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이 권력자의 눈높이에 따라 바뀌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이 판친 정치를 사기꾼도 모자라 검사까지 설쳐대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누가 집권하던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뒤집혀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격이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좋아 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인간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지난 월요일 정오 무렵,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의 인사동 오찬모임이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 둥지 튼 여자만에 구정희, 이수만, 김이만, 윤성관,

하금순, 김순남씨 등 일곱 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한 달 전, 고향친구들이 상경하여 인사동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청와대와 롯데월드를 둘러 한강유람섬까지 타는 일박이일 일정의 서울 관광을 다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모아 이수만씨가 사진집으로 엮어 왔다.

 

이수만, 신규식씨가 만들었다는 사진집에는 340여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뿐 아니라 인사동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서울 구경 온 고향친구들, 인생졸업사진 찍다는 수필까지 올려

무려 175페이지에 달하는 사진집이 된 것이다.

 

중복된 사진이 많은데다 무작위적인 편집이 눈에 거슬렸으나,

찍힌 친구들에게 사진 보내 줄 일을 들게 되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6년 전, 정동지의 장날전시 때, 장흥의 마동욱 사진가

전시 개막식사진을 찍어 사진집으로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소량으로 만들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그 때 알았는데,

왜 진즉 활용하여 정동지의 오래된 빚을 갚지 못했을까?

고향친구들 사진집을 보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래전부터 정영신의 사진집을 먼들기 위해 틈틈이 기록해 왔다.

그러나 사진의 량도 만만치 않지만, 여러가지 비용이 마음에 걸렸는데,

두 권만 만든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만들 수 있다기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사진을 년도 별로 구분하여 당시의 추억을 끌어내는 글까지 곁들인다면,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 아니겠는가?

 

정동지는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선물타령을 해대지만, 그동안 못들은 척 해왔다.

알라도 아이고 선물은 무슨 선물이고?“라며,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린 수십 년의 세월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선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만약에 초상권 침해라며 압수해 간 정동지의 알몸 사진을 표지로 감는다면, 흥행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진은 십 육년 전 장대비가 쏟아지는 만지산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이다.

 

흙탕물이 튕겨 오르는 폭우 속에 검붉은 맨드라미까지 더해,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하는 그 때 장면은 처연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이 드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정영신 개인 파일에 들어간 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설마 사진가가 자기 사진집 만든다는데도 내놓지 않을까?

 

그런데, 마동욱씨가 만들어 준 장터개막식 사진집도 줄 때만 좋았지, 두 번 다시 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마침 고향친구들의 서울관광 사진집과 비교해 보기 위해 어렵사리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이외의 감동은 없었다.

 

결국 비슷한 사진들의 나열 보다 좋은 사진을 선정하는 안목과

편집 능력에 따라 책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것이다.

 

어렵게 구입한 책도 세월에 밀려 버려지는 것이 어디 한 두 권이던가?

인쇄물 홍수시대에 자칫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특히 두고두고 보아야 할 가족 앨범이라면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자 하나 글씨 체 하나에 책의 품위와 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무조건 사진이 많다거나 책 면수가 두터워야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진을 어떻게 배열하고, 어떤 캡션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 제대로 한 번 만들어 볼 작정이다.

 

찍은 사진을 년대별로 분류하여 당시의 추억을 들추어내거나

삶의 의미까지 더해 준다면 책장에서 잠이나 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진집은 안 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만들려는 정영신 사진집도 책이 아니라 e북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책장보다 컴퓨터 앞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량과 부피가 아니고, 질이며 가치다.

 

이날 여자만에서 가진 오찬비용은 구정회씨가 부담했다.

그런데, 이미례씨가 '여자만 경영에 손을 땠을까? 음식도 달라졌고 종업원들이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밑반찬도 다시 요구할 수 없는데다, 가져 온 밥도 바짝 말라 있었다.

밥을 바꾸어 달라고 하니 손님 먹는 밥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는 무례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부터 툇마루에서 오찬모임을 갖기로 했으나,

 괜찮은 집으로 가자는 구정회씨 이야기에 여자만으로 정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주인 없이 장사 잘되는 집 없고, 불친절에 다시 가고 싶은 집 없다.

