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신문 이름이 예술문화신문으로 바뀌고, 격 주간에서 주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는 윤범모 미술평론가가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지난 19,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시상식에서 이은영 발행인께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시상식이 끝난 후, 프레스센터 지하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문화대상 선정위원이신 안숙선, 이애주선생,

수상자 김병기화백, 유수정 명창, 문병남, 최광일씨, 그리고 윤범모교수, 화가 손연칠씨 등 여러 명이 함께했다.


  

  



그 날은 특별대상을 수상한 김병기 화백 옆에서 소곡주를 마실 수 있는 횡재도 했다.

처음엔 상 준다고 투덜댔지만, 상이 아니었다면 어디 감히 이런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102세이신 우리나라 최고령의 현역작가 김병기선생 말씀 들으며, 선생의 따뜻한 손을 잡아 기까지 충전시켰다.

2-3분 정도 잡았는데도, 2-3년은 더 버틸 것 같은 감이 들었다.

그동안 윤범모교수의 인터뷰 기사로 한겨레신문에 일 년 동안 연재한 한 세기를 그리다를 통해

100년간의 한국 문화사를 증언한 김 화백께서 특별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맞은 편에는 평소 좋아하는 안숙선명창께서 앉았는데, 예년에 비해 매우 수척해 보였다.

어디 몸이 불편한지 걱정스러웠으나, 얼쑤~라고 추임세 넣는걸 보니 아직 기가 펄펄 살아있었다.



 


춤꾼 이애주선생은 87년도 민주항쟁 때부터 여러 차례 사진도 찍었고 각종 행사장에서도 자주 만났으나,

그날은 모처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콧수염 김영수씨와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진집 제작에 사진모델이 된 이애주선생께서 삼천만원을 냈다는 뜻밖의 이야기도 들었다.

새삼 김영수씨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살아생전 성질머리도 지랄 같았지만, 마무리까지 잘 못한 것이다.

평생 작업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안겨 사장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윤범모교수 등 몇 분이 이차를 가자지만, 지레 겁먹고 삼십육계 줄행랑쳤다.

끝장을 보는 두 분의 주량에 두 손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나누어, 한국예술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정론지로 거듭나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국내 회고전 앞둔 재미화가 김병기
70에 첫 전람회, 80에 파리서 활동
평양·서울 … 마음 속 고향 추상화로
“난 장거리 선수, 지금이 제일 행복”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파트에 혼자 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역 최고령 화가 김병기(98).

회고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우리는 뭘 하든 철저하게 살아야 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100살을 바라보는 노화가는 불쑥 찾아온 팔순 제자의 벗겨진 이마를 보며 “어째 주름살이 하나도 없어? 상화 몇 살이야?”하며 웃었다.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헐리우드의 아파트, 생존 최고령 현역 화가 김병기(98)의 집이다. 제자인 화가 정상화(82)가 스승의 질문에 쩔쩔매며 “여든 둘입니다”하자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좋은 나이야, 아주. 내가 70에 첫 전람회를 하고 80에 파리에 나가 있었어. 80대에 중요한 일이 많았지.”

 한국 단색화 전시를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찾은 정상화는 타계한 줄로만 알았던 스승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이곳을 찾았다. 두 사람은 1953년 피난지 부산의 서울대 미대에서 학생과 예술론 강사로 만났다.

제자 정상화

 

 

김병기의 아버지는 고희동·김관호에 이은 서양화가 1세대 김찬영(1893∼1960)이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쿄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이중섭(1916~56)과 도쿄 문화학원 동기이며,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김환기(1913∼74)와 함께 활동했다. 해방공간에서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월남 후 전쟁 중에는 종군화가단 부단장을 지냈다. 피난지 부산에서 ‘피카소와의 결별’(1953)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본인은 “내가 감투쓰려고 미술한 게 아냐, 평론가되려고 그림 그린 것도 아냐. 그래서 미국 건너와서는 글 하나도 안 썼어”라고 일축한다.

 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활동하면서 그 길로 미국에 눌러앉았다. 초반엔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후 뉴욕주 사라토가 스프링스에서 제도사로 일하며 기계·건물 도면을 그려 생활하고 밤엔 그림을 그렸다. “나는 신기루처럼 없어진 걸로 돼 있어. 증발된 사나이야. 동양 사람 하나도 없는 마을에서 22년을 살았어.” 도미 이후 국내에 소식이 끊긴 그는 86년 가나아트에서의 전시로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동결된’ 그의 기억은 근대미술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됐다.

 뉴욕서 지내던 그를 아들 내외가 2006년 로스앤젤레스로 모셔왔다. “예술가는 시아버지가 될 수 없다”며 한사코 따로 지내는 그는 거실 한복판의 TV를 가리키며 “옛날 영화를 보다가 새벽 1∼2시쯤 자고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 그림 그린다”고 했다. 창가의 작업대에는 이젤, 물감 튜브, 서울서 열 전시에 보낼 완성작들이 쌓여 있었다. 김환기와 함께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꼽히는 그는 황톳빛·붉은빛 색면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화면을 분할한다. 제도사로 일하며 수도 없이 그었을 선이다. “내 그림은 추상적 화면에 자로 그은 건축적 선이라는 특징을 띠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 그 선은 화구 옆 창틀, 혹은 오랜 세월 그를 지탱한 신앙 속 십자가를 닮았다.

 그가 그리는 것은 사철 여름인 LA의 풍광이 아니다. 추상화한 고향이다. 서울·평양·도쿄·뉴욕 등 그가 돌고 돌았던 곳이 담겼다. 도쿄 유학 중 서울을 오가며 보기만 해도 눈물 나던 북한산·인왕산도 그렸다.

 “과거엔 서울과 평양이 남북의 양대 도시였다. 서울 사람들이 형태미를 중시하는 반면 평양 태생인 나는 그 형태를 낳게 한 리얼리티를 중시한다”며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고향 북한도 사랑한다. (허공에 손가락으로) 대동강이 이렇게 흐르고 저기 모란봉이 있고 대성산이 있다. 통일이 돼야겠는데 잘 될 거 같지 않고, 이런 상태로 통일이 돼도 상당히 곤란하다”고 말했다.

 제자의 방문에 “꿈같은 일”이라며 감격하던 스승은 “120세까지도 사시겠다”는 제자의 덕담에 “그럼 상화는 백살이 되누만. 우린 장거리 선수에요”라고 답했다. “난 실존주의자. 지금이 제일 행복하며, 매일매일 힘을 얻는다. 우리는 뭘 하든 철저하게 살아야 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그는 오는 12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다. 98세에 미술관서는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이다.  

[중앙일보] 로스앤젤레스=권근영 기자

◆김병기=1916년 평양 출생. 광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가와바타(川端)화학교와 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 귀국 후 1945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하다 47년 월남. 서울대에서 예술론·회화실기 강의(1953∼58). 64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65년 미국으로 이민 후 뉴욕주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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