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풍기에서 소설 쓰는 배평모씨가 상경했다는 연락이 왔다.

서소문에서 열린 이상엽씨 전시 뒤풀이에서, 마침 옆 자리의 박신흥씨가 안다기에 바꾸어 주었더니,

인사동 유목민으로 함께 넘어 오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박신흥씨가 예스터 데이사진집을 펴낼 때, 배평모씨가 서문을 써 준 인연이란다.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삼천포에서 시 쓰고 도자기도 굽는 박영현씨도 와 있었다.

두 시골 노인네들이 무슨 작당으로 상경했는지 모르지만, 윤병권씨 등 여러 명이 어울려 왁자지껄했다.

 

배평모씨는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이 넘었지만, 좀 징그러운 친구다.

인사동 레떼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뭐가 좋았던지 이틀 동안 밥시켜 먹으며 한자리에서 퍼 마셨다.

사실 배평모 보다 술집 마담 점숙씨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갈까 보다라는 절창에 끌렸는지 모른다.

 

이 친구, 만나자 마자 신바람 난 듯 구라를 풀기 시작했다.

모르는 여인네들 앞에서, 대학로 알몸 헤프닝에서 부터 고속도로 급정거 사건에 이르기까지

침을 튀기며 나발 불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술 맛 떨어지는 정치이야기보단 낫지만,

초면의 사람들만 있으면 그 따위 이야기로 소개해,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마누라 말 잘 들어며 착실하게 사는 놈, 왜 염장을 지르는지 모르겠다.

배평모는 본래 소설가라 그런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버릇이 있어,

듣기 싫지만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이번엔 박영현시인까지 나서서 내 이야기로 쓴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한 때 고물 갤로퍼에 공병을 잔뜩 싣고 다녔는데, 짤랑거리며 왜 싣고 다니냐고 묻기에

"이거 팔아 연애한 번 할끼다" 했더니, 달랑 그 걸 시로 옮겨 쓴 것이다.

배평모는 고속도로 사건을 '쌍용' 사보지에 꽁트로 팔아먹더니, 모두들 전국적으로 망신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모두들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인네들에게 수작 걸기는 이미 틀린 것 같다.

어느 미친년이 정신병자 같은 잡놈에게 관심 두겠는가?

 

두 시골노인네들도 여인네들에게 침 흘리며, 열심히 나를 엿 먹였지만, 별 수 없었다.

때 되어 여인네 떠나고 나니, 마치 여우 놓친 늑대처럼 슬피 우는데, 인왕산이 울리더라.

여관비 아끼려 백상사우나에 간다기에 잘 씻고 손장난이나 한 번 하라 위로했다.

 

사진,/ 조문호


















 

예스터데이



박신흥 글·사진|눈빛|160쪽|1만5000원

흑백사진 속 열 살 남짓 아이는 이제 쉰 살 어른이 됐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세로쓰기 신문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 '선데이서울'이 표지가 보이도록 꽂혀 있다. 껌과 개비 담배를 함께 파는 가난한 좌판이다. 엄마는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이가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작은 손에 연필을 쥐고 낡은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다. 이번 받아쓰기 시험엔 꼭 백점을 맞겠다는 듯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1970년대 사진 속 풍경은 아련한 추억으로 달려가게 한다. 수도 시설 없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 '물차'가 오는 날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1.8t 트럭에 실려온 물을 받으러 판잣집 주민이 다 모였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물통 두 개를 양손에 든 아이, 젖먹이를 업고 나온 엄마, 어린 동생을 안은 여자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삶의 힘을 읽을 수 있다. 변변한 놀이 시설은 없지만 말타기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 모습은 건강해 보인다. 동무 등 위에 올라타려고 달려온 아이 얼굴엔 장난기가 그득하다.


 

엄마 대신 가게에 앉아 공부하는 이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가난해도 꿈이 있던 시절이다. 1976년 경기도 부천. /눈빛 제공

 

버스 옆을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여(女)차장의 무표정한 얼굴, 졸업식날 검은 교복에 허연 밀가루를 뒤집어쓴 남학생들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한갓 고단한 시대였다고, 단지 고통의 나날이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40여년 전 서울·경기·강원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작가는 "모두가 어려웠다. 그러나 꿈을 안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1970년대 일상을 담은 사진집이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다.

 

조선일보 / 이한수기자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 개인 사진전 'Yesterday'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가 13~18일 서울 정동갤러리에서 개인 사진전 'Yesterday'를 갖는다.

1970년대 경기도 일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필름 카메라 렌즈로 서정적으로 담아낸 47점이 전시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하러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말로만 듣던 카메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까까머리 어린이,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흉내 내는 아이들 등이 공개된다. 작품의 제목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당시의 생활상이 따뜻한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표현됐다


박신흥 이사가 1975년에 찍은‘턱걸이’. 한 여자 아이가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안간힘을 쓰고 흉내 내고 있다.

 

박 이사는 "70년대 학창시절에 사진기자를 꿈꾸며 찍었던 작품들"이라며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만 그려지고 보기 힘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장면들을 골라 전시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