 

구정회씨는 어릴 때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향에서 떠나오며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듣기로는 긴 세월을 군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절제된 삶과 빈틈없는 생활습관에서 군인정신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고향친구도 잊고, 다들 엄청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나야 민방위 출신이라 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고 전역 계급은 뭐냐?"고 물었더니, 입 무거운 구정회씨가 말문을 열었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도 조근조근 하는 바람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두 차례에 걸쳐 군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번은 소위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이고

한번은 12.12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졸개들 총에 죽을 뻔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두환의 12,12사태에 저항한 정병주 특전사령관 참모로 일했으나,

반란군들의 쿠테다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이 상관에게 총질을 해대는 더러운 판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마는,

간신처럼 달라붙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찌 간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전두환의 쿠테타 암호명인 생일집잔치의 최대 희생양은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이었다.

그들이 받은 수모는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정병주사령관 수하 였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같은 간신배처럼 상관을 배신했더라면

그런 처참한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 아닌가?

 

하기야! 만약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게 군인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명령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은 상관이 아니라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 사나이가 갈 길이 아니겠는가?

그 때 쿠테타 군부에 고개 조아려 충성서약이라도 했다면,

처자식은 편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령으로 전역해야 할 타고 난 운명이며 팔자였다. 

장한 사람을 만들어 주었으니, 팔자가 나쁘지는 않다.

우리가 정치군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죽어서도 반역자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지만, 자네는 용기 있는 군인으로 길이 남는다.

 

여자만에서 일어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여자만맞은편에 있는 귀천에는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수만씨의 안내에 따라 찻집 인사동으로 갔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찾는 찻집이지만, 안쪽에 작은 정원이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인사동에는 자판기 커피가 없어 달콤한 팥죽을 시켰는데, 찻값은 하금순씨가 냈다.

 

그 자리에서 서울모임 회장으로 이수만씨가 추천되어,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보고 밥 먹는 모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가물가물한 어릴 때 기억의 퍼즐이라도 맞춰, 잘못 알고있는 고향의 역사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 곳에서 늙은 군인의 초상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안쪽 작은 정원으로 구정희씨를 불러내어 사진을 찍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배경이 없었다.

사진 값이라도 하라는 듯 십만원을 꺼내 주기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받아 챙겼다.

서울역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잔뜩 지푸려 있었다.

인사동 길을 걸어 나오며 자랑스러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니,

김민기가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가 떠 올랐.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진,  / 조문호

 

 

 

친구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게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어려운 일에 득달같이 나서 줄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개인주의로 치달으며 친구 만나는 기회도 점차 줄어들고,

만나게 되어도 물질문명에 찌들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는 다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곰삭은 정이 있잖은가?

신경림시인은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말했다.

 

얼마 전 서울 사는 고향 친구 수만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고향 동창들이 12일 여정으로 서울관광 오는데, 함께 할 수 있냐?' 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했다.

 

월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지만, 이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가비가 20만 원이라며, 낼 수 있?고 묻기에

문디 코구멍에 마늘 빼 먹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부자 친구도 많은데, 이럴 때 기분 좋게 안 쓰면 어디다 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돈이 아까워 어떻게 죽을까? 

 

거지는 안 받기로 했다지만, 만찬 후 이차 술값은 내가 낼 생각이었다.

마침 인사동5길에 있는 '센트마크 호텔'에 방 다섯개를 예약해 두었다기에

유목민에서 술 한잔 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누가 기획했는지 궁금했다.

종석이 더러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냐고 물었더니, 자기란다.

돈은 죽고나면 아무 쓸모 없다며 즐겁게 살자는 취지였는데.

수식이와 의논했더니, 일사천리로 추진하더라는 것이다.

 가이드는 서울 수만이가 맡아, 책임지고 일정을 짰단다.

정말 잘 한 일이라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인사동에서 시작하여 경북궁, 청와대, 광화문, 청게천,

롯데월드, 한강유람선 등 시골 노인네들 관광코스야 뻔했다.

몇 년 전 정선 귤암리 노인들 관광왔을 때 다녔으나,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다르다.

 청와대가 새로 생긴 볼거리지만, 아무래도 친구들과의 마지막 상면일 것 같았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고향을 지키는 영산 친구를 비롯하여 서울, 인천, 부산,

그리고 광양 사는 친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지난 7일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서울역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은 바빴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만 점점 늘어났다.

기다릴 특정 장소를 지정하지 않아, 이산가족 찾기보다 더 힘들었다.

열차 탈선사고로 오가는 열차가 모두 연착이라는 안내방송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으면, 전화번호 아는 고향 친구가 이수만 뿐이었다.

그는 찾아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아, 다음 집결지인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종각역에 도착할 무렵에야 대합실 2층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길이 엇갈릴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막연하게 기다리다 다시 전화 걸었더니, 시간이 늦어 오찬 장소로 바로 가야 할 것 같단다.

