 형태의 다양함에 색채의 다채로움을 얹힌다면 선례에 준하는 표현력을 지닐 것이고, 나아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만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전달력을 지닐 것이다. 추가로 보존력이 필요하다. 어렵게 얻은 표현력과 전달력을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장은 책이나 첩으로 장황해야 하고 병풍은 더욱 튼튼해야 한다.

 

김소정_환영한다니까요 Guys, I Do Welcome You fr_한지에 먹_75.5×60.6cm_2023

탕탕평평 평평탕탕 ● 이쪽 아니면 저쪽, 민생이 아닌 정권, 승자 독식과 패자 절멸. 우리는 탕평을 잃은 조선시대 붕당 정치가 세도 정치로 변하여 백성의 삶을 영영 망가뜨렸음을 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정당은 거대 양당으로 나뉘고 정책은 사람보다 자리를 우선하며 정권은 승자의 목에 화환을 걸고 패자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김소정의 눈은 어느 한쪽 군중만 바라보지 않는다. 둘이면 둘을 보고 셋이면 셋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나라는 김소정처럼 눈이 귀한 사람과 균형 잡힌 발언이 필요하다. 작가의 발언은 작품이다. 작품의 표현력과 전달력은 곧 발언의 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선례의 온전한 전승과 이점을 취한 시대적 변주를 바랐다. 두 가지 색채와 형태만 남은 우리에게 작가의 작품이 다시금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겨주길 기대하며. 이상으로 김소정의 군상 비평을 마친다. ■ 김준혁

matters

김소정/ KIMSOJEONG / 金昭廷 / painting

2023_0615 2023_0715 / ,,공휴일 휴관 

김소정_IYKYK_한지에 먹, 3단화_75×146.5cm_2023

김소정 홈페이지_sojeong-kim.com

 

초대일시 / 2023_0615_목요일_05:00pm_1 

작가와의 대화 / 2023_0701_토요일_03:00pm

 

2023 OCI YOUNG CREATIVES

관람시간 / 10:00am~06:00pm / ,,공휴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김소정은 사물의 온전한 형태만을 그릴 , 그것의 본질은 설명하지 않는다. 집결한 군중을 그리지만 표정은 그리지 않고, 그들이 쥐고 있는 깃발과 현수막은 그리되 외침과 주장은 비운다. 그의 헌신적인 먹 선은 구체적인 현실로 향하지 않는다. 아무도 기억에 남기지 않을 것들,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일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되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목도한 것들이 어딘가 어긋나 보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기에 그저 형태를 분해하고 다시 배치하고 가려보며 이 흥미로운 불편함을 작품이라는 창을 통해 내보일 뿐이다. 강한 전달은 이해와 해석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때로는 은유적인 것이 더 예리하게 새겨지고 오래 기억되곤 한다. 없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무엇'이라 기록하는 행위는 이 시대에 대한 김소정의 나지막한 발언이다. 이영지

 

김소정_Cien Asuntos_한지에 먹, 채색_100×410cm_2023_부분

김소정의 군상 참사와 재난, 전쟁과 분쟁, 긴장과 무장, 범죄와 비리, 차별과 착취, 고독과 중독, 빈곤과 격차. 우리 삶의 망가진 곳은 늘어만 가는데, 고치는 사람보다 망가뜨리는 사람이 많다. 내버려 두면 영영 망가지기에 고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 군중을 이룬다. 마음속에 의지를 품고, 머릿속에 문제를 채우며, 귓속에 목소리를 담고, 손안에 해법을 쥔 채, 입으로 해결을 말하며, 몸으로 실천을 행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우리 사회는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발전시킨다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군중은 곧 우리 조국과 사회를 사랑하여 발전시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1894년 동학 농민과 1919년 조선 민족 그리고 1948년 제주 도민과 1980년 광주 시민은 모두 그런 군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세력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서로 다른 때와 다른 곳에 살았지만,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선은 한결같았다. 이 한결같은 시선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하며 강력하다. 강력하게 외면하고 왜곡한다. 법률로 죄를 씌우고 벌금으로 짐을 지운다. 배척하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김소정의 군상 속 인물은 얼굴을 가렸다. 자칫하면 고치기는커녕 죄와 짐만 얻은 채, 배척과 고립 속에 쉬이 놓이고 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중은 계속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김소정은 그런 군중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일은 슬픔과 노여움을 가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자, 몸과 마음이 무너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며, 망가진 곳을 고치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김소정은 바라보았기에 첫걸음을 내디뎠고, 그림으로 옮겼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계속 나아간다면 틀어진 시선을 바로 잡을 것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과 경청해야 할 소리를 짚어줄 것이다.

