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 지키고 있죠”


 

 

 

서울 인사동길 어귀에는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는 오래된 서점이 하나 있다. 1934년 문을 연 뒤 삼대째 고서적들을 다루고 있는 ‘통문관(通文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래된 책 향기와 함께 수만 권의 고서를 지키고 있는 이종운 관장을 만나 100년를 향한 통문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 보았다.


1934년 문 연 고서의 보물창고


매미 소리마저 사라지고 차량의 움직임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아이돌들의 음악 소리 가득한 인사동은 이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전통의 거리가 아닌 퓨전의 거리가 돼 가고 있다. 파릇한 차향보다 커피향이 번지고 거친 듯하지만 맛만큼은 최고였던 칼국수 대신 스파게티 가게가 생겨나는 그곳 인사동의 터줏대감인 ‘통문관’의 역사는 한국의 고서적과 국학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34년 당시 25세의 나이였던 고 이겸로 선생은 16세의 나이에 배가 고파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서점에 취직하게 된 지 9년여 만에 인사동의 고서점 금문당을 인수하고 상호를 금항당으로 바꿔 직접 고서점 운영과 수집에 나섰다. 이때부터 통문관의 역사가 시작됐다.

배고파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겸로 선생은 남다름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고서에 관한 그의 안목은 여느 학자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고서에 대한 정가제를 도입해 자칫 부르는 게 값일 수 있는 고서적에 정가를 매겨 통문관을 본궤도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하는 뛰어난 사업 수단도 지녔다.

그러나 무엇보다 통문관과 이겸로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수만 권에 이르는 고서의 장서량보다 통문관과 이 선생을 통한 국학의 발전과 고서와 관련한 국보와 보물급 문화유산의 발굴·보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통문관은 자연스럽게 국학자들의 사랑방이자 정보 교환의 장소가 됐다. 국어학자인 이희승 씨와 미술사학자 김원룡 씨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그리고 이곳 통문관을 통해 ‘월인석보’와 ‘월인천강지곡’ 등이 발굴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 밖에 많은 국보와 보물급 고서들이 통문관을 통해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 귀중한 자료로 남겨지게 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최근 조선 후기 시조 작가인 김천택 선생의 ‘청구영언’ 자필본이 한글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것 역시 통문관이 큰 역할을 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통문관은 출판에도 관심을 두고 1943년 처녀 출판물인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 김천택의 ‘청구영언’, ‘두시언해’ 초간본, 김민수의 ‘주해훈민정음’ 등 많은 대표 서적을 발간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가재도구 대신 ‘조선군서대계’ 80권을 지고 피란을 떠났던 이겸로 선생의 고서에 대한 애정은 광복 이후에 이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멈췄던 국학 연구에 불씨를 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통문관은 한국 고서의 보고로서 역할을 톡톡히 함은 물론 국학 연구에 속도를 더하는 원동력이 됐다.

2006년 이겸로 선생이 97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 지금의 통문관 주인은 이겸로 선생의 손자인 이종운 관장이 맡고 있다. 할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부터 통문관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는 이 관장은 할아버지가 25세에 금문당을 인수해 고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보다 4년 늦은 29세의 나이에 통문관의 주인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고서와 함께 자란 때문에 커다란 부담감 없이 미래의 통문관을 책임지는 사명을 안게 됐다. 더욱이 국문학도였던 이 관장에게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라 온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드나들던 기억과 거부감 없이 고서와 접했던 추억과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서 자부심과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났다.