 

시간이 남아 인사동에서 경복궁을 둘러 삼청동으로 갔는데,

오찬 장소로 정한 ‘삼청동 수제비집 앞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 줄을 서서 수제비를 다 먹어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다면 다시 서울역으로 갔어야 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죄 없는 담배만 연신 피우고 있으니, 그때 사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탈선하여 두 시간이나 연착되었다지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 그런지 더 반가웠다.

영산초등학교 45회 동창생 중 세상을 떠난 친구도 많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온 친구도 있었다.

 

영산에서는 신수식, 조대권, 김종석, 김공조, 이석중, 신규식씨가 왔고,

정대식, 김옥선은 부산에서, 조성호는 광양에서 왔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김이만, 김순남, 하금순, 김상현, 윤성관,

이수만, 구정희 등 다들 얼마 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 사진은 5년 전 영산에 모인 동문들 기념사진이다. 그동안 이렇게 늙다니...

무정한 세월 속에 나만 늙은 게 아니라, 모두 늙어 버렸다.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이라, 코끝이 찡하며 눈물까지 어른거렸다.

죽을 때가 되어 그런지, 작은 일에도 감동하며 눈물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수제비 먹을 동안 또 다시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며 피운 담배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아침에 산 담배인데...

 

다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청와대 관광부터 나선 것이다.

신수식이 잘 아는 국립고궁박물관장의 도움으로 청와대 입장도 비교적 수월했다.

북악산 아래 똬리 턴 청와대 자태는 웅장했다.

 

청와대 중심 건물인 본관은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을 위한 공간이다.

 

그곳에는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으나, 살인마나 사기꾼도 걸려 있었다.

당선만 되면 죄를 지어도 두고두고 대통령 대우를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정한 동선 따라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넓고 웅장한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 다음은 해외 국빈을 맞거나 대규모 공식행사가 열리던 영빈관을 들렸다.

1978년에 지어진 이곳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받드는 형식의 건물이었다.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과 만찬 등을 열던 곳으로

100명 이상의 대규모 회의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다.

 

조선 왕실의 불노장생을 기원하는 불로문을 거쳐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청와대 소정원에 있는 불로문은 16세기 말 조선 숙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가족이 사는 주거공간이다.

생활 공간인 본채와 접견장인 별채, 그리고 우리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등산로의 작은 연못 앞에 조성된 화단도 아기자기했다.

 

그 다음에 들린 '인왕실'은 소규모 연회와 기자회견장으로도 사용되던 장소였고,

'충무실'은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회의를 여는 장소였다.

 

그리고 '상춘재'는 국내외 귀빈에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또는 비공식 회의를 진행하던 곳이다.

 

'춘추관'은 기자 회견과 출입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된 공간인데,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역사기록을 맡은 관아였던 춘추관에서 비롯되었다.

 

가는 길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녹지원'도 보였다.

대정원에서 국빈 행사가 많았다면, 녹지원은 주로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 곳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침류각'도 둘러 보았다.

침류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본래 경복궁 후원에 있던 북궐의 부속 건물이란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석불좌상인 미남불도 있고,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

5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 '오운정' 등, 못 들린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건물보다는 넓은 주변 경관이 더 아름다웠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아름다운 북악산 일부를 독점하고 살았다는 건 너무하다.

때 마침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두 번째 행선지인 경복궁을 가기 위해 신무문을 통과하려니, 관람이 끝날 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도착시간이 지연되어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경복궁 대신, 만찬장인 경복궁으로 이동해야 했다.

 

경복궁은 인사동 센트마크호텔입구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음식이 정갈하다.

그곳 만찬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그 비용을 서울 김상현이 계산했다.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열렸는데, 옆자리에 김공조가 앉았다.

그 많은 친구 중에 담배 피우는 친구가 공조뿐이라 조가 맞았다.

 

김공조는 영산 구계목도 보존회회장이고, 김종석은 보존회 회원인데,

며칠 뒤 창녕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41회 민속예술축제

창녕군 대표 팀으로 출전하여 경연을 벌인단다.

 

신수식이 이끌어 가는 영산줄다리기

조대권의 영산쇠머리대기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구계목도만 지정되지 않아 서러운 것 같았다.

 

구계목도’가 민속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으나

이번에 열리는 도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야 경남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단다.

12일 경연대회 마지막 순서로 출전한다기에, 행사장에 찾아가 응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몸살로 드러누워 공수표를 날리고 말았다.

