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의 WHY YOU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는 왜 그렸나?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 눈물, 담배를 싸는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서 새기고 색칠, 10x15센티미터,&nbsp; 대구 인당박물관 소장. 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6. 6. 3-10. 3, 도판 125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 이중섭, 꼬리가 묶인 채 서로 해치려는 괴물들, 종이에 잉크와 수채, 그림만 26x26센티미터, 소장자 모름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6월 2일자 엽서에 그려 보낸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마리 짐승들의 꼬리는 서로 연결되어 그려져 있고 여인이 그것을 손잡이처럼 들어올리고 있다.

 

한 방향으로 달리는 세 마리 짐승 그림이 1941년에 그려진 반면, 이번에 소개하는 서로 해치려는 두 짐승의 그림은 1950년 이후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시기를 전후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의 꼬리는 확연하게 묶여 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풀기 어려운 옭매듭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 꼬리 부분이 옭매듭 직전으로 엉켜있다.
시간 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짐승의 꼬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해방 이전에는 평화로운 통일 조국에 대하여 희망을 가졌었는데, 해방 이후 엉켜버린 정국 속에서 걱정스럽고 실망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원래 그림을 다시 보자. 일견 잔인해보이는 설정 이면에 중섭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칼과 망치를 들고 서로 해하려 하는 장면이지만 둘의 얼굴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잔인한 짓을 할 때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든 괴물의 다른 손은 칼 든 상대편 팔을 잡으려는 듯 뻗어있으나 표정은 마뜩찮은 듯 찌푸려져 있다. 칼을 든 괴물은 상대방의 손을 피하려는 듯하다. 쌍방이 다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이 그림은 소재 말고 또 다른 점도 특이하다. 한글가로풀어쓰기로 이름을 그림의 맨 위, 그것도 가운데에 적었다. 그리고는 이름의 좌우로 네모난 종이 형태에 맞추어 테를 둘렀다.

그림에 곁들인 색칠도, 위아래 짐승들의 몸통 색은 상대방이 걸쳐입은 저고리 색과 같게 칠했다. 그런데 색칠한 방법은 다르다. 저고리는 세로로 몸통은 가로로 그려진 느낌이라서, 같은 색이지만 칠이 다르도록 구성했다. 배경은 차가운 색으로 선택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새끼가 서로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울림을 해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 8 (임헌영,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한길사, 2021, 98쪽에서 재인용)

 

6. 25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다고 절규하는 듯한 말이다. 함석헌의 이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어느 때에 화가인 이중섭은 이 처참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하는 이 처참함을 세계에 내놓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적어보내기도 한 이중섭이었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분명 전시나 책자로 발표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만 하고싶지는 않았던 이중섭이 주위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그림이 좋은 바탕재료 위에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더 좋은 이름을 궁리해 내기를...

 

최석태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최석태의 WHY YOU

▲ 박수근,&nbsp; 벚꽃, 종이에 유채, 26x119센티미터, 1961년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기는 물론 물감이 칠해진 느낌도 박수근의 여늬 그림과는 다르다. 방금 흰색의 회를 바른 것 같은 화면이다. 화강암 같은 재질감과 색감이 아니라, 밝은 바탕 위에 이 바탕칠이 마르기도 전에 붓이 아니라, 분명 연필로 윤곽선 긋기를 감행했다.

 

그런 뒤 충분히 마르기를 기다려 꽃과 잎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기 어울리는 색깔을 발랐다. 그랬기에 색깔들은 반들반들한 바탕 위에 미끄러지는듯 발라졌다. 이 색깔들은 상당히 묽다.

 

이 그림은 1961년에 그려졌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꽃이,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 꽃인데 모양은 다르다. 서로 종류가 다른 벚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봄에 그려진 것이리라. 분홍 벚꽃을 그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던 화투패에 그려진 벚꽃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같기도 하다.

 

▲ 박수근,&nbsp;&nbsp;벛꽃의 부분화
 

박수근은 곧 있을 쿠데타를 모른 채, 지난 해 봄부터 펼쳐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4.19 공간이라고 하자. 1960년 봄, 이 벅찬 국면을 맞은 시인 김수영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밑씻개로 쓰자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이때로부터 10년 뒤인 1970년에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잊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인물로 그려낸 소설 <나목>을 써낸 박완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에서, 1960년 4월 이래 기쁨에 차 날마다 거리를 거닐며 쏘다녔다고 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태어난 나에게는 박정희가 죽은 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시기가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하였기는 해도, 1919년 3월 만세 혁명의 다음에도 이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한 시기, 전주성을 접수하여 해방했을 때도 그랬으리라.

