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새벽 일찍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봄 눈이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라 파종한 씨앗이 얼어 죽었을 것 같아 다시 씨를 뿌리러 갔다.





오전 아홉시 무렵 도착하니, 지난 동강할미꽃 축제 때는 봉우리만 맺었던 목련이 활짝 반겼다.





얼어 죽었을 거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잡초에 뒤섞여 싹이 돋아나고 있었느데, 강인한 생명력이 놀라웠다.

기특하기 짝이 없으나, 왕복 일곱 시간의 고생이야 차지하고라도 길에 뿌린 기름 값 오만원이 아까웠다.

어차피 보름 후에 야채 심으러 다시 와야 하는데, 그 돈이면 일주일 지낼 생활비가 아니던가.






온 김에 일이라도 넉넉하게 해 두려, 호박 심을 구덩이를 여러 군데 파서는 변소 똥을 옮겨 묻었다.

그리고는 올 여름 지낼 솔밭 쉼터도 둘러보았다.





요즘 호흡 장애로 숨쉬기가 힘들어져, 여름철 쪽방 생활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피난 가려는 정선집도 동자동에 비한다면 신선놀음이지만, 한 더위에는 스래트 지붕으로 내려 앉는 열기가 장난 아니다.





그래서 오래전 부터 집에서 백 미터 쯤 떨어진 솔밭 숲속에 쉼터를 만들어 둔 것이다.





산길을 오르다보니,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그냥 두지 않았다.



몇년 전 요염한 자태를 뽐내던 복사나무


돌계단은 허물어지고, 멋지게 가랑이를 쩍 벌린 복사나무는 둥지가 부러져 있었다. 





산으로 기어오르던 전선은 숨 줄을 끊지 못해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는 나무의자는 썩어 무너져 내렸다. 남아 있는 것은 방향을 표시한 돌덩이 뿐이었다.






10년 전에 심은 은행나무는 한 그루만 살아남아, 짝이 없어 은행도 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옻나무에는 시커먼 칡 넝쿨이 뱀처럼 똬리틀고 있었다.

볼 때마다 질리게 하는 옻나무라 이웃집에서 베어가겠다지만, 그냥 두라했다.

오래 살다 보면 옻도 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숲속 놀이터도 그냥 둘리 없었다.
탁자는 날아가 낙엽에 파묻혔고, 평상 위의 소반은 주저앉아 자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독한 비닐뿐이었다.





다행스럽게 평상 밑에 넣어 둔 스치로폼 박스는 그대로 있었다.

전기 콘센터와 여러 집기들이 숨을 죽인채 숨어있었다.  

 




평상을 감싼 비닐장판이 그나마 평상을 거두었고, 비닐텐트도 간신히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프를 열어보니, 청소만 하면 당분간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쪽방 촌에가며 버려 둔 낙원은 전쟁터 처럼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그냥 두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그동안 수시로 정선을 들락거렸지만, 일하느라 쉴 틈도 없이 돌아 왔으니,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애인 생기면 마누라 거들떠보지 않는 잡놈 근성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에 빠지면 한 곳에 미쳐버리는 더러운 고질병을 어쩌겠는가?

내가 지은 업으로 받아들여야지... 


 



사람도 나무처럼 썩어 문드러진다는 생각에 이르니, 무릎 꿇은 소반이 내 자화상 같았다.

그래,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추억이나 남기자.

야채 심으러 올 때는, 날자를 넉넉하게 잡아 놀이터까지 손 볼 작정이다.






육년 전 정영신씨와 함께 소나무 숲에서 놀던 그때가 그립다.
올 여름에도 아름다운 추억 한 자락 만들어야지....



사진, 글 / 조문호















[이 로고는 창원의 그라픽 디자이너 김의권씨가 제작하였습니다]

 

“사진굿당이 무당들 굿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굿이란 신명나는 구경거리를 의미합니다, 영문으로 Good이란 뜻도 되지요.” 가끔 듣는 질문으로 그냥 '사진과 함께 신명난 굿판 벌이는 집' 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개인 작업실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4년,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산 자락에 ‘한국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주 환경 친화적인 사진굿판을 벌여 보자며...