 

김소정 _Cien Asuntos_ 한지에 먹 ,  채색 _100×410cm_2023_ 부분

이러한 태도는 정조와 닮았다. 정조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른일 때는 아이를 잃고 연인도 잃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거나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 한 가운데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 배척과 고립 속에 살았을 것이다. 슬픔도 알고 분노도 알았을 것이며, 몸도 마음도 무너진 적 있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망가진 세상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주인인 양 행세하지만, 제 도리는 못하는 수많은 관료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나의 나라를 뜻하는 아국이 아닌 백성의 나라를 뜻하는 민국이란 말을 썼다. 나라의 주인을 고쳐 잡는 말이었다. 재위 기간 대비 가장 많은 능행을 하며 어떤 임금보다 백성을 자주 만났다. 과거와 달리 행차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했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길을 막고 호소할 수 있게 했다. 군주로서 정조는 자신과 같은 군중을 보았다. 그렇기에 망가진 곳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고칠 수 있었다. 국가가 아이를 돌보게 했고 노비와 차별을 없앴다. 상권을 독점하지 못하게 했고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게 했다. 학문만큼 무예를 중시하여 방어에 능한 성을 짓고 전투에 능한 군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많고 다양한 백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김소정 _Korean Church Christmas_ 한지에 먹 _75.5×60.6cm_2023

과거의 전승과 시대의 변주 김소정은 정조 때 그림을 참고한다. 바라보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다. 이때 묘사나 장황 방법은 참고하기 쉽다.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족자, 책자, 병풍'으로 나누어 장황한 '초상, 도상, 군상'이 가지는 구성의 이점은 집중하지 않으면 참고하기 어렵다. 이 점에 집중해 보자. 정조 때 그림은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어진, 의궤, 계병'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그렸다. 어진으로 군주의 의지를 나타내고, 의궤로 행차의 방식을 전달하며, 계병으로 행사를 기념한다. 목적이 다르기에 방식도 달랐다. 덕분에 우리는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관점으로 살필 수 있다. 어진으로 중심 인물을 깊고 섬세하게 살필 수 있고, 의궤로 주변 인물과 여러 사물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살필 수 있으며, 계병으로 모든 '인물, 동물, 사물, 건물, 지형, 산세'를 다양하고 실감 나게 살필 수 있다. 하나의 주제와 그림 간 수직적 연결이 긴밀하고, 세 가지 다른 방식 간 수평적 연결도 긴밀하다. 김소정은 현재 대주제가 넓고 소주제가 약하다. 그래서 낱장과 병풍으로 나눈 그림 간 연결이 비교적 긴밀하지 않다. 어진 속 임금은 의궤와 계병에 나타나고, 의궤 속 행렬은 계병에 나타난다. 세 가지 그림은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 덕에 서로 연결된다. 이 점을 참고한다면 구성이 조화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양식의 전승뿐 아니라 구성의 이점까지 취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소정_똑바로만 앉으세요 Sit Straight Only_한지에 먹_76×60cm_2023