“지금 이곳에는 고려 말부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의 각종 학술서 등이 가득하고 근현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주요 서적들 또한 많습니다. 예전 할아버지 때는 국학 원로들의 사랑방이자 전화가 귀한 시절 연락 창구로 활기를 띠던 통문관이 이젠 전통과 추억의 장소로만 회자되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죠. 통문관은 단순히 고서를 다루는 서점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활자로 남겨진 역사의 결집체이자 역사 해석의 올바른 해독소와 같은 곳입니다. 일반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통신 기술의 발달로 통문관 역시 점점 찾는 발길이 줄고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발자취에 대한, 기록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곳 주인인 저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서는 단순히 오래된 책으로 정의할 수 없다. 역사적 가치로서 고서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예술 등을 엿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자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고서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기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불합리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인쇄물에 대한 가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서의 가치는 요즘의 인쇄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값어치가 아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쌓임인 역사가 기록된 데 따른 값어치인 때문이다.


시간의 쌓임이 낳은 역사적 가치 봐야


“사실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희귀 서적이나 고서적들 중 몇몇 책은 거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이 되다 보니 높은 가치의 고서 한 권보다 수십 권의 책을 구매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 때문에 고서에 대한 평가나 가치 판단이 크게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처럼 고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들과 점점 설 자리조차 잃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국학을 연구하는 교수님들이나 학생들,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어 통문관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통문관은 고려시대 역어교육(譯語敎育)과 통역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관장이 맡고 있는 통문관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세대와 세대 간을 서로 통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러기에 통문관의 미래는, 아니 역사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겠다면 물려주겠지만 사실 통문관 주인의 삶은 매우 정적이고 인내와 기다림의 삶입니다. 강요하지 않겠지만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통문관이 100년이 되는 때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백년을 향한 통문관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의 일환으로 경매 등을 통해 가치 있는 고서들이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갈 데 가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고서의 매력과 고서만이 지닌 역사의 진한 향기에 취한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찾을 수 있는 고서점으로 남길 기대합니다.”


한국경제매거진 / 조범진 객원기자 cbj68@naver.com

치킨점 절반 개업 3년 내 문 닫아, 장수 가게의 남다른 경영 철학 배워야

인사동 '구하산방'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인간이 100세를 넘기기 어려운 것처럼 하나의 가게가 100년을 넘기기란 쉽지 않다. 그 안에서 한 우물 경영과 신뢰로 생명력을 이어 온 오래된 가게들이 주목받는 이유다.

한경비즈니스는 이런 노포(老鋪: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들을 취재했다. 많은 위기와 역경을 헤치고 이 땅에 반세기 넘게 살아남아 번영해 온 그들의 생존 원리와 장수 비결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100년이 넘도록 맞춤양복을 만드는 ‘종로양복점’, ‘고객 한 명에게 완벽한 단 하나의 신발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수작업을 고집하는 ‘송림수제화’, 138년 된 독일제 면도날을 쓰며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는 ‘성우이용원’, 한국의 산 역사를 증명하는 ‘통문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장수하고 있다. 저마다의 모습이나 방식은 다르지만 ‘신뢰’와 ‘믿음’을 얻기 위해 품질을 높이는 과정은 똑같이 뒤따랐다. 가장 잘하는 것 하나를 선택한 뒤 거기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열심히 헌신한 사람이 빠질 수 없다.

노포를 좀 더 살펴보자. 오래된 가게는 먹고 입는 업종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대전의 동네빵집 ‘성심당’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성심당은 연 매출 270억 원, 직원 수 280명, 대전 지역 대학생들이 꼽은 취직하고 싶은 기업 순위 3위에 오른 곳이다. 여타의 노포들과 규모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동네 빵집 성공 스토리를 만든 주인공은 2대 빵집 사장 임영진 성심당 대표다. 1956년 선친이 연 대전역 앞 찐빵집으로 시작해 58년간 대전 시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중견기업 수준으로 동네 빵집을 성장시켰다. 성심당은 2011년 세계적인 맛집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 그린’에 국내 빵집으로는 처음으로 등재,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뿌리 깊은 노포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성심당의 전통은 빵에서 나눔으로 이어진다. 빵을 통해 사랑도 실천하는 것이다. 과거 찐빵집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날 팔다 남은 찐빵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던 선친의 나눔 철학이 2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다른 빵집에서는 다음 날 팔 수도 있는 빵이지만 성심당은 팔고 남은 빵을 대전역 노숙자와 사회복지 시설에 나눠 준다. 팔고 남은 빵이 기부하기로 약속한 수량에 못 미칠 때는 급히 만들거나 떡을 사서 보내기도 한다. 매년 수억 원을 기부하고 아프리카에도 사랑을 보낸다. “빵으로 세상을 즐겁게 하려고 해야지 손님에게 빼앗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성심당의 (빵을 만드는) 레시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심당의 마음을 갖고 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 임 대표의 경영 철칙이다.