 

 

내가 이곳에 들어 온 지는 이름조차 낯설던 동강이 댐 문제로 시끌벅적, 세간의 관심을 끌던 1997년도였습니다. 내가 팀장으로 있던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원들의 생태환경기록 캠프로 자리 잡았으나, 그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발목 잡힌 게지요.

 

1999년 12월 “아우라지 물길 따라 200리, 동강”이란 사진집 출판을 끝으로 팀은 철수했으나 동강 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해 혼자 눌러 앉은 것입니다. 2000년 9월 23일 옛 귤암분교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개최하며 ‘동강 백성들’ 포토에세이집도 함께 출판했습니다. 인사동 예술인 100여명이 버스 3대로 나누어 행사장에 오셨는데, 동강 각 마을의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귤암리 도로가 막히는 일대 소동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일행의 ”동강 넋 건지기“퍼포먼스와 민영선생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 낭송회, 이원창 당시 군수의 격려사, 주민들의 노래자랑 등 밤늦도록 신명난 굿판을 벌였습니다. 숙소가 모자라 폐교 교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별탈없이 행사를 잘 치룰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동강주민들과 인사동 사람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아라아트‘ 김명성씨의 후원에 대한 고마움은 아직 잊지 못합니다.

 

동강변 주민들을 위로하는 축제도 좋지만, 분쟁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동강수몰지역대책위원장이었던 이영석씨의 아내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고, 수동마을의 김진수씨도 빚 때문에 강물에 투신했습니다. 노한 주민들이 무작정 상경하여 추운 겨울 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연로한 노인들이라 걱정스러웠습니다. 밤늦게는 저희가 사용했던 충무로의 사진강의실에 어르신들을 모셔 추위를 피하게 하고, 죽어가는 주민들을 담은 전단을 인쇄해 명동에서 뿌리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각 언론사에는 보도자료를, 김대중대통령에게는 탄원서를 발송했습니다. 이튿날 문화일보 사회면 전면에 실상이 보도 되었고, 오후 늦게 청와대에서 대책위원장을 호출하는 연락이 닿으므로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걸고 부터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보상금에 의해 급변하는 농촌 환경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진으로 강원도의 강원다큐멘터리 지원금을 받았고,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는 구름 속에 가려지는 산 풍경(산을 지우다)도 찍었습니다. 인본주의를 사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왔으나 "팔리지 않는 사람 사진만 찍지 말고, 팔릴 수 있는 풍경사진으로 전시 한 번 하자"는 ‘통인옥션’ 김완규씨 제안에 따른 것인데,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몇 점은 팔았습니다.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사동과 귤암리를 한 달에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사진굿당”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했습니다.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두 차례 가졌고, 산에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팀을 초청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기도 했지요, 그리고 재미있게 놀 줄 모르는 현대인들을 위한 ‘놀자 학교’를 만들어 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젊은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처세에 의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이후 아내의 ‘장터’프로젝터에 합류함에 따라 ‘사진굿당’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사진굿당'에 들리지만 관리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전국장터 촬영이 마무리되는 내년 쯤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병방산에서 내려다보는 열두절여울의 풍경으로, 뽀죡한 만지산 수리봉 자락에 '사진굿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강길 따라 '사진굿당'으로 가다보면 수리봉이 물에 반영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귤암리 다리 위에서 본 '사진굿당'으로 가는  풍경입니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윗만지산길이 나옵니다. 

 

윗만지산 중턱에서 본 풍경입니다.

 

힘들면 귤암리를 떠나게 될까봐 어머니를 만지산에 묻었습니다. 가끔 산보가는 곳이기도 하지요.

 

'사진굿당'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구름 속에 수행중인 스님의 이름없는 절집이 있습니다.

 

'사진굿당' 입구에 세워진 현판입니다.

 

새로 변경된 주소입니다. '정선읍 윗만지산길 56-5'

 

쓰러지는 국화를 서로 묶어 두었습니다. 옆에 있는 나무는 관상용 복숭아나무인데, 꽃이 너무 예쁘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마당이지만, 아내가 없어서인지 쓸쓸해 보입니다. 

 

도라지 밭과 '소나무 숲 쉼터'로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한번도 넘어진 사람이 없답니다. 다들 조심하니까...

