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정녕 도시에서 소외된 뒷방이란 말인가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낙원동 전경(1983) 공원을 빙 둘러 "J"형상으로 들어선 상업시설(파고다아케이드)과 종로 대로변에 선 건물이 보임. 주변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c 서울역사박물관

이곳에 서면 도도한 시간의 흐름이 날로 전해 온다. 허허로운 일상을 보내는 노년 세대가 점유한 공간은, 마치 뒷물에 밀려 하구에 다다른 강물처럼 보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이 풍경 속 출연자는 분명 우리로 대체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만들어 낼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소비하는 도시공간이 이채롭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한 시점에 멈춰 서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한 세대 전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도시에서 지대(地代) 지불 능력은 소비행태 및 구매력이 결정한다. 따라서 지대가 구획한 공간조직은 세대별 특성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성을 띤다. 전유 공간 형성이다. 이런 공간은 반드시 배타성을 갖게 되며, 이는 한 공간에 형성된 그 세대의 문화와 공간소비 행태로 치환되어 유기체적 흐름으로 변화한다.

 

 

▲ 송해길 북단;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송해길. 7월 폭염에 거리가 낮잠을 자는 듯하다.ⓒ 이영천

홍대 앞이 20∼30대 공간이듯, 이곳도 시니어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탑골공원을 위시한 낙원동 일대 '송해길'이라 명명한 곳에 형성된 특이한 공간조직이다. 일종의 '환원 공간'인 셈이다.

노년이 채운 공간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터부시했다. 이들 사이에도 욕망이 작동하는 엄연한 하나의 '사회'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꾸 밀쳐내려 했다. 또한 이 공간을 타자화하며 지우려 했다. 집단으로 모인 이들 행태를 곁눈으로 흘겨보며 비난하기 바빴다.

이렇듯 이곳은 소외된 도시의 '외딴방이거나 뒷방' 취급을 받아 왔다. 월드컵 개최를 빌미로 서울시는 운현궁 맞은편에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지어 이들을 수용할 의지를 내보인다. 명분은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이었다.

 

 

▲ 서울노인복지센터 운현궁 맞은 편에 21세기 초 들어선 노인복지기관. 탑골공원 노인을 수용하려는 의도였으나, 명백한 한계를 보임.ⓒ 이영천

물론 서울노인복지센터 프로그램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무척 훌륭하다. 식생활에서부터 건강, 취미, 교육은 물론 취업 알선까지 이 시대 노인들이 당면한 제 분야를 망라한다.

그러함에도 탑골공원에서 밀려난 노인들이 종묘공원으로 자리를 바꿔, 하루 2∼3천 명씩 모여들었던 현상은 왜 일어났을까? 이들을 관리와 통제대상으로 상정하고 일정 공간에 '가두어' 두려 한 서투른 행정이, 시작부터 이미 절반은 실패한 건 아니었을까?

이제 탑골공원이건 종묘공원이건 수천이 군집하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두 공원이 갈 곳 잃은 그 많던 노인들을 어디론가 다시 쫓아버린 셈이다. 그러나 두 공원 주변엔 적잖은 수의 노인들이 지금도 모여들고 있다.

설 자리가 없는 노년

노인은 누구이며, 노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딱히 법이나 제도로 규정되어 있진 않으나 '반강제로 경제활동을 끝내야만 하는 연령대'로 규정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다니던 직장을 내 뜻과 무관하게 그만두어야만 하는, 정년을 맞이하는 시점으로 간주하는 게 사회통념이다. 생물학적 노쇠는 물론 생리적, 심리적으로 급격한 퇴화가 밀려드는 시점이기도 하다. 만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고 있다.

 

▲ 일상풍경 낙원상가 왼쪽 전면, 탑골공원 북쪽 빈터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풍경.ⓒ 이영천

 현재 구백만 명인 노인 인구가, 2032년 천사백만 명으로 예측된다. 급격한 노령사회로의 진입이다. 대중교통 이용요금이 면제된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얄팍한 연금에 의존하는 전혀 다른 세계로 생활행태 천이가 강제된다. 노인 빈곤이다. 불과 1백여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락이 펼쳐진 것이다.

노인이 핵심이던 대가족체제가 산업화 이후 급격히 해체되고, 그 자리를 핵가족화한 도시형 가구 구성이 차지했다. 이는 노인의 권위와 경륜은 물론 안락한 노후마저 보장해 주지 못했다. 노환이나 병이 찾아들면 요양원이나 병원에 갇혀 자식이 부담하는 화폐 단위에,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여생을 저당 잡혀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잉여 존재로의 전락이다.

이 길에서 누군들 예외이겠는가? 강의 뒷물은 항상 앞 물을 밀어낸다. 지금의 물은 어제의 그 물이 아니다. 세대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묻는다. 그대는 효용가치가 영원한 존재로 살아남을 것이라 자부하는가?