뒤늦게 '구계목도'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장한 일을 해냈다.

친구야! 다 같이 축배를 들자.

 

이차를 가기 위해 유목민의 전활철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그날이 쉬는 날이란다.

만찬장까지 찾아와 술값 보태라며 20만원을 줘, 고맙기 그지없었다.

신수식의 딸 정화와 사위까지 찾아와 만찬장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일이 생겨 함께 하지 못한 남이우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몸이 많이 불었더라.

한때는 대한항공중역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정년퇴직하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다들 손자 재롱이나 즐기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아니던가?

 

이석중은 마산 초등학교 선생으로 정년퇴직 했고,

김종석은 부산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하다 정년퇴직 했으니, 연금 받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김종석의 아내가 부산에서 살아, 혼자 구계리에 돌아와 '구계목도' 전승에 힘을 보탠다고 했다.

 

친구들이 조성국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문화 전승에 애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

이것이 영산의 자부심이다. 영산 사람이라면 그 자부심 다 안다.

 

그나저나 술자리가 파하니, 이차 보다 청계천에 가잖다.

술 취한 노인들의 청계천 나들이는 볼만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물 위에 비친 불빛이 아름다워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돌다리를 건너 다니며 낄낄거리는 등 신났다.

 

다들 호텔로 돌아와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호텔에서 잘 형편이 아니었다.

카메라 충전도 해야 하고 메모리 포맷도 해야 하는데, 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김공조와 함께 자기로 했으나, 몰래 빠져나와 동자동으로 갔다.

콧구멍 만한 쪽방이지만, 내 집이 호텔보다 훨씬 편했다.

가자마자 뻗었는데, 눈떠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충전할 시간이 없어 잘 쓰지 않는 라이카를 들고 간 것이다.

 

이미 친구들은 호텔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바삐 청진동 해장국으로 갔더니, 다들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장국에다 소주 몇 잔 들어가니, 어제 기분으로 바로 돌아갔다.

 

거지가 라이카를 메고 있으니, 사진 하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 카메라는 고향 후배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라고 자랑했으나,

 컴펙트 카메라인 니콘 coolpix P310’이 훨씬 편하다.

카메라는 장식이 아니라 손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만김상현도 사진을 찍지만, 각자 가는 길은 다르다. 나는 사람을 찍고 그들은 풍경을 찍는다.

처음엔 아마추어와 어울려 풍경이나 찍는다며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인지라, 사는 동안 즐기며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좋아하는 풍경에 취해 인생을 즐기는것 처럼, 작업은 놀이가 돼야 하는 것이다.

 

2-30년 전 이수만이 정선 만지산 집에 놀러와 하룻밤 묶은 적이 있다.

구들장 바닥에 틈이 생겨 벌건 장작불이 방에서 내려 보이는

 궁상맞은 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시장철 피어나고 온 국민이 다 찍는 꽃 풍경보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옛집을 찾아 찍으면 어떻겠냐? 고 권한 적이 있었다.

문화도 양반 문화가 판친 역사라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집들이 사려져

누군가 그 기록을 좀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 뒤로 일체의 친구사진을 보지 못했으니, 지금은 어떤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인사동 툇마루에서 우연히 만난 이수만

이 친구는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직했는데, 한번은 친구 덕을 본적도 있다.

오래 전 인사동 크라운베이크리 이층에 있던 민사협사무실에 갔더니

콧수염 김영수씨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 영보가 성균관대에서 등록금 거부운동을 주도해, 잘릴 처지라는 것이다.

수만이 에게 부탁하여 등록금 갖다주고 무마되었는데, 인연이란 묘하게 연결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롯데월드타워'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갔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이 지하철로 움직이기는 좀 소란스러웠다.

동화책에 나오는 돼지 새끼 소풍처럼, 줄로 엮어 다녀야 할 판이다.

 

종각역에서 타고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는데,

늙은이 들의 무임승차라 괜히 젊은이들 눈치 보이더라.

말은 안 하지만, ’노인네들이 집에서 티브이나 보지, 왜 몰려다니냐?‘는 듯 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다는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다.

123층에 555미터의 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지만, 롯데 신회장의 고집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높은 곳에서 느끼는 아찔함과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요기야 되지만,

아직도 적자에 시달려, 마천루의 저주를 답습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사무실 공실률이 너무 높아 계열사로 채워 겨우 땜빵을 한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쳐 호텔 사업까지 힘들기 때문이다.

워낙 손해가 크다 보니, 다른 초고층 빌딩 계획이 축소되거나 변경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롯데월드타워'가 그곳에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가?