다양한 제품을 연구하고 도전한 결과 성심당은 그 어느 곳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외식 사업에도 진출했다. 플라잉팬·테라스키친·우동야·삐아또·오븐스토리 등의 브랜드를 운영 중이다.

해외로 무대를 넓혀 나간 장수 가게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호텔을 제외하곤 가장 비싼 냉면을 만든다는 65년 전통을 지닌 ‘우래옥’이다. 3대에 걸쳐 평양냉면을 고수하는 우래옥은 한국 고유의 음식을 세계에 알린다는 일념으로 일찍이 인도네시아와 미국에 진출했다. 우리 맛의 세계화를 이끄는 오래된 가게가 된 셈이다. 이곳의 성공 비결은 바로 ‘최상의 재료’를 쓰는 것. ‘변하더라도 핵심만은 지킨다’는 진화 경영의 철학이다.

‘문화 경영’을 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 인사동에서도 가장 오래된 가게, 문방사우를 비롯한 서화 재료를 파는 ‘구하산방’이다. 1913년 문을 연 이곳은 작가마다 지닌 독특한 화풍을 파악해 붓을 만들 정도로 한국화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내로라하는 한국화 대가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한다. ‘구하산방’은 어려운 시절 붓 살 돈이 없는 젊은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며 ‘문화 상인이라는 자부심과 보람에 산다’는 철학으로 가게를 유지해 왔다.

오래됐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비록 존재하지만 쇠락을 이겨 내지 못해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곳도 한둘이 아니다. ‘삼일로 창고극장’이 대표적이다. 1975년 가정집을 고쳐 극장으로 만들었던 게 시작이었다. 실험 연출가 방태수 씨가 ‘에저또 창고극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극장이다. 정신과 의사 유석진 씨, 배우 추송웅 씨 등 극장을 이어 가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경영난에 부닥쳐 김치공장이나 인쇄공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한 기업의 후원으로 2011년 서울 명동성당 뒤쪽에 삼일로 창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 서점인 ‘대오서점’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곳은 1950년 6·25전쟁 때 참전했다가 다쳐 돌아온 조대식 씨가 호구지책으로 열었던 헌책방이다. ‘ㅁ’자 한옥의 앞부분을 터서 서점으로 만들고 뒤쪽 방에는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책을 구해 오고 부인 권오남 씨는 책을 팔았다. 책이 귀해 물려 보고 나눠 보던 시절이 대오서점의 전성기였다.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 놓고 몰래 책을 훔쳐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옛날 참고서나 흔한 소설책을 그대로 안은 채 대오서점은 훌쩍 반백 년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고민 끝에 다섯째 딸 조정원 씨가 가게를 이어 받아 2013년 12월부터 대오북카페로 고쳐 운영하고 있다. 서점을 오래 이어 갈 방법이었다. 지금 대오서점은 서촌의 명소가 돼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 발 앞선 서비스…기본 중시
이들 오래된 가게는 시대가 나를 필요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받아들이되 전통을 지켜 나가는 고집, 한 발 앞선 서비스, 최고의 상품과 최고의 서비스,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그러나 끝까지 전진하는 자세, 한 가지 일에 끝까지 파고드는 정신이 있다. 그리고 기업이나 학벌의 좋은 배경이나 보수, 그럴 듯한 위치를 중시하지 않는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해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이겨 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이들 노포의 경영 철학 가운데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은 ‘기본’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기본자세를 갖추지 못한 이들은 아무리 전문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장인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바닥부터 일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노포의 경영 철학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가게와 기업이 명멸하는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경영 모델의 교훈을 주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혹은 기업이 오래가기를 원하지만 많은 곳들이 몇 해 안에 망한다. 한국의 치킨 가게 중 절반은 개업 3년 안에 문을 닫고 80%는 10년 안에 문을 닫는다는 통계도 있다.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국 기업의 평균수명은 2.5년이라는 보고서도 있다.