그래도 작동하는 공간조직

이곳 노인들은 대체로 이중의 존재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물리적 신체나이는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도태된 상황을 심리적으로 거부한다. 이곳에 나와 있어도, 스스로는 철저히 '관찰자'라 여긴다.

빈한한 경제 능력에 무료급식소를 이용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과거를 살아낸 시간에 의식의 끈을 묶어 두고 있다. 열정적이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현재 시공간에 끊임없이 투영시킨다. 분명 현실과 괴리된 몽상임에도, 이런 의식이 이곳을 노인 전유 공간으로 변화시킨 힘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변화하는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나이 듦'은 속도와 반대개념이다. 따라서 이 공간도 사라질 위험성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이곳에 작동하는 나름의 법칙이, 이 공간을 지켜줄 최후 보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매력한계에 따른 지대 때문이다. 지대가 배타적 노인 전유 공간으로 살아남게 한 핵심 요소다.


▲ 허리우드클래식 실버 전용 영화관으로 이용료가 저렴하며, 낙원동 일대 노인 문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영천

음식값이 무척 저렴하다. 20세기 말에 형성된 가격대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무료급식에 의존하기 싫은, 최소 지불 의사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인이 주로 이용한다. 이발소가 그렇고 목욕탕이 그러하며 아주 값싼 커피값이 또한 그렇다. 술집과 간이주점이 그렇고, 패스트푸드 주 고객마저 이들이다. 낙원상가에 있는 영화관 허리우드클래식이 '실버 전용'으로 운영되는 사례가 대표적 본보기다.


탑골공원 북측 빈터에선 바둑과 장기 대결이 일상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경운동, 봉익동, 돈의동과 피맛골 등지 골목을 소비하는 걸음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공간조직은 여전히 살아 퍼덕이고 있다. 속도와 무관하게 지나간 젊음을 회상하며 느리게 변해가는 철저한 '환원 공간'으로 생존해있다.

 

▲ 공터 간이주점 탑골공원 동측 담장과 송해길 사이에 형성된 간이주점. 잔술을 팔고 있으며, 대낮임에도 이용자가 상당수다.ⓒ 이영천

외부자 시선에 포착된 몇몇 스틸컷은, 이 공간이 오히려 넘쳐나는 활기를 버겁게 껴안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직도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라는, 감출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다가오는 미래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지를 이들은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온갖 욕망을 이 공간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다. 모두 한때는 찬란한 시절을 구가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잉여 존재로 밀려난 '노인'들이 점유·소비하는 장소기억이다.

'송해길'이 가진 힘으로

지난 6월 방송인 '송해'씨가 타계했다. 1985년 낙원동에 자리한 '원로연예인상록회'가 사랑방 역할을 맡게 되면서, 고인은 이곳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낙원동 일대에서 일상생활을 펼쳐나간다.

 

▲ 송해길 상징 최근 타계한 송해 씨 흉상과, 그를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는 종로3가역 5번출구 송해길 상징 장소.ⓒ 이영천

이곳을 활성화하려는 그의 여러 봉사와 노력이 주민들 지지를 얻게 되었고, 주민들 요청으로 명예도로명인 '송해길'이 2016년 탄생하였다. 수표로 북쪽 끝 240m 구간으로 종로2가에서 종로3가역 5번 출구까지다. 이곳이 아슬아슬한 노년의 삶을 보듬어 주며, 이들을 젊은 시절로 환류시켜주는 공간이다.

공간조직은 대체로 소탈하고 허름하며, 좁은 골목마다 점포가 상당수다. 꼭 노년만을 위한 점포들도 아니다. 젊은 세대도 얼마든지 이용할 넉넉한 품을 갖췄다.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스레 지혜와 경륜을 엿보고 익힌다면, 지금보다 더 너른 품의 '어른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 송해길 남측 초입 종로에서 송해길로 드는 초입. 보도에 문을 세워 명명한 길을 표현하고 있으며, 오른쪽 붉은 집이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마리서사" 서점 자리.ⓒ 이영천

자본과 도시 권력의 촉수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곳 역시 개발 압력이 상당하다.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낙원상가가 한때 존폐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송해길'은 지역주민들 힘으로 탄생하였다. 모두가 공존하자는 지혜가 담긴 제안이었고, 한 대중문화예술인의 삶과 헌신에 대한 보답이었다. 송해길이 무자비한 자본의 개발 압력으로부터, 이 공간조직을 든든히 지켜내는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 이영천

두 바퀴로 떠나는 서울여행 / 낙원상가

 

 

 

[서울톡톡] 세계 각국 여행서를 펴내는 <론리 플래닛-Seoul>편에는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이 쓰러져 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라고 서울을 묘사했다. 얼마 전 일시에 사라진 종로 피맛골을 떠올리며 그 문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었다. 종로의 낙원상가와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 마트 낙원시장을 알기 전까지는...

