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 Rebirth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
2020_0318 ▶︎ 2020_0324


나형민_Lentiscape-쥐불_렌티큘러_66×100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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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두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고 영생불사, 불로장생 또는 죽음 이후의 부활의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존재도 영생할 수 없으며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 줌의 흙으로 이루어진 능(陵)이란 삶의 한계이면서도 생과 사의 경계이다. 남양주에는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광릉, 유릉, 홍유릉 등 여러 능묘(陵墓)를 볼 수 있다. 이 왕릉에는 전통적인 수종으로서의 큰 소나무가 가득하여 인위적이지 않은 경건함을 풍긴다. 사철 푸르름을 머금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의 상징이자 본인 작품의 제재로서 자주 활용되기에 왕릉은 때때로 방문하는 좋은 소재처이다.


나형민_붉은 상원(上元)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9


특히 남양주 진건읍 사능리에는 소재로서의 겨울 노송(老松)의 이미지를 다수 채집할 수 있었던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사릉(思陵)이 있다. 그녀는 단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강등 된 후, 다시금 숙종 때(1698) 정순왕후로 복위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왕후에서 노비로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다시금 복권되어 왕후로 되살아난 역사적 터전을 이번 작품의 주된 소재이자 재생의 함의를 담은 요소로 활용하였다. 재생(再生)이란 보통'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rebirth)'는 되살아남의 뜻으로 부활의 의미가 담겨있다. 사릉의 정순왕후의 육신은 비록 물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후 다시금 단종 복위와 더불어 재생의 지평으로 부활하였듯이 재생이란'의미 또는 가치의 되찾음, 되돌아감'으로서 복귀의 뜻이 담겨있다.


나형민_명승(名勝)-울산바위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8


그리고 재생에는 마치 보름달이 가득 찼다가 사라지고 이내 다시 채워지듯이 순환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삶과 죽음, 내세와 외세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 또는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라고 사유하였다. 따라서 능(陵)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이(this) 세계에서 저(that) 세계로 또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덕 앞 정자각(丁字閣)의 문은 두 세계의 사이에서 항상 열려 있다.


나형민_재생의 언덕_한지에 채색_135×190cm_2020


나형민_재생의 지평_한지에 채색_135×190cm_2020



작품 지평에 자주 등장하는 불꽃으로서의 쥐불, 들불도 태움이라는 소멸을 통해 다시금 소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대보름날의 쥐불놀이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태워 외적 나쁜 것으로서의 들쥐, 해충, 잡초 등과 내적 나쁜 것으로서의 액운을 소멸시키고, 그 재가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과 운명이 시작되듯이 재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재생이란 소멸과 생성, 탄생과 죽음의 순환적 역사의 정점으로서의 문(門),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평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불꽃, 능, 보름달 등등의 주된 작품제재는 소멸과 파괴의 외적 이미지를 넘어 생명을 잉태하는 쥐불놀이와 같이 '소멸을 통한 정화'와 그로 인한 다시 태어남(再生)의 함의가 있다.



나형민_흔들리는 지평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9


나형민_지평 위의 허수아비_한지에 채색_84×260cm_2018



이번 전시에서도 순환적 시공간으로서의 재생의 의미를 랜티큘러를 통한 풍경작품인 랜티스케이프(Lentiscape)를 통해 담고자 하였다. 랜티스케이프란 움직임을 통한 다원공간의 변환 또는 2차원의 평면 속의 심도 있는 공간감 표현으로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시각적 일루전을 새롭게 구현한 시도이다.'랜티스케이프(Lentiscape)'는 랜티큘러(Lenticular)와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합성한 본인만의 조어(造語)로서 최근 작업하는 지평의 그림을 동양화적인 랜티큘러로 실험한 작품 유형을 통칭한다. 따라서 작품명 랜티스케이프는 랜티큘러를 통해 평면적이고 고정된 시점의 풍경화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보여왔던 다시점, 이동시점의 다양한 시각법을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지평 표현을 선보이고자 하는 의의가 있다. ■ 나형민