이들의 경영 철학이나 방식이 특이하게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쉽고 잊기 쉬운 가장 기초적인 것을 그들은 잘 살려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한 비결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별하지 않다는 그들의 말 속에 특별함이 있다.


한국경제메거진 /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인사동에서 아주 오래된 서울을 찾아냈다. 3대를 이어 내려오는 고서점과 고종황제가 이용하던 지필묵방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주말이면 인사동은 수많은 인파로 붐빈다. 안국역에서 탑골공원 사이 골목길은 엄마 손을 잡은 아이며 느리게 걷는 연인들,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로 꽉 차서 그 사이로 비집고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 우리가 일본에 가서 아사쿠사 거리를 걸을 때나 상하이의 위위안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 기대하는 것을 그들도 인사동에서 찾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서울, 전통적인 면모를 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큰 길만 따라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모습에 금방 실망하고 만다. 스타벅스 하나뿐이었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어느새 큰길가를 차지해 다방을 밀어냈고 대기업의 화장품 가게가 화랑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처음 방문했던 인사동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과거를 더듬다보니 태초의 인사동마저 그리워졌다. 종로구청에 의하면 예전의 인사동길은 종로에서 인사동네거리까지였다고 한다. 이 길은 태화관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길이 지나는 곳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이 있던 데서 유래한다. 옛 인사동길을 가로지르며 수직으로 놓인 지금의 인사동길은 원래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관훈동, 인사동, 광통교를 통과해 흐르는 물길을 따라 생긴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댓절골, 향우물골, 이문동, 원골 등 고관대작이 사는 마을이 있었으며 댓절골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원각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들은 1915년 일제에 의해 인사동이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정리된다.

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지만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가 된 직접적인 연유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떠나는 길에 수집했던 골동품과 고서화를 인사동에 내다 팔면서 처음 골동품 거리가 형성된 것이 발단. 1970년대 중반 가짜 고서화 사건과 정부의 중과세 조치 등으로 200여 개의 골동품 상점이 청계천, 장안동 등지로 떠났고 빈자리에 화랑과 도자기 상점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전개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업 화랑인 현대화랑을 시작으로 여러 화랑들이 골동품 상점의 빈자리를 채웠으며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전통 차문화 붐이 일면서 다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자기 상점도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굵직한 화랑들은 한강을 넘어 청담동과 신사동으로 이사 가고 골동품 상점, 고미술점, 고가구점, 화방, 민속공예품 판매점 등이 뒤엉켜 서울에서 전통문화예술의 색이 가장 짙은 지역이 된다. 화랑과 화방 근처에 모여든 예술인들은 골목마다 찾아들어 술잔을 채우고 시를 읊었다.

어느덧 남대문표 기념품과 국적불명의 먹거리에 잠식당한 인사동을 지키려는 노력은 내부에서부터 일고 있다. 20~40년 동안 고미술점을 운영하며 인사동을 지키던 상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인사동10길, 수도약국에서 라이온스 빌딩까지 전통 골동품상과 화랑이 밀집된 거리를 인사동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표본 골목으로 선정했다는 소식. 그들은 여기에 녹색 공간을 조성하고 이야기가 있는 길로 꾸며가고 있다. "아이고. 인사동은 너무 많이 변해서" 하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다시 인사동을 찾는 이유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포들이 있기 때문이다. 1913년부터 지필묵을 팔아온 101년 된 가게와 장인이 손으로 두드려 만든 방짜유기를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노포를 찾아 오래된 서울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었다. 길이 좁아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히는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인사동의 옛 얼굴들이 그 자리에 있어만 준다면.