이어 다른 선례와 비교해 보자. 조선시대 채색 안료의 수는 26색이다. 정조 때 화성능행도는 이 중 12색을 썼다. 인물의 형태는 80종류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 7명 이상 붙어 1년 넘게 그렸기에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지만 관료만 그렇다. 백성은 겨우 넷으로 추릴 만큼 단일하다. 이응노의 군상 3·1 만세운동1945년의 그림인데, 150년이 지나도 백성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긴 화가는 서세옥이다. 1986년에 그린 3·1 만세운동으로 14가지 색채와 57종류의 형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상은 점차 하나의 색채로 동종의 형태를 반복해 그리는 방식으로 변한다. 일본의 침략과 미소의 냉전이 민족을 말살하고 분열시킨 때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묵색으로 엮은 수많은 인물. 이는 사라지고 갈라진 민족을 되살리고 엮어내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은 정권을 찬탈한 군인에 의해 획일성으로 바뀌었다. 이에 하성흡은 화성능행도를 참고하여 박승희 열사의 장례 행렬을 그렸다. 이는 단색으로 그린 수묵화가 아닌 여러 형태와 다색으로 그린 채색화였고, 획일화에 시달리는 군중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주는 회화적 시도였다. 이러한 선례는 후대에 좋은 참고이자 기준이다. 하지만 이르지 못하면 그에 준하는 평이 뒤따른다. 김소정은 서세옥이나 하성흡과 달리 군중에게 색을 입히지 않았다. 군상 속 인물이 얼굴을 가린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칠해야 한다. 단일성을 강조할 시대가 아니며, 선례에 비해 묘사 수준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 안료의 수는 최소 60종이다. 이러한 이점을 살려 색채를 늘려야 한다. 그러면 두 가지 변별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 구성원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지향을 가졌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군중으로 뭉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결국 뭉친다. 뭉쳐야만 풀 수 있는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 때문이다. 형태의 다양함에 색채의 다채로움을 얹힌다면 선례에 준하는 표현력을 지닐 것이고, 나아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만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전달력을 지닐 것이다. 추가로 보존력이 필요하다. 어렵게 얻은 표현력과 전달력을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장은 책이나 첩으로 장황해야 하고 병풍은 더욱 튼튼해야 한다.

 

김소정 _ 환영한다니까요  Guys, I Do Welcome You fr_ 한지에 먹 _75.5×60.6cm_2023

탕탕평평 평평탕탕 이쪽 아니면 저쪽, 민생이 아닌 정권, 승자 독식과 패자 절멸. 우리는 탕평을 잃은 조선시대 붕당 정치가 세도 정치로 변하여 백성의 삶을 영영 망가뜨렸음을 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정당은 거대 양당으로 나뉘고 정책은 사람보다 자리를 우선하며 정권은 승자의 목에 화환을 걸고 패자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김소정의 눈은 어느 한쪽 군중만 바라보지 않는다. 둘이면 둘을 보고 셋이면 셋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나라는 김소정처럼 눈이 귀한 사람과 균형 잡힌 발언이 필요하다. 작가의 발언은 작품이다. 작품의 표현력과 전달력은 곧 발언의 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선례의 온전한 전승과 이점을 취한 시대적 변주를 바랐다. 두 가지 색채와 형태만 남은 우리에게 작가의 작품이 다시금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겨주길 기대하며. 이상으로 김소정의 군상 비평을 마친다. 김준혁

 

 

 

 

[2023.5.1작성]

-이달에 볼만한 전시-

영원한 여정: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2022.5.26.-2023.10.9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관

한국실험미술 1960-1970/ 2022.5.26.-2023.7,16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에드워드 호퍼전/ 2023.4.20-2023.8.20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 2023.2.28-2023.5.28 / 리움미술관

William Klein 사진전 / 2023.5.24.-2023.9.17 / 뮤지엄 한미삼청

정경자전 / 2023.4.7.-2023.6.4 / 뮤지엄 한미삼청

이우환 설치전 / 2023.4.4-2023,5.28 / 국제갤러리

사이먼 후지와라전 / 2023,4,5-5.21 / 갤러리현대

노은님전 ’내 짐은 날개다‘/ 2023.4.28-2023.5.28 / 가나아트센터

김원방 ’잃어버린 미를 찾아서2‘ / 2023,4.14-5.14 / 토탈미술관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전 / 2023,4.14-6.25 / 일민미술관

