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가슴 터질듯한 첫사랑의 감정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손에 잡힐듯 생생하니,

사랑의 바이러스가 어지간히도 진하고 강한 것인가 보다.
주체할 수 없었던 아득한 옛 사랑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린다.




그 아름다운 사랑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가'가 잘 말해준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노래 불렀겠는가?
고려장해야 할 나이의 사랑타령이 좀 껄쩍지근하지만, 좋은 건 좋은 것이다.
비단 연인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혈육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난 설날 연휴에 쪽방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저장된 사진을 옮겨 담느라 정신없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와! 하랑이 왔어”
아무리 다급한 일이지만, 모든 걸 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간 것이다.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아들 햇님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와 있었다.
콧구멍한 집구석에 이토록 정이 철철 넘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몇일 전 돌잔치에서 본 하랑이와는 완전 달랐다.
무표정하게 폼만 잡은 그 때와는 달리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며 신났다.




어른들이야 좁은 집이 불편하겠지만, 하랑이는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달라진 환경에 흥미를 느꼈는지, 책을 꺼내기도 하고 설합장을 열어보기도 하고,
문짝에 붙어 있는 장터할머니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웃기도 했다.
심지어 제 모습을 찍는 카메라를 돌려보며 깔깔거렸다.
호기심 가득 찬 하랑이는 모든 게 신기하고 즐거울 뿐이었다.


 

나 역시 처다보기만 해도, 그 행복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혈육의 정을 이렇게 뜨겁게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햇님이 어릴 때 느꼈던 40 여 년 전으로 거슬렀다.




꼭 껴안고 싶어도, 행여 다찰까 손도 댈 수 없었다.
하랑이가 집에 머문 두 시간 동안은 행복감에 부풀어 잠시도 눈을 땔 수 없었다.
쉬지 않고 사방을 기어 다니며 세상의 재롱은 다 떨었다.

음식도 잘 먹고, 보채지도 않았다.



하랑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 화인더로 지켜보았는데,
어른 같았으면 몸살 날 정도로 바삐 움직이며 표정도 변화무쌍했다.

붙잡고 일어서기도 하고, 말도 한마디씩 하며 숟가락 질도 곧잘 했다.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행복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늘보다 더 높은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체감한 것이다.

아름다운 환경에 취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과는 수준이 달랐다.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던 연인의 사랑과도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하랑아! 할애비를 행복하게 해 주어 고맙구나.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하랑아! 고맙다.
너를 만나는 순간 꿈은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사 같이 잠든 너의 모습을 보니, 온 마음에 평화가 가득했고.
빤작이는 눈동자에서 새로운 희망이 솟구쳤으며,
환하게 웃는 해맑은 표정에서는 세상 시름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구나.






이 할아비는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본 벙어리란다.
사랑이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입에 뱉어서는 안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칠십이 넘도록 고치지 못한 바보다.






너를 만나는 순간, 안아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기어이 아무 말도 못한 채, 카메라 화인더 속에 숨어 너를 훔쳐보기만 했구나.
긴 세월 살아온 네 할미는 물론, 네 아비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지만,
너를 낳느라 고생한 네 어미에게도 등 다독이는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구나.






살다보니 이심전심이 되었지만, 왜 그리 애정 표현에 인색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네 아비를 키우며 착하게만 자라 달라고 빌었던 것이 때로는 후회스럽기도 했다.
착한 사람이 못 사는 세상이지만, 너에게도 영악하게 살아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구나.






네 아비와 어미도 좋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나섰지만,
나 역시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작정이다.
그리고 하랑(嘏烺)이란 이름이 ‘크고 장대한 빛이 환하다’란 뜻을 가졌지만,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상에 너의 이름이 불러졌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하랑아! 부디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다오.

-바보 할아비가 보냄-






지난 주말 사진후배 성유나씨가 손녀 하랑이 보러가자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하랑이가 태어 난지 오래지만, 참고 참아 백일이 될 때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를 데리고 치루는 백일잔치를 탐탁찮게 생각해 왔는데,
다행히도 백일잔치는 생략한다기에 먼저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백일이 되는 날은 비좁은 집에 늙은이 까지 끼어들어 번잡스럽게 만들기도 싫지만,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다.




 


정오 무렵 들려 함께 식사하기로 했으나, 아침부터 마음이 들떴다.
손녀에게 줄 선물이 걱정 되어 잠을 설쳤는데, 정영신씨가 준비해 두었다기에 한시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후로 신혼 방은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걱정 되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다.

애비가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하니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 



 



염체불구하고 찾아갔으나, 짐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어수선했다.
손녀 하랑이는 천사처럼 새근대며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더구나..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아! 이래서 손주바보가 되는갑더라.
친구들이 손주재롱에 빠져 외출도 삼가며 히히덕거릴 때는 손가락질하였지만,
이제사 이해가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하랑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들 햇님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구나.
잠에서 깨었을 때만 한 번 울었지, 시종일관 생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 순하고 착했다.
카메라를 치켜든 요상하게 생긴 늙은이가 이상한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뜬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남은 생은 몰래 숨어 다니며 하랑이만 찍어대는 파파라치가 되고 싶어졌다.






이제 담배 값을 줄여서라도 하랑이 선물 사줄 돈을 꼬불쳐 두기로 작심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하랑이의 행복만을 빌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성유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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