Vol.20200318a |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



地平_Beyond the Horizon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

 

 2013_1211 ▶ 2014_0228

 

나형민_Beyond the Horizon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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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211_수요일_06:00pm_공아트스페이스

 

2013_1211 ▶ 2013_1217

관람시간 / 10:00am~07:00pm

 

공아트스페이스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21번지 1,2층Tel. +82.2.730.1144/735.9938

www.gongartspace.com

 

 

2014_0102 ▶ 2014_0228

관람시간 / 07:00am~09:00pm

호암교수회관 갤러리HOAM FACULTY HOUSE GALLERY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 239-1번지 1,2층Tel. +82.2.880.0300

www.hoam.ac.kr

 

 

지평너머1.빠름이 갑(甲)인 세상. 세상 여기저기서 빠름을 외친다. 빠름이 넘치는 사회. 차분한 호흡으로 세상 둘레를 둘러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토너먼트(tournament)를 방불케 하는 무한경쟁시대다. 자기승리와 성취, 만족을 위해 달리는 현대인들의 직진본능이 가히 살벌하다. 쟁취를 향한 광속기류에 편승하려는 시류본능은 주위를 살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두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타적 인간과 미덕을 찾아보기 힘든, 과연 사나운 현실이다. ● 나형민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태 속에 자의반 타의반 잊고 살았던 세상 시원(始原)의 문제와 산다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세상 시작으로부터 현재까지 세상이 인간에게 허락한 가능성과 한계를 돌아본다.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이후의 세상을 그려본다. 나아가 풍요의 시대, 점점 커져만 가는 꿈과 현실의 괴리, 현세를 살아내는 관성적 방식과 태도를 지적한다. 작금의 현실좌표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현실인식에 따른 인간 사유(思惟)와 삶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형민_I see a new horizon_한지에 채색_135×175cm_2013
 

 

당대현실은 물론, 자신의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하려는 자기다짐이요, 곤궁한 현실지평 너머의 가능한 비전과 희망태를 한껏 펼쳐 놓은 열린 인식지평이다. 자기 자신과 주위로 시선을 돌리고 공존과 느림의 미덕을 되찾아나서는 지성적 작업지평이다. 이러한 나형민의 작업은 빠르게 변모하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인식지형과 동시대 삶의 풍경에 대한 현실인식을 총체적으로 환기시키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 다소 현세구복적, 계몽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나형민의 작업은 현실적 이상의 실현 불가능함을 경험적으로 반추하면서 또 다른 세상, 이를테면 내세에서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다소 종교적, 초현실적 기운도 담지하고 있다. 현세에서의 상흔을 위로하고 현세 너머 다른 세상으로의 비상과 이탈동기를 장려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러한 꿈과 정한의 세계를 그리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상실을 위로하듯 토닥이고 있다. 나아가 다른 세상으로의 무조건적 잍탈과 이탈을 꿈꾸는 현대인의 과도한 욕망구조를 들춰내고 있다. 동시에 각기 다른 내적, 외적 동인에 의해 속앓이를 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상처를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지평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나형민_Lies the Rising Sun_한지에 채색_135×175cm_2013
 

 