 

올 해는 너무 바빠 가마솥에 소머리 한 번 삶아먹지 못했네요.

 

소나무숲 쉼터로 가는 길목의 돌탑인데, 밭에서 나온 돌맹이 들이랍니다. 

 

한 때 최고의 휴식처였던 소나무숲 쉼터에 젖은 낙엽만 쌓여 있습니다.

한 여름철 여기 오르면 등골이 시원해 진답니다.

 

도라지밭 위에 버티고 선 나무가 옻나무 입니다.

옻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칡능쿨이 마치 구렁이같습니다.

 

방에서 보이는 소나무 풍경인데, 한 그루가 잘려 품위를 잃었습니다.

 

4년 전 심은 목련인데, 올 해 처음으로 꽃망울을 터 트렸답니다.

 

텃밭에 힘을 실어 줄 두엄밭입니다.

 

올해도 고추가 신통찮습니다.

 

'사진굿당' 곳곳에는 산초나무가 많습니다. 작년에는 시기를 놓쳤으나, 올해는 '정선아리랑제'

행사 때 다 땄습니다. 산초기름 짤 작정인데,가시나무에 글킨 상처들이 작난 아니네요.

 

산에서 담배 피우면 큰 일 나지만, 나만의 비밀 흡연실입니다.

 

마당으로 내려가는 길 가에 뽕나무가 있습니다.

엄청 달고 많이 열리지만 따는 시기를 번번히 놓친답니다,

 

'큰무당노린재' 가족들이 뽕잎에 붙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가 개복숭아 나무입니다. 두 가랑이를 쩍 벌린 그 자태 자체를 좋아합니다.

열매는 많이 달리지만 벌레 때문에 대부분 떨어지지요. 벌레먹은 개복숭아술은 약이지요.

 

지방으로 돌아다니다 오랫만에 들린 '사진굿당'의 우체통입니다.

 

퇴색한 사진 느낌은 별로지만, 여기 앉아 멍하니 앞 산을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방 안에서 내다 본 바깥풍경입니다. 햇살이 싱그럽네요.

 

방문 위에 걸린 사진은 '인사동, 봄날은 간다'전에 걸렸던 사진이지요.

신경림, 채현국, 무세중, 심우성, 황명걸, 장사익, 김신용, 최백호, 한봉림씨 등 보고싶은 분들이 많군요.

그동안 저승으로 떠난 친구도 둘이나 보입니다. 화가 여 운 과 시인 적음 말입니다. 

 

여기가 식당이며, 작업장이고 침실입니다. 옛날에 고추 말리려고 큰 방을 만든 모양인데,

군불 때는 아궁이도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겨울에는 우풍이 심해 엄청 춥습니다.

 몇 년 전 '생활성서' 수녀님 두 분이 이곳에 취재왔다가, 너무 추워 밤을 꼬박 세운적도 있지요.

 

벽에 걸린 범종 당좌문양 사진은 부적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닙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사진굿당' 맡은 편 골에 사는 최돈연씨인데, 아직 건강하십니다.

 

인화하던 암실입니다. 요즘은 서울서 디지털로 해결하니 그냥 창고가 되어버렸지요.

 

겨울철에 사용하려고 작은 방을 만들었으나 짐이 많아 여기도 창고가 되었습니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방문하는 분들을 위해 따뜻한 물과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예전에 찍어 둔 사진입니다. 

 

'신명' 설치사진전입니다.  햇볕에 노출되어 일년 정도 지나면 퇴색합니다. 

 

 

2008년 '만지산 서낭당축제'에서 무세중선생과 무나미선생께서 굿판을 벌입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설치 사진전입니다.

 

 

정영신의 '장터' 설치사진전입니다.

 

 

 

소나무숲 쉼터에 전기를 당겨 여름철엔 여기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설치미술가 김언경씨의 작품 '바람꽃 나무"입니다.

 

'놀자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각지에서 놀이꾼들이 모였습니다.

선생들은 많은데, 학생들이 없네요.

 

'농심마니'(대표:박인식) 회원 30여명이 만지산에 모여 산삼을 심기 전에 서낭당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뮤아트'김상현씨가 방문하여 절창을 하고 있습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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