긴 세월에 걸쳐 비행항로까지 바꾸어 가며 어거지로 이루어 낸 것이다.

신격호회장 숙원사업이라 살아 있을 때 완공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회전초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돌아가는 접시가 다 돈이라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은 김이만은 청주 한 병을 시켰는데, 거기다 소주까지 시킬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청주 마시고 혼 난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청주 청자만 들어도 취한다.

기어이 술 한잔 줄여주지 못하고 혼자 다 마시게 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음 행선지인 여의도나루로 가기 위해 네 사람씩 모여 택시를 탔는데, 김이만이 핸드폰을 흘린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핸드폰에 꽂힌 카드가 열 개나 된다는데,

왜 카드를 전부 갖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돈 자랑이 아니라 카드 자랑인가?

 

다급해진 이만이가 택시에서 내리자, 구정희도 따라 내린 것이다.

이만이가 술도 취했지만, 구정희는 군장교 출신이 아니던가?

치밀하게 일을 해결하는 대는 일가견이 있다.

 

시골 노인네들의 한양 나들이에 꼬이는 일도 많았다.

어제는 열차 빵구로 두 시간이나 헤매게 만들더니,

김이만에 이어 조성호도 사고를 쳤다.

할마시 셋을 뒤에 태우고 앞자리를 차지한 성호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도 다른 좌석에서 술을 한 병쯤 마신 모양인데,

왜 금실 좋은 부부처럼 금순이를 끼고 디니던 규식을 따돌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택시 기사 더러 여의도나루가 아니라 잠실나루로 가자고 한 것이다

 

잘 못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유람선 탑승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유람선이 돌아올 때 까지 여의도 나루에서 기다려야 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할마시들 한테 뒷머리가 다 뽑혔을 텐데,

다시 고문받아야 할 운명의 장난이었다.

 

광양에서 올라 온 조성호는 오래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릴 지경까지 갔으나.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예능에 다양한 재질이 있었다.

음악에 빠진 줄 알았는데, 한국화도 그렸다더라.

아직도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인의 길이나 다름없다.

 

지팡이가 있긴 하지만, 걸어서 서울 구경하기란 만만찮을 것이다.

거기다 하금순까지 성한 몸이 아니라 화장실을 연락부절로 다녀야 했다.

세상에! 친구 볼려고 그 아픈 몸을 끌고 먼 길을 왔다니, 어찌 눈물 겹지 않겠는가?

자판기 두드리다 눈물 흘리는 것도 난생 처음이다.

 

나는 신수식, 이수만과 같은 택시를 탔는데,

수식이가 두 곳의 사정을 일일이 연락 받아, 마치 우리 택시가 작전사령부 같았다.

그러나 택시 요금 올라가는 걸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 죽겠더라.

마침, 엊저녁에 유목민’ 전활철이가 주고 간 돈 봉투가 생각나 회비를 냈더니, 난색을 표했다.

회비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마지못해 받았지만, 자기 호주머니에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돈의 가치를 떠나 가슴이 따뜻해지더라. 이게 사람 사는 정이다.

 

한강 유람선 이랜드 크루즈엔 신수식을 비롯하여 조대권, 이석중, 이수만, 신규식,

김종석, 윤성관, 김상현, 정대식 등 아홉 명만 승선하여 한강 유람을 했다.

유람선을 타려면 밤에 탔어야 서울야경이라도 즐겼을 텐데,

승무원 잔소리 들어가며 갑판에 둘러앉아 캔맥주나 마시는 억지 춘향의 뱃놀이였다.

그것도 캔맥주 하나에 오천원이고 컵 하나에 오백원 하는 바가지를 쓰가며...

 

다행히 김이만과 구정희는 핸드폰을 찾아 다음 행선지인 광화문광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택시 세 대에 나누어 타고 광화문으로 이동했는데, 이제 서서히 막 내릴 준비를 했다.

바뀐 광화문광장을 둘러보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토속촌에 마지막 식사하러 간 것이다.

 

삼계탕에다 인삼주까지 마셨는데, 잘 먹어야 하루 두 끼 먹는 놈이 세끼를 먹었으니, 배가 놀랠 지경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인생 졸업사진을 찍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날 광양 사는 조성호가 전라도 여인 예찬론을 폈는데, 김상현이도 두 며느리가 모두 전라도 여자라네.

신랑은 물론 시댁에 그렇게 잘 한다며 며느리 칭찬에 입이 말랐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함평댁 정영신 동지를 보면 알지 않겠는가?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셈표간장이라 칭찬하다 더러 혼나기도 하지만...