 

 

 

 

 

레아

10년 동안 인사동길을 굽어본 터줏대감 레아. 처음 문 열었을 때만 해도 표구상과 화랑이 즐비한 이 일대의 유일한 모던 카페였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던 시절, 고서점 건물 2층 창고를 카페로 개조해 인사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문인과 작가 손님들의 아지트로 자리매김 했다. 레아만의 독특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몇 점의 그림들과 아기자기한 장신구들은 아티스트 손님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벽장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은 모두 손때가 올라 반들반들한 고서적들. 절판되거나 판형이 바뀌어 품귀 현상을 빚은 도서들이 태연자약하게 꽂혀 있다. 이 집에서만큼은 전통차와 한과가 아닌, 레아 블렌드 커피와 피칸 파이를 즐기면 좋겠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55-12 TEL 02-735-9407


 

 

 

 

 

 

납청놋전

예로부터 남한에는 안성유기, 북한에는 방짜유기가 유명하다.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읍은 방짜유기의 원산지로 납청놋전도 여기서 이름을 빌려왔다.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놋빛의 방짜유기는 구리 78퍼센트, 주석 22퍼센트의 황금비율로 만들어지는 것이 특징. 방짜라는 말은 '맘미다', '후려치다'라는 뜻으로 유기를 만드는 기술 중 하나인데 합금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 문헌까지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곳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와 전수자인 큰아들 이형근이 만든 방짜유기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유기는 전통적으로 사계절 사용하는 수저로, 겨울에 사용하는 식기로 반가의 식탁에 올랐다. 납청놋전에서는 방짜 기법으로 만든 전통 제기부터 5첩 반상기, 악기, 수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혼수로 가져가 대대로 물려가며 쓰는 귀한 그릇이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TEL 02-736-5492

 

 

 

 

 

빈 컬렉션

'빈'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아내를 뜻하던 세자빈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세자빈이 환생한다면 이번 생에 사용했을 법한 고운 조각 이불보와 무릎이불 등이 빈 컬렉션의 대표작이다.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어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한 제품들은 디자이너 강금성의 손에서 탄생했다.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에서 자란 강금성은 친가와 외가의 할머니로부터 명문가 여인들에게 전해지던 삶의 지혜와 예술 안목을 배운 연유로 2002년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다.

전통 공예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만든 잣 방석과 팔각 쿠션 등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하다. 목베개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옛 어른들의 지혜를 빌렸다. 불면증에 효과가 있는 녹나무, 열을 식혀주고 머리를 차게 하는 메밀, 통풍에 좋고 지압 효과가 있는 누에고치 중 선택할 수 있다. 시집가는 누이에게 들려 보내면 좋겠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39 TEL 02-735-5760

 

 

차가방

'장황'은 일본에서 유입된 '표구'의 우리식 표현으로, 서화를 장정, 염색, 테두리하는 일련의 작업을 말한다. '장황문화재연구소 차가방'은 30년 동안 풀솔 하나로 자리를 버텨온 업계의 명가다. 생존을 위해 기념품 좌판을 벌이는 화랑과 액자집이 넘쳐나는 때, 장황 외길을 걸어온 정찬정 대표의 뚝심은 차가방의 존재를 더 빛나게한다. 그의 손길은 곧 인공호흡이다. 소위 '대가'들의 작품부터 나라의 귀중한 유물들까지, 지난한 배접과 복원 작업을 통해 되살아난 종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올 초부터 이곳엔 심상찮은 청년이 들어와 손을 돕고 있다. 인사동 바닥의 최연소 도제 김남혁은 스포츠, 미술,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다 차가방에 정착했다. 스냅 백, 피어싱에 팔찌까지 야무지게 장착했지만, '문화재 복원사'를 꿈꾸는 눈빛만은 제법 진지하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37 TEL 02-732-7240