 

1960년대 낙원동에서 초고급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상가 아파트가 들어선다. 당시 한 건물 안에 상가와 시장·영화관·아파트가 들어간 복합건물은 당시 시민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재래시장이 지하로 들어간 것도 전에 없던 발상이었다. 건물 아래로 도로가 지나가는 개념도 놀라웠다.

 

1969년 기사에 낙원상가아파트는 삼풍삼원아파트, 외인아파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로 등장한다. 그런 화려한 역사를 지닌 낙원상가는 근래 서울시민들에게는 악기상가로만 알려져 있다. 주머니가 팍팍한 어르신들도 2,000원이면 클래식 무비를 감상할 수 있는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과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지하 마트인 낙원시장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

 

낙원상가가 생겨난 1969년에 문을 연 '허리우드 극장'은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과 함께 종로 극장가를 대표하는 극장이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긴 90년대부터 위기를 겪었다. 단성사는 문을 닫고 피카디리는 재건축을 통해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신했다. 허리우드는 스크린 3개를 갖춘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이런 '한물간' 극장의 잠재력에 주목한 극장주(김은주 대표)는 근처에 인사동, 탑골공원 등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많은데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허리우드'란 추억이 남아있다는 것에 착안, SK케미컬의 지원을 받아 2009년 실버영화관으로 새로이 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기획은 좋았으나 초기엔 손님이 늘지 않았다. 매달 적자가 2,000만 원씩 났다. 김 대표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차를 팔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에 눈높이를 어르신들께 맞추기 시작했다. 영화 상영 전엔 직접 나가 인사를 하고 '실버영화관'을 소개했다. 컴컴한 극장 통로엔 어르신들이 언제든 붙잡고 일어설 수 있게 봉을 설치했다. 옛 영화들이라 잘 안보이던 자막을 극장 맨 뒷자리에서도 잘 보이도록 새롭게 만들고, 고르지 않던 음향도 잘 들리도록 작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주머니가 가벼운 어르신들을 감안해 극장에 음식도 들여올 수 있게 했다. 입소문이 나자 관객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극장의 연평균 객석 점유율은 60~70% 사이로 30~40%에 머무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점유율을 크게 웃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아닌 옛 작품을 틀어주고도 인기몰이를 하는 300석 규모의 이 작은 실버영화관이 우리나라 좌석 점유율 1위의 극장이다. 실버영화관이 어르신들의 호응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경기도 안산에도 실버영화관이 생겨났다. 이에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에 '성공한 국내 첫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1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극장 안 로비로 들어서자 올드팝 'Moon River'가 흘러나오고 있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웠다. 극장 로비엔 고전 영화들의 포스터 외에 어르신들에게 편리한 제품을 만들어 전시 판매하는 중소기업 제품관과 어르신 전용 200원 짜리 커피 자판기가 눈길을 끌었다. 추억의 영화, 다시 보고픈 명작영화를 상영하는 실버영화관은 실버세대들에겐 특별한 공간이다. 단돈 2천 원에 영화를 통해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 조조관객에게는 500원 할인권을 증정하여 4매를 모으면 영화 한 편을 공짜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 마트 낙원시장

 

 

무심코 지나쳤던 낙원상가 지하에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곳에 시장과 식당들이 있다. 상가 건물 지하에 자리한 작은 시장이지만 각종 농수산물 가게, 방앗간, 정육점, 쌀집, 생선가게, 먹거리 식당들까지 일반 시장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래된 낙원상가 지하시장엔 악기수리 장인이 있는가 하면, <이영돈PD의 먹거리 X파일> 방송에서 처음 지정한 '착한식당 1호점'이 있다. 주 메뉴는 청국장인데 밥을 미리 지어놓지 않고 주문할 때마다 새 밥을 지어 고슬고슬하게 먹을 수 있다.

 

 

시장 한쪽에 예닐곱 정도 모여 있는 국수집도 빼놓을 수 없다. 주문과 동시에 삶아 쫄깃한 면발을 자랑하는 잔치국수가 단돈 2,000원! 멸치육수에 유부, 김 가루 고명까지 올려 맛까지 훌륭한 잔치국수는 천하장사가 먹어도 배부를 정도의 양을 자랑한다. 이 가격에 국수를 팔 수 있는 비결은 역시 많이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다.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어 서서 국수를 먹는 사람들도 있단다.

 

머리고기가 가득 들어간 순댓국도 단돈 4,000원이다. 이렇게 맛있고 싸게 파는 식당에서 무한리필이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시장이다. 다른 손님들도 그런 마음인지 다 먹은 국수그릇과 찬그릇을 손수 식당 주방에 반납한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시민들에게 낙원상가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 허리우드 클래식 극장 : 낙원상가 4층(문의 3672-4231~3)
- 교통편 :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
- 누리집 : http://www.bravosilv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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