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와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 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 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에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이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와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 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며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월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 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