2.이렇듯 분명한 당대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되 피안의 세계가 가능함을 지향하는 나형민의 인식지평은 개인적인 이슈를 넘어 서사적인 차원의 그것도 건드리고 있다. 충청남도 강경지역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사(校舍), 연못에 비친 경회루의 모습, 일제시대에 건립된 건물의 정면을 부분 발췌해서 화면가득 얹어 놓은 작업들은 작금의 우리네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을 중첩시키고 있다.「Waiting a beautiful day」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먼저 떠오르는 참한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는 보편적 시골 교사 전경을 담았다. 초등생들의 꿈이 모락모락 피어나던 시절과 당시의 꿈을 강렬한 형광물감을 사용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낮이 아닌 밤풍경을 통해 그들의 꿈과 바람, 희망,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한층 강조했다. 꿈을 키워나가던 교실, 운동장, 꿈이 영글던 하늘이 대지와 만났다. 지난 시절 이야기, 학교생활과 얽힌 가족사, 사회사, 기억의 총체로서의 자연과 세상풍경을 담았다. 충남 강경지역을 답사하며 운명처럼 만난 장면이다. 소박한 초등학교 건물과 초등학교라는 순수형식과 제도, 대학이라는 냉엄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현실인식이 뜨겁게 조우했다. 초등학교를 담은 작업 이외에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가게건물의 정면표정을 배경으로 한 문화유산적 기운이 배어 있는「Lies the rising sun」도 비슷한 느낌을 전달한다. ●「Good bye to things that bore me」에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등장한다. 비행기부터 허공에 몸을 날린다. 왜곡된 성취동기로 무장한 우리네 슬픈 자화상, 혹은 슈퍼맨을 강요하는 냉정한 사회상이기도 하다. 현실이상(現實理想)의 객기와 인간의 나약한 광기를 과장했다. 한편으론 억압되고 제한된 닫힌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순수 증후군으로도 읽혀진다. 또는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도 보인다. 자연스런 이행이 아니라, 강제이행, 강요된 이행이다. 비행기에 새긴 'G-BYE'(good-bye)처럼, 어쩌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 저 멀리 다른 희망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은, 뛰어들고 싶은 희망풍경일지도 모른다. 슈퍼맨이 되고 싶은 과도한 욕망구조, 슈퍼맨을 강요하는, 슈퍼맨이 되어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슬픈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Life on the Horizon」에서는 하늘을 배경으로 기암(奇巖)과 대나무를 중첩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꼿꼿한 대나무와 오랜 풍상(風霜)을 겪은 늙은 바위가 만난 단단한 풍경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李霆)의 대나무를 떠올리며 그렸다. 하늘과 구름은 지극히 맑고 투명하여 이들은 특히 대나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주지하다시피 예로부터 대나무는 군자의 절개와 굳은 의지를 상징한다. 세파와 시류에 쉽게 흔들리는, 이른바 학식 있는 자의 부끄러운 처신을 돌아보게 한다.

 

 

 

 

나형민_Waiting a Beautiful Day_한지에 채색_130×320cm_2013
 

 

대나무에 이어 나형민의 하늘 그림에는 민들레 등 잡다한 풀과 나무가 등장한다. 화면 속 대나무가 그냥 대나무가 아니듯 풀은 단순 풀이 아니요, 하늘 또한 그냥 하늘이 아니다. 땅도 그러하다. 나형민은 자연과 사회의 현상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깊은 울림과 상처를 읽어낸다. 수도권 외곽으로 이사한 후,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 풍경을 보다 가까이 목도할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기존 인식과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보는 눈이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변함없는 푸르름, 대나무, 민들레, 묵묵한 대지 등은 더 이상 단순 자연이 아니었다. 자연의 논리와 분명하게 대비되는 세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답사 등의 이유로 자주 찾았던 강화들녘은 나형민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맸다. 잡초들이 세파에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황금물결이 사라진 스산한 강화들녘을 지키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풀과 잡초, 민들레, 질경이 등은 민초들이 살아남은 힘과 증거에 다름 아니었다. 힘 있게 버티고 있는 모습은 마른대지의 내적 일렁임과 귀를 간질이는 속삭임, 그 속에 잠복되어 있는 존재의 아우성으로 다가왔다. 마른대지 이면의 촉촉한 내면풍경, 그것은 희망풍경이었다. 강화들녘은 또 다른 모색으로서의 회화의 가능성을 곱씹는 계기가 되었다. ● 들불이 일고 있는 작업,「Rebirth」는 세상이 창조될 당시의 느낌을 담으려한 것으로 보인다. 탄생과 창조의 느낌, 역사적 인류시원의 기운을 감각적으로 포치했다. 전통적으로 화면 속 '불'은 소멸, 생성, 창조의 기운, 흐름, 울림의 동인이자 탄생의 동인이다. 상단의 벌거벗은 여성과 함께 탄생, 생명의 순수기운, 종교적, 신화적, 설화적 시원을 강조하고 나타내보려는 나형민의 새로운 회화적 시도로 이해된다.

