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으로 말해 ‘백만 년’ 만에 서울 인사동에 나갔다. 또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절친’ 화가의 개인전을 보고자해서다. 집을 나서는데 웬일인지 지난날의 인사동 길이 생각난다. 고서점 통문관과 그 위에 ‘검여’의 서숙이 있던, 몇 십년 전 인사동 정경인지 제법 헤아려봐야 한다. 그러한 장면 다음. 아버지는 인사동에서야 전주합죽선을 살 수 있다며 덕수궁 같은 데에 전시회 있는 날을 같이 잡아 서울나들이를 하였다. 인사동 길은 돌멩이가 불쑥불쑥 솟아 있는 흙길이다. 아버지와의 약속장소인 합죽선 가게까지 처덕거리는 진창길을 여러 번 걸었다. 약속날짜엔 매번 하필 비가 오거나 그치거나 하였다. 그랬던 날이 개화백년 흑백사진 속처럼 아득하다.

진부령 길도 생각난다. 어느 이가 손수 지었다는 그이네 산장만 두어 채던 시절, 친구와 그곳으로 떠난 날도 빗속이었다. 길 내는 공사 도중의 언덕길은 진흙탕이 되어 무릎까지 빠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간지옥에 떨어진 듯 무겁고 무서웠다. 공포지대를 거쳐 산장에 당도하니 깊은 저녁이었다. 산장 안은 습습하고 추웠는데 진창길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장마철 진부령엘 대체 왜 부득부득 갔는지 당시의 절실한 이유가 지금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평생 몇 번인지 모를 진창을 겪었다. 진창인지 모르며 혹은 진창인 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여. 알고 걷는 길과 모르고 걷는 길이 어떻게 다른지, 헤쳐 나와야 한다는 결론은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디딘 마른 땅에서의 몰골은 한심하였다. 마음속 신발은 온통 덕지덕지 붙은 진흙덩이로 무겁고 흙탕물 튄 옷과 얼굴은 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진창을 헤쳐 나온 내가 있었다.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내가.

누구나 진창길을 걷지는 않을 테고 자기만의 진창길 추억을 갖고 있는 이도 있을 터이다. 좌절의 진창이든 방황과 분노의 진창이든 가난의 진창이든 진창길의 행로가 그를 전보다 요만큼이라도 깊고 넓고 나은 사람으로 성숙하게 했을 게다. 탄탄대로였다면 얻지 못했을, 요컨대 인생에서는 어떤 진창길도 버리지 못할 귀한 경험임을 아는 까닭이다. 눈물에서도 꽃이 핀다는데 진창에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백만 년 만에 들른 인사동은 부유해 보이는 화강석 보도와 건물들, 마침 거리에 부려진 관광객과 햇살로 환하게 수런거렸다. 이제 막 밝음 속에 만개하는 커다란 연못 속 연꽃들처럼.

우선덕(소설가)

[스크랩/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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