 

사실, 경상도 사내들은 정나미 떨어진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경상도 사내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아내에게 하는 말은 세 마디 뿐이다.

"밥 뭇나?" 먹었어요. "아는?" 잡니다. 자자! ...

웃을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처럼, 그런 사람 많았다

말이 좋아 무뚝뚝이지, 요즘 여자들 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차례대로 일어나 그동안의 소회나 좋은 말을 한마디씩 했는데,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 자리에서는 고맙다는 인사밖에 못했지만, 우짜던지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

 

시골 내려갈 친구들과 구정희만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 조성호 누님도 나왔더라.

배웅나온 고향 선배와 잘 가세요. 잘 있어요손 흔들어가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끝으로 친구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 할 것이 아니라 축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된 삶을 끝낸 영혼이 승천하는데, 울긴 왜 울어? 박수 쳐야지...

 

가끔 아는 분이 돌아가셔도 차마 축복이란 말은 꺼내지 못하지만,

지난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다시 만나지 못할 그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십여 년 전에 남자 알몸을 찍어 실물 크기로 출력하여 세우는 영정 작업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신체발언이란 택도 아닌 제목을 붙였지만, 그 사진은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영정사진으로 내 걸기로 했다.

초상집에 온 문상객도 마음껏 웃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목욕탕에 가면 당연히 옷을 벗지만, 왜 다른 곳에서 벗어면 난리를 칠까?

영혼이 가볍게 날아가려는데, 뭐가 그리 보기 싫은가?

상갓집을 잔치집으로 바꾸려는 계산도 깔렸지만, 다 생각의 차이다.

 

초상집에서 꽹과리치고 춤추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의 풍습이나 법까지 통치자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 너무 많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정남규와 이종문의 장례는 너무 늦게 알거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제 신나는 잔치를 열게 될, 내 차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정선 있을 때부터 사후에 있을 일을 정동지에게 다짐에 다짐을 해 두었다.

농주 걸러 가마솥에 고깃국 끓이고, 술 마시고 노는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사물놀이가 체질에 안 맞으면, 노래방 기계라도 갖다 놓으라고 했다.

 

이제는 정선 집이 불 타버려, 내년에 옮기게 될 아산에서 치룰 작정이다.

시신은 화장하여 그 부근에 묻으면 그만이다.

 

친구야~ 내 죽었다는 소리 듣거들랑 꼭 놀러 오너라.

축의금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화끈하게 한 턱 쏠게...

나의 십팔번 '봄날은 간다'도 라이브는 안 되지만, 동영상으로 보여 줄 작정이다.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자주 만나자.

 

사진, / 조문호

 

(이틀에 걸쳐 찍은 사진이라 너무 많네요. 필요하신 분은 살펴보세요.)

 
 

 

 

 

'연락 좀 하고 삽시다'

 

요즘 사진가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말이다.

지난 번 두 차례나 전시회를 가졌지만, 연락처를 몰라 사우들에게 알리지 못했는데,

모두들 만나기만 하면 ‘왜 연락하지 않았냐’는 추궁을 받는다.

 

사실 10여년 동안 사진계와 담을 쌓고 지냈다.

연락처를 아는 분으로는 이명동, 한정식, 육명심선생, 그리고 엄상빈, 조성제, 김상현, 이수만,

곽명우씨 등 열 손가락 안 밖이다.

사진 찍느라 장에 쫓아다니기도 바빴지만, 틈만 나면 인사동 가느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주소나 전화번호가 모두 바뀌었으니 전시안내를 받을 수도 없지만,

신문이나 잡지 한 권 사보지 않았으니 누가 어디에서 무슨 전시를 하는지 도통 모르고 지낸 것이다.

그러니 사우들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해도, 남의 전시는 가지 않으며 초대하기가 그래 생략했다.

그러나 장터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앞만 보고 달린 게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 오래된 인연들을 칼 같이 끊고 내 일에만 메 달렸으니, 이 또한 전형적인 개인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진전이나 사진 모임에 부지런히 다니며, 사진인들과 연락처 주고 받는게 일이다.
뒤늦게 사진잡지도 사보며 아는 분들의 전람회를 찾아다니는데, 모두들 죽은 사람 만난듯 반가워한다.

아! 이게 사는 재미 아닌가...

 

사진,글 / 조문호

 

 

 

 

 

 

 

 

 

 





성균관대 퇴임하고 프로세계에 진입한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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