 

일본의 강제 점령하에서 태어나 살았던 박수근의 삶에서는 광복의 시기에 잠시 그랬을 것이다. 10년도 더 지나 지긋지긋했던 이승만 독재의 그늘에서 살았던 박수근이기에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는 북한 치하에서 중학교 교사이면서 기초 단위 대의원이기도 했으므로, 초등학교만 나온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상을 내세워 침묵하고 지내왔다.

 

▲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생전의 박수근 화백.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1960년 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 봄의 분위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려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날이 갈수록 정갈해져 가는 화강암 같은 재질감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였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좀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이 빠른 이 기법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다른 면모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가 사망하는 1965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대략 20점 정도이다. 그런데 그 20점은 박수근의 그림들 가운데 꽤 소외되어 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화풍으로 인해 박수근의 그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못해 박수근의 작품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록에 제대로 싣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판로를 찾기 어려워 잘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에는 태작이 없다. 새로운 화풍의 20점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화법에 회화적 요소를 좀 더 많이 가미해 조화롭게 적용한 수작이다. 희망과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화풍의 박수근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귀로, 귀가, 고목과 세 여인 등 다양한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
배경, 구도, 서명 위치까지 어머니의 길을 향해 배치

▲ 박수근 귀로, 나무와 세 여인, 천에 유채, 41. 5x 79.5센티미터, 1962, 개인 소장. 흔히 '귀로'라고 하지만, '귀가' 혹은 '고목과 세 여인'이라고 붙인 곳도 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면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헐벗은 나무 뒤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땅도 하늘도 구분이 되지 않을뿐더러 온통 뿌옇다.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 달리 이 나무는 그림의 아랫변을 땅으로 삼아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아랫부분 밑둥과 가지의 윗부분은 박수근이 잡아낸 장면의 바깥으로 뻗어 있다.

 

나무 뒤로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세 여인이 걷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은 지쳐 보인다. 여인네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함지 같은 것을 머리에 얹었으나 위가 볼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 것을 다 팔아 거의 비어버린 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루가 저물 무렵, 눈이 약간 오는 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

 

▲ 부분화. 나무의 주기둥 한가운데 앞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모두 잘려 있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가지들이 나뉘어 뻗어간다. 그런데 앞부분에 가지들이 조금만 남은 상태로 잘려져 있다. 굵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잘려진 것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람 잦아지라고 위로 뻗는 가지 세 개만 남겼을까?

 

나무의 전체 모습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순탄하게 자랐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 곁을 지나가는 아낙네들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해를 맞으려 왼쪽으로 향한 가지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낙들은 해를 등지고 걷고 있다. 눈 내리는 흐린 날이 아니었다면 앞쪽으로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나무를 가운데 두고, 공간이 넓은 왼쪽에 두 사람 오른쪽에 한 사람을 배치했다. 왼쪽부터 각각 노랑, 빨강 그리고 검정 저고리를 입혔는데, 이 저고리 색들만이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색깔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부분화. 열 번쯤 덧그려 입체감을 만든 화면 사이로 다양한 색이 보인다
.

거의 회갈색인 전체 화면에서 검다시피 한 나무와 세 사람의 옷 빛깔 만이 조금 눈에 띄는 담담한 색조의 그림이다. 이를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배경을 색채의 장식으로 메꾸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보는 사람의 상상속에서 넓게넓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색을 볼 수 있다. 박수근은 이 많은 색이 전체 색조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수천 번 붓 작업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둡지만 밝고, 보일 듯 말듯 수많은 색깔만큼이나 많은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차분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수천 번의 붓 작업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있기 때문이다.

 

간격을 달리하였지만 세 사람을 마치 줄 세우듯 배치했고, 화면 아랫변에서는 약간 올려 그렸다. 수근의 다른 그림과 달리, 발이 닿는 부분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고 배경과 균질하게 처리하였다.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는 나무를 지나, 눈 내리는 으스름에 세 사람이 가는 길이 끝없이 적막해 보이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길은 이미 지나온 길을 포함하여 앞으로 더 멀리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균질하게 처리함으로써 생긴 심리적 공간이다.