 

 

 

나형민_I see a new horizon_한지에 채색_135×175cm_2013
 

 

나형민의 풍경은 한쪽으로 쏠려 있는 대나무나 풀 너머에 어떤 사건이 있을 것 같은 심리풍경이다. 풍경은 풍경인데 사실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것을 지시하는 서양의 '랜드 스케이프(Landscape)'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만이 공감하는 전래적, 정서적 무엇으로서의 풍경, 이를테면 '마인드 스케이프(Mindscape)라 하겠다. 잦은 붓질로 뭉치듯 중첩해낸 그의 색면은 하늘의 투명함과 대지의 견고함을 강조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살아낸 민초들 의지의 견고함과 튼튼함을 상기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지지체인 장지를 배접한 화판도 제법 단단하고 튼튼한 것으로, 또 하나의 대지이자 마음을 의지하는 든든한 지지체로 존재한다. ● 멀리도 필요 없다. 도심의 산이던 외곽의 산이던, 산을 찾을 때면 흡사 낙원(樂園)을 연상시키는 절경을 만나곤 한다. 산세와 비경을 자랑하는 산의 속살, 혹은 비류직하의 험준한 암벽 등과 같이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등장한다.「Irony」는 세상 속 낙원과 피안(彼岸)을 꿈꾸면서도 사람이 기필코 자리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세태를 꼬집었다. 낙원을 바라면서도 결코 낙원을 허락하지 않는 모순된 현실. 편익시설 공사라든가, 건강을 빙자해서 자연을 기필코 정복하려는 일그러진 욕망, 자연의 자연스런 질서에 개입하여 그들 고유의 존재율을 뒤흔드는 부끄러운 현실을 지적했다. ● 이렇듯 나형민의 작업은 하늘을 주된 배경으로 비롯한다. 지난 하늘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그가 주목하고 보여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덜어내고 버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워내는 것이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의 제작과정을 스톱모션애니메이션으로 만든「공(空)」은 나형민의 작업지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욕망은 공허하고 덧없는 것임을, 비어있는 충만함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지난 작업이 무언가를 화면 위에 물리적으로 잔뜩 담아내려 했다면, 이번 신작들은 그들을 화면 너머로 던져 버리는 동시에 보는 이의 심상구조에 맡겨두고 있다. 하늘이 시원스레 자리하고 있는 이유다. 셀룰리안 블루(Cerulean Blue)와 라이트 블루(Light Blue)가 빚어낸 경쾌하고 상쾌한 화면이다. 물리적으로 차지하는 면적은 적지만, 단단하고 깊은 맛을 주는 대지의 지지를 받아 화면 상단에 가득 자리하고 있다. 신작 대부분이 세로형 화면이나 화면의 판형을 구분하지 않고 하늘이 가득하다.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러나 요즘 보기 드문 하늘 그림이다. 보는 이의 시선은 하늘을 쫓아 올라가거나 땅과 풀을 따라 들고 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그리움을 따라 몸과 마음을 놀릴 것이다.

 

 

 

나형민_Life on the Horizon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3
 

 