박영하전 / 2023.5,17.-2023.6.17 / 학고재

홍재연전 ’空, 無, 造形‘ / 2023.3.24.-2023,5.7 / 겸재정선미술관

성능경 ’퍼포먼스 설치전‘ / 2023,5.5-5.28 / 자하미술관

원계홍전 / 2023,3.16-5.21 / 성곡미술관

문수만전 / 2023,5,3-2023,5,30 / 갤러리MHK

한만영전 / 2023.4.28-2023,5.26 / 아트사이드갤러리

권순영전 / 2023.4.28-2023,6.2 / The SoSo

정기호전 ’태‘/ 2023,5.11-5.30 / 호아드아트

이광택전 / 2023,5.8-5.17 / 갤러리담

한운성전 ‘Drawings on ipad’ / 2023,5.18-5.31 / 이화익갤러리

김경희사진전 ‘사람의 나무’/ 2023,5.2-5.16 / 갤러리브레송

조성현사진전‘Naked as a jaybird’/ 2023,4.14-5.6 / KP갤러리

-인사동-

이영지 한국화전 / 2023,5.12-6.8 / 선화랑

이종만전 / 2023,4.26-5.21 / 통인화랑5층

김진열 '모심'전 / 2023,5.17-5.30 / 나무아트

김재현, 김현정전 / 2023,4.28-5.21 / 갤러리그림손

김남표전 ‘UNMASK’/ 2023.5.10-2023.5.30 / 나마갤러리

조영남전 / 2023.5.17.-2023.5.22. / 인사아트프라자

윤동천전 ’추상에 관하여’ / 2023,5.3-6.16 / 갤러리밈

권옥연전 / 2023,5.17-6.12 / 갤러리바이올렛

김연식전 ‘교향곡: 인드라망’/ 2023,5.21-5.30 / 갤러리모나리자산촌

리오지전 ‘안녕, 오늘’ / 2023,5.3-5.16 / 희수갤러리

주윤정도자전 / 2023,4.19-5.14 / 한국공예디자인문예진흥원

이창성전 '나는 시민군이다' / 2023.5.17.-5.29 / 갤러리인덱스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3년 5월호]

 

 

막의 막 Facade In Facade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_0722 ▶ 2021_0814 / 일,월요일 휴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작가와의 대화 / 2021_07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건축현장을 떠올려본다. 건물의 골조, 겉면을 덮어가는 여러 자재들, 천막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어릿한 형상 등 별개로 확립된 소재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밀접히 연관된다. 각각의 역량을 올바르게 적용한, 융합의 물리적 모습이다. ● 황원해는 도심 속 건축물에서 관찰한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거대한 조합체 안에서 각각의 요소를 발견해 중첩하고, 비틀어 보고, 녹여내고, 파편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횡단하며 가려진 부피를 가늠해보고, 얕은 단면 속에서 분명한 입체감을 포착한다. ●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발견한 '막'은 그물망같이 얽히고설키며 조우하는 통섭의 기능을 가진다. 단면의 패턴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는 스크린톤으로 나타나 유영하고, 파사드를 닮은 캔버스 안에서 낯선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로서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다. ■ 이영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 황원해. 막의 막(Facade In Facade) ●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 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 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 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황원해_Sh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황원해_Slur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 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황원해_Suspen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0cm_2021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 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 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송고은

 

* 각주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

 

Vol.20210722b |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막의 막 Facade In Facade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_0722 ▶ 2021_0814 / 일,월요일 휴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작가와의 대화 / 2021_07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건축현장을 떠올려본다. 건물의 골조, 겉면을 덮어가는 여러 자재들, 천막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어릿한 형상 등 별개로 확립된 소재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밀접히 연관된다. 각각의 역량을 올바르게 적용한, 융합의 물리적 모습이다. ● 황원해는 도심 속 건축물에서 관찰한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거대한 조합체 안에서 각각의 요소를 발견해 중첩하고, 비틀어 보고, 녹여내고, 파편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횡단하며 가려진 부피를 가늠해보고, 얕은 단면 속에서 분명한 입체감을 포착한다. ●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발견한 '막'은 그물망같이 얽히고설키며 조우하는 통섭의 기능을 가진다. 단면의 패턴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는 스크린톤으로 나타나 유영하고, 파사드를 닮은 캔버스 안에서 낯선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로서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다. ■ 이영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 황원해. 막의 막(Facade In Facade) ●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 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 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 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황원해_Sh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황원해_Slur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 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황원해_Suspen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0cm_2021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 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 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송고은

 

* 각주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

 

 

Vol.20210722b |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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