 

 

 

 

 

 

용정

인사동길의 허리께를 걷다 보면 1920년대 경성에 있었을 법한 고풍스러운 시계점을 만날 수 있다. 앤티크한 이름에 걸맞게 반백년에 달하는 역사를 간직한 용정이다. 짙은 올리브색 패널 위에 한자를 달아 올린 간판, 쇼윈도 너머 빛바랜 고시계들은 마치 절간에 들어앉은 불상처럼 그 기품이 은은하다. 15분마다 흐르는 신비로운 음악은 바로 시계 종소리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선지 마음이 경건해진다. 1965년 개업 당시만 해도 인사동의 여느 가게처럼 다양한 골동품을 취급했던 이곳은 2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김문정 대표가 시계만을 다루는 데 집중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뤘다.

앤티크 롤렉스 회중시계, 이탈리아산 수동 탁상시계, '파텍필립'이 되기 이전의 1900년대 파텍 손목시계, 1천만원을 호가하는 1950년대 콘스탄틴, 사냥할 때 본체를 보호하기 위해 케이스를 닫아도 시침을 확인할 수 있는 엘진의 클래식 헌터까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컬렉션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면 시계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시간이 어찌 흐르는 줄 모른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 TEL 02-735-2700

 

 

구하산방

1913년 명동 진고개에서 처음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붓과 먹을 판 지 101년이 된다. 3대째 집안 사람들 손에 물려 내려와 지금은 홍수희 대표가 인사동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를 지키고 있다. 벽에 걸린 편액의 유려한 글씨는 고순어용高純御用. 전서체의 대가였던 정향 조병호 선생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여기서 문방사우를 이용했다'는 뜻을 새겨 선물한 것이다. 이 101년 된 가게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품질의 붓, 먹, 벼루, 화선지, 전각 등 화구 1000여 가지를 갖춘 서화 재료 전문점이며 그간 조병호 선생의 스승이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오세창 선생에서 이응노, 김기창, 박노수 화백까지 수없이 많은 서화가들이 거쳐간 사랑방이었다. 특히 붓의 명가로 이름이 높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79-2 TEL 02-732-9895


 

 

 

 

 

 

경인미술관 전통 다원

번잡한 인사동길을 뒤로하고 가로 난 골목에 접어들면 딴 세상처럼 한적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경인미술관 전통 다원의 고요와 정취는 도심의 것이기에 더 진귀하다. 1983년 개관한 경인미술관은 고택과 현대식 가옥을 한데 어우른 독특한 공간이다. 한옥 별채는 다원으로, 양옥 두 동은 5개로 구획해 전시실과 아틀리에로 쓴다.

2011년 <미슐랭 가이드> 한국 편에 등재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명소가 됐지만, 러시아워를 피해 시간을 맞춰 가면 그 옛날의 운치가 여전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처마 끝 풍경을 건드리고 싸리비질 소리가 드문드문 리듬을 만드는 가을날 아침. 툇마루에 앉아 대추차 한 모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30-1 TEL 02-733-4448


 

 

 

 

 

통문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통문관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100년이 훌쩍 넘는 책들과 조선시대 목판인쇄본 책들 사이에서 근대 한글 소설은 어린 축에 속한다. 1934년에 이겸로가 개점한 금항당이 통문관의 전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통문관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아들의 손으로, 다시 손자의 손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 미술사학자 김원룡 박사,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등이 자주 출입했으며 셀 수 없이 귀한 장서들이 통문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 한국어학자가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진 <월인석보>,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김천택의 친필인 <청구영언> 등도 이곳에서 발견된 보물이다. 해방 후에는 출판에도 관심을 가져 <청구영언>, <금오신화>, <주해훈민정음> 등 통문관 이름으로 출판한 서적이 100여 종에 달한다.
LOCATION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47 TEL 02-734-4092

[출처 / 더 트래블러 | 에디터 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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