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치욕의 역사다.

그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새삼 미군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동안 양공주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 한 참 잘 못되어서다.

그들을 비하하는 양갈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시절에는 허영에 들떠 양놈이나 찾아 나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이나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같은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한국격동50사진전에 나온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며,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지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게 되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양공주는 그래도 점잖은 말이고, 양갈보,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쥬스 걸 등 별의 별 호칭이 다 있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유곽이었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도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단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사진 : 1965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격동한국50사진집에서 옮겼다.

: 조문호












사진가 류경선씨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중대사진동문들이 마련한 일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6일 인사동 ‘경인미술관’3전시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사진가 강운구, 최인진, 최재영, 김녕만, 양재문, 차정환, 김종호, 이평수, 고 헌,

노연덕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된 사진들과 그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돌아보니 지난날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아마 ‘사진협회’ 이사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늘 해왔다.

왜 쓸데없는 감투에 그리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필자도 당시 ‘사협’을 개혁하려는 욕심에 두 차례에 걸쳐 이사장선거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이명동선생을 후보로 모셨고, 두 번째는 류경선씨를 도왔는데, 두 분 모두 백현기씨의 치밀한 조직에 밀려났다.


이명동선생이야 선거비용을 주변에서 조달해 모셨으나, 류경선씨는 자기 돈 쓰 가며 집착했다.

그는 낙선해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이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사장에 당선되었지만 ‘사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출마의 변으로 변화와 창조란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고 실추된 한사전을 새롭게 부활시키겠다고 내 세웠지만, 조직에 둘러싸여 못했다.

결국 임기 중에 병석에 드러누웠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겠는가?

그 이사장 자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인데,

전임이었던 문선호씨와 백현기씨도 이사장자리로 수명을 단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다툼과 공모전에 따른 이권 배분 등, 숱한 비리 한 복판에서 처신하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류경선교수는 사진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사진인생을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줄곧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해 왔다.

정년을 한 해 앞두고는 1톤 트럭을 개조해 0,5mm 구멍을 뚫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전국 해변을 돌며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흐릿한 안경너머로 떠오르는 옛 그림자를 회상하는 듯한 ‘바다, 그 기억을 그리다’전이 그의 마지막 전시였다.


사진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한 평생을 사진에 바친 그의 흔적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그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정년퇴임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사협’ 이사장에 머리 싸 맬 것이 아니라 작품활동에 혼신을 다했어야 했다.

명예롭지 못한 경력 한 줄에 모든 걸 바친 고인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파 드리는 말이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이승에서 못 다한 모든 걸 성취하길 기원한다.

사진,글 /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라져가는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한 김기찬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께서 10주기를 맞는 지난 8월 27일,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란 제목의 책을 펴내며,

중학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김기찬선생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미망인 최경자여사를 비롯하여 사진가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윤한수씨, ‘눈빛’ 편집장 안미숙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등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과 글을 쓴 필자들이 모였다.

안미숙편집장은 인사말에서 “이 책을 지궁스럽게 만들었다”며 잘 쓰지 않는 말부터 끄집어냈다.

이번에 나온 사진 에세이에 김기찬선생께서 ‘지궁스럽다’는 말을 썼는데,

그 뜻이 책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윤한수씨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데가 있다“로 찍혀 나왔다.

정말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두 내외는 김기찬선생을 지극하다 못해 끔찍히도 모셔왔다.

한정식선생께서도 그의 지극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규상씨가 “지난 번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사진집이 재판되었을 때,
고인의 무덤까지 사진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사진에세이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제본소에서 책 나오기를 안절부절 기다리던 이규상씨가, 뒤늦게 책을 안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내 놓은 책들은 금방 구워낸 붕어빵처럼 따끈따끈했다.

10주기에 맞추어 선보이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의 지극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이야 김기찬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싹터 온 인간적 정리도 한 몫 한 듯하다.

그 분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진을 위해 그만큼 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뻔히 안 팔릴 줄 알면서도 기록적 가치만 있으면 무조건 출판하는 그의 뚝심에 모두들 걱정이 대단하지만.

그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많이 사 보는 방법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이지만...

 

 

 

책에 실린 김기찬선생의 생전 모습 / 한정식선생께서 찍었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주옥같은 사진과 글들이 마치 당시의 상황과 애잔한 마음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가 한정식선생과 전민조씨는 평소에 지켜 보았던 작가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적었고,

사진가이자 건축가인 윤한수씨는 선생께서 다녔던 골목 골목을 답사하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다.

사회학교수 김호기씨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 역사학교수 이광수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사진책도서관’대표 최종규씨 등 여러 필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김기찬선생의 작가론과 골목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부산대 사회학 교수 윤일성씨의 ‘도시 빈곤에 대한 두가지 시선’

-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연구-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를 하찮게 여기는, 서양귀신 씬 사진가들은 꼭 읽어야 한다.

“최민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작가이고 김기찬은 ‘따사로운 온기’의 작가이다.”
그 논문에 쓰인 이 한마디가 양대 다큐멘터리 대가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각설하고, 이야기를 다시 추모 만찬장으로 돌린다.
추모사를 겸한 이규상씨의 인사말과 이완교선생의 추억담 등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김기찬선생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토록 골목을 사랑한 분이 어디 있었는가?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음식은 얼마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너무 황송스러웠다.

고맙게도 누가 몰래 밥값을 냈으나  계산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컨데 황규태선생께서 내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이차로 자리를 옮긴 맥주집에는 이규상, 안미숙 내외와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임종업씨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한 잔 마신김에 좀 과음했다.

뒤늦게 '한겨레신문'의 김봉규씨가 온 것으로 기억되나 카메라에 그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 취했나?
아무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기개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2015 북경국제사진제’에 참가할 한국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첫 미팅이
지난 18일 오후3시 인사동 ‘귀천’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사진가들의 참여를 추진한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를 비롯하여
기획자인 류은규씨, 다큐사진가 엄상빈, 김보섭, 조문호, 임재천씨 등
모두 6명이 모였다.

 

오는 10월24일부터 11월1일까지 열리는 축제에 다섯명의 국내 작가가 참여하게 되는데,

각각 20여점씩 출품하게 된다고 한다.

류은규씨의 진행 상황을 전해 듣고, 준비할 것들을 챙기기도 했다.
참가할 사진가들의 소통을 위해 엄상빈씨가 통역원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모임이 끝난 후, 인사동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대낯부터 술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술집으로 내가 이끌어 놓고, 술값은 엄상빈씨가 내 버렸다.
그 술값이 만만 찮을텐데...

사진 : 류은규, 조문호 / 글 : 조문호

 

 

 

 

 

 





 

프로젝트 ‘장에 가자2’ 정선전시를 어렵사리 끝 마쳤다.
27일간 서울과 정선을 오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일반인들의 참여를 확대하기에는 한계를 느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전시 문화에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하는 큰 숙제만 남긴