 

▲ 부분화, 나무의 주 기둥 바로 왼쪽에 박수근 화백의 서명(흰색 화살표)이 보인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 그림에만 있는 특징이라 할 조처를 덧붙였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써넣는 이름은, 보통 그림의 아래이거나 어느 쪽이든 귀퉁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툭, 채일 수도 있는 위치에 적어놓았다. 아주 드문 예다. 이 그림의 전체 구도는 이 이름쓰기(서명)의 위치와 더불어 특이한 모습이다.

 

박수근은 1960년에 일어난 학생혁명 이후, 전에 없던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시기인 1962년에 그려졌다. 하지만 칠하고 말리고 그 위에 다시 칠하고 말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박수근 특유의 화법에서 나오는 질감과 색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결과는 흔히 화강암이라고 부르는 쑥돌의 느낌이다.

 

▲ 수석 전문가인 설화취선님의 탐석(探石) 블로그(m.blog.naver.com/wlstnddjs)에서 제공한 다양한 쑥돌 사진. 좌상단의 쑥돌은 이끼가 많이 낀 상태이다.
 

화가는 아들에게, 아비가 추구하는 색감과 질감은 이런 것이다 하며 쑥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근에게는 구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었고, 이를 한평생 추구했던 것이다.

 

박수근의  이 그림에 대한 평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 작품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 여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이 이제는 그쳤겠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하염없이 길게 이어졌을까! 아이들과 지아비를 먹여살리기 위해 그렇게 이어진 애씀이 그들의 일상을 위험에서 건져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80센티미터이다. 박수근의 작품들 가운데 꽤 큰 편이다.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려면 양손의 손바닥을 펴서 손목을 굽히지 않고 서로 붙여보자. 그 길이와 비슷하다. 수근은 길고 긴 어머니의 길을 작품의 크기, 색, 구도, 심지어 자신의 서명 위치까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 그림을 비롯해 박수근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인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광복 직전에 정신대를 피하려고 16살의 나이에 노총각이던 내 큰 외삼촌과 맺어졌다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폐해져 늘 아팠던 남편을 대신해 물고기를 사다 새벽부터 온 산중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렸던 키 크고 고우셨던 나의 큰 외숙모님이다. 내 주변 친지들 가운데 가장 많이 고생하신 그 분을 어찌 잊으랴.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글 /  최석태 (미술평론가)

 

▲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 후반, 캔버스에 유채.&nbsp;72x60cm, 개인소장.
 

1948년 11월, 이쾌대는 조선미술문화협회의 제3회 정기전에 야심적인 크기의 그림을 발표한다. 150호 크기는 높이가 170센티를 좀 넘고, 가로는 2미터가 넘는 크기다. 그림의 제목은 <조난(遭難)>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발표된 때는 1945년 8월에 광복이 된 때로부터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잘 알다시피 남과 북에는 따로 각기의 정부가 세워진 때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투어 한마디씩 했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담긴 내용과 화법이 남달랐다.

 

화가 박고석은 “문제작”이라 했고, 해방공간에서 이쾌대의 처신을 격렬히 비난해 오던 비평가 박문원은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또 벽화나 대작을 꾸미기에 우선 적당한 하나의 양식을 창조한 사람”, “인민미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속한 조선미술문화협회 회원 중에서) 오직 이쾌대씨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화가 겸 미술문필가 김용준은 “그 기법이 현대적인 사실이 아니요, 16, 7세기적인 사실의 인상을 주는 위험성이 있었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이쾌대의 <조난> 이전에 발표된 <해방고지>를 겨냥한 듯, 이쾌대의의 작품 방향에 대하여 “라파엘의 인물에다 조선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라고 평했다.

 

이 그림은 우리 역사 중에서도 가까운 100년 동안에 이룩된 시각예술 작업 중에서 가장 문제를 품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착잡한 정세 속에서 그려져 제출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친형 이여성이, 암살당한 여운형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에서 이쾌대는 신분상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의 부인이 그림을 잘 간직했으나 그 후 오랫동안 작품의 존재조차 발설하기 힘들었다.

