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날 ‘유목민’에서 화가 김재홍, 나종희, 강행복, 홍 창, 이인철, 손기환. 김진하, 성기준씨를 만났다.

옆 자리에는 신현수, 이용우, 이인섭씨가 있었고, ‘유담’에는 김명성, 김용국씨도 만날 수 있었다.

뒤늦게 문영태씨의 아들 문지함씨와 사위 기선호씨도 합류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강행복씨로 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가신 천상병선생 이야기를 꺼내며, 전활철씨로 부터 천상병시인 사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은 ‘유목민’ 실내장식에 사용할 이미지로 보내 준 것인데,

마음대로 출력하여 허락도 없이 나누어 준 이야기를 들으니 할 말을 잃었다.






동생처럼 가까운 사이라 믿고 원본을 맡겼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작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도적질이나 마찬가지다.
영문을 모르는 강행복씨야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따져 보고 싶은 전활철씨가 자리에 없었다.






여지 것  사진가를 밝히지 않거나 무단으로 사용하는 등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지 않았다.





2년 전에는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추진한 ‘촛불광장 기록전’에서 전시 작가를 밝히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전시 작품을 철거해 소각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전시 책임자인 김준권씨와는 아직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사진매체의 설움을 수 십년 동안 당하며, 한 평생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가.

그 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진인 모두의 일이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진가를 무시하기에 앞 서, 사진가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1. 사진 원본을 넘겨준 인사동 거리풍경 사진



이번 사건의 발단은 두 달 전, 실내장식에 사용할 사진 두 장을 부탁받았는데, 원본을 전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몇 일 후 가보니, 인사동 거리 풍경은 어둡게 프린트해 작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입구 벽에 붙여 놓았다.
잘못된 사진이라 나머지 사진 만들 때 바꿀 것으로 생각했으나, 계속 그대로 붙어 있었다.



2, 사진 원본을 넘겨준 고) 천상병시인 사진



그 날에서야 나머지 사진인 천상병시인의 사진도 벽에 나 붙었다.

그런데, 유리에다 인쇄하기로 한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장난스런 글까지 삽입시켜 놓았다.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사진을 주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꼭 주어야 할 사정이 있었다면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이다.






전활철씨는 30여년을 친동생처럼 지낸 가까운 사이로

몇 일전에는 동자동 쪽방까지 찾아와 집안 걱정거리를 털어 놓은 적도 있었다.

뜻밖의 일에 고민이 많은 것 같아 홧병에 좋은 약초까지 챙겨갔는데,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는가?
당장 벽에 붙은 프린트를 모두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손님들 때문에 참았다.






요즘 술도 많이 못 마시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히히닥거릴 기분이 아니었다.

전활철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싫었지만, 그를 위해 챙겨온 약초도 전해주기 싫었다.

많은 사람이 앉은 술상에 약초를 꺼내놓으며, 필요한 사람 있으면 가져가라고 와 버렸다. 



 


그 이튿날 이미지 원본을 파기하라는 전화를 했더니, 사과는 커녕 엉뚱한 변명을 했다.

화가 치밀었으나, 돌이켜 생각하니 필요한 규격의 사진을 뽑아 주지 않은 본인의 잘못도 있었다.

사실, 여유만 있었다면 사진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사진 만들 돈도 없었다.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라 없던 일로 덮고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잘못에 대해서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엄하게 다루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더 이상의 유출방지를 위해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이후로 내 서명 없는 위의 사진 두 장을 만나게되면 법적 조치도 불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원본을 그냥 넘겨 준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일 년 동안 ‘유목민’ 출입 금족령과 함께 그를 만나지 않기로...



사진, 글 / 조문호




















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













 

 

 





고인이 된 문영태 화백의 장녀 지민이가 시집갔다.
지난 3일 오후6시, 장재순여사의 장녀 문지민양과
기노준, 이연화씨의 장남 기선호군의 결혼식이 충무로 ‘한국의 집’ 마당에서 열렸다.

좀 늦어 식전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전통혼례의 멋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기럭아비로부터 기러기를 전달 받은 신랑이 신부 방 앞에다 두고 큰절을 하니 장재순여사가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린 신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는데, 수모가 부축은 하지만 행여 넘어질까 불안했다.

요즘이야 결혼 전에 만나는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하는 커플들도 많겠지만,

백년해로할 상대를 두고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정갈한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후, 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는데,

상 밑으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은근한 눈길이 사랑으로 가득했다. 건네주는 술잔에도 정념이 넘쳤다.

마치 속으로 “넌 오늘 죽었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집’ 전통혼례는 옛 격식 그대로 진행되는데다, 고풍스러운 한옥 마당에서 치러 져

일반예식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이날도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오랜만에 우리문화의 정수를 느끼는 좋은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아는 분으로는 장재순여사 가족을 비롯하여 화가 이인철 내외와 홍선웅, 정영신씨 등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혼은 예식장에서 치루는 것 보다, 우리의 멋을 제대로 느끼는 전통혼례가 바람직하다.

특히 외국인 신랑신부를 맞는 혼주들이 선호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우리 전통혼례를 한 번 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전통혼례를 치루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선조들의 결혼관과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요즘처럼 이혼을 밥 먹듯 하지는 않을 것이란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웃이 가까워 신랑신부를 잘 알아 소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요즘은 다들 바쁘게 사니 새로 맞이하는 신랑이나 신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혼례가 끝난 후 하객들에게 인사드리며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도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지민이 결혼으로 온 가족은 물론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 문영태화백이 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코 끝이 찡했다.

그나저나 아들 지함에 이어 딸 지민이 까지 시집보내는 장재순 여사의 외로움은 또 어찌할고?

예전의 대가족제처럼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민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라.
네 아버지가 저승에서 지켜보며, 싱글벙글 좋아하실 것이다.
부디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한국의 집’ 전통혼례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 하시길...

전통혼레 비용은 기본비용이 1.200,000원이고, 선택사항으로 미용과 사진촬영 등 부대비용을 백 만원 이상 잡아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 혼례복 대여비가 50만원, 수모 인건비가 20만원, 폐백비용도 50만 원정도 소요된다. 식전공연으로는 부채춤이 50만원, 사물놀이는 40만원, 판소리는 10만원으로 선택사항이다. 피로연 비용은 일인당 4만원부터 6만원까지 세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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