3. 나형민의 푸른 하늘과 검초록의 대지는 시대의 희망과 우울을 반영하고 있다. 희망을 강조하고 우울을 위로한다. 암울한 현실과 시대의 우울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그의 지평작업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끝이 없을 대립과 반목의 평행선, 저마다의 극명한 입장 차이와 대립양상을 약화, 무화시키거나 유연한 접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회화적 바람으로 보인다. 화면에는 실로 수많은 터치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작가가 가슴으로 받아들인 허공과 대지를 울리는 수많은 사연들의 충돌과 메아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공명과 울림으로 화면 도처에서 진동하고 있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합과 희망의 세상을 펼쳐 보이려는 애절한 몸짓으로 보인다. 반목과 대립을 지양하고 다른 차원의 생산적 가능성과 활동을 지향하려는 것이다. 별로 웃을 일 없는 세태에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현실 너머의 희망태를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 속에 담아내는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일까. 나형민은 그것이 그리 멀거나, 불가능하거나,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나형민의 이번 작업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을 통해 현실너머의 지평, 지평너머의 또다른 세상지평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과 현실지평의 다양한 물리적 지형과 긴장의 기운을 회화적으로 담아내기 보다는 지평너머의 희망기운을 담고자 했다. 지평너머의 기운을 불러내고자 했다. 지평너머 기운의 존재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또한 이 땅에 살다 하늘로 사라진 누군가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자 했다. 지평과 그 경계를 진동하는 이들 존재의 기운과 울림을 담아내고자 했다.「독야청청도(獨也靑靑圖)」등과 같은 대가의 작품에서 만났던 기운과 이미지를 부분 발췌해서 하늘과 결합시키기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년 사계(四季)를 관통하며 피어나는 전통과 삶의 살아 숨 쉬는 기운을 오늘에 되새기고 이렇듯 모든 이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 나형민의 작업은 일거에 뒤집을 수 없는 자연에서의 변혁기운을 존중하되 자연과 전통에 대한 관습적 담론, 일방적인 기성의 전래가치, 습관적으로 따라가는 일상의 궤적, 유예된 현재로서의 미래인식을 시나브로 뒤집어보자는 권면(勸勉)이다. 스스로의 사고지평과 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과 타율, 혹은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 기성의 왜곡된 가치에 대한 인식 전환을 확대해나가는 개혁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현재로서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인식의 주체적, 미래적 지평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전통, 현실과 현재, 개발과 보존 등의 현실갈등과 인식의 충돌을 시각적으로 고발하기보다는 이들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상대적 인식지평의 열림과 열린 구조로서의 인식의 개방성을 하늘과 땅이 공존하고 있는 형식으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화는 경직된, 부동의 대지와 하늘이 아니라 그것이 병존하고 있는 현실, 공존의 가능태를 제시하고 있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현재의 지평에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나형민_Rebirth_한지에 채색_135×190cm_2013
 

 

나형민의 지평은 나무, 하늘, 풀 등이 대립하듯 어우러져 있으나, 칼칼하면서도 자유롭고 유기적인 느낌이 살아 있는 시원한 화면이다. 세상 모두를 향해 열려 있음이다.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중심으로 넉넉히 주조하고 그 위에 구름과 표지판, 대보름달, 기암괴석 등을 포치시켰다. 특히 화면 하단부에 작은 부분이지만 일정한 대지를 부여하고 그 위에 이런저런 풀, 나무, 건물 등을 적절하게 조율했다. 채우기보다는 비워내듯 소수의 색으로 주조했다. 다채롭고 현란한 세상의 삼라만상을 가능한 모든 색으로 너저분하게 풀어 놓기보다는 몇몇 색으로 함축했다. 형상이 덜어지고 색이 덜해진 그의 화면은 그리기보다는 비워내고 있다. 참을성 많은 자연과 욕심 많은 인간 상호관계의 허와 실을 돌아보게 한다. ● 도심외곽, 이른바 수도권 지역엔 어김없이 대규모 단위의 아파트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고 있다. 풍광이 좋은 곳은 더욱 그러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방적 개발에 밀려 들녘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삶이 부딪히며 빚어낸 살가운 표정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나형민은 버려진 풍경, 밀려나는 풍경을 잡아두려는 듯 특유의 방식으로 비워내고 담아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자연스런 지형과 풍경, 자연그대로의 느낌을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들이 공존하는 해법은 없는 것일까. 변화와 빠름을 앞 다투어 강조하고 서구적, 일방적 개발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풍경 속에서 세파와 풍상을 겪으며 이어져온 자연스런 동양적 느낌의 풍속, 풍경을 언제까지 끄집어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박천남

 

     

Vol.20131211c |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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