 

이처럼 화제가 되었다가 50여년 동안 사라졌던 이쾌대의 문제작 <조난>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과연 그 <조난>일까?

 

이쾌대가 그린 일련의 대작 그림은 총 4점으로, 모두 ‘군상’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부른다. 필자는 그중 아래 2점은 ‘해방고지’라고 생각한다. 공중을 날듯 하는 두 여인이 숨어서 무엇인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설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 해방고지1, 1945-8년,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에서는 '군상 II'로 소개되었다.
▲ 해방고지 2, 1945-8, 천에 유채, 225x181센티미터, 유족 소장.. 2015년 '군상 I'로 소개되었다.
 

나머지 2점은 ‘조난’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양상은 다르지만 두 그림에 모두 폭발이 그려졌다. 특히 앞의 그림은 폭발이 거대하여 사람들의 움직임과 조응하면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후자는 전자의 상태를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은 앞의 해방고지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 군상, 1948,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 2015년 '군상 III'으로 소개되었다.
▲ 조난, 1948년, 천에 유채, 216x177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군상 IV'로 소개되었다.
 

문제의 이 그림은 자세한 내용이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논자들에 의해 1945년의 광복부터 대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 시기를 가리키는 이른바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한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1,000쪽에 이르는 막대한 분량의 저서『독도 1947: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돌베개, 2010)에서 이 그림을 거론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대학 사학과 교수는 이 그림이 바로 그 <조난>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이 <조난>이 아니라고 보는 여러 견해도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런 사정은 바뀌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필자는 여러 정황상 이 그림이 1948년 조선문화예술협회 3회 정기전에 출품된 바로 그 <조난>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난>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은 폭발로 보이는 사건 혹은 사고에서 비롯된 사태임이 분명하다. 폭발의 위치를 시계에 빗대자면 12시. 한밤중에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 때문에 놀란 사람, 폭발은 모르는지 아는지 화내는 사람이 보인다.

 

▲ <조난> 오른쪽 세부.

화면의 오른쪽 사람들은 화면 안쪽 멀리서부터 보는 사람의 눈앞으로 쏟아져 나오듯 쓰러지거나 놀라거나 한다. 그 뒤로는 바위를 들어 내리찍으려는 사람과 이를 말리려는 사람이 화면 맨 안쪽에 보이고, 놀라움을 가라앉히려는 남녀를 비롯하여 놀라서 넘어지는 여자 그리고 머리를 잡거나 물어뜯는 사람으로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여자도 보인다. 맨 오른쪽에는 화면을 나누는 듯한 배경을 설정하고 아이를 거느린 여자가 무기력한 상태를 보인다.

 

▲ <조난> 왼쪽 세부.

그림 왼쪽의 인물들도 몇 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화면 맨 안쪽에 폭발에 놀란 듯한 여러 사람이 보인다. 오른쪽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상태를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쳐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자를 부축하고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남자들이다. 그들의 왼쪽에는 아이들 여럿이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폭발로 인해 다친 사람을 옮기거나,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는 듯하다.

 

이쾌대의 작품 <조난>이 발표된 시기는 그해 6월 미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그래서 당시 박고석은 이 작품을 보고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쾌대는 독도사건을 소재로 르포타쥬나 현실고발을 하지 않았다. 독도 사건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화면의 어디에도 바다나 배 같은 소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에서의 사태를 어디에선가 벌어진 일로 연출하였다. 직접 사건을 그려서 즉자적으로 알게 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상,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이쾌대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심을 두고 암시 내지는 은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으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가 만든 정황은 육지에서 어떤 폭발로 혼란이 일어나지만,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이를 해결할 것이라는 듯이 말한다. 이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정체 모를 어떤 폭발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현실의 고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명백히 일종의 은유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화가 제리코가 당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려 참상을 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자유의 여신>과 견주는 견해 또한, 화풍은 유사하나 작의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nbsp;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

그보다는 오히려, 제리코나 들라크르와 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에 나타나는 방향성과 연관해보거나, 폴 고갱이 그의 만년작이자 전지구적이라 할 순례를 거쳐 이룬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에 견주는 편이 낫다.

 

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난>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처] 뉴스아트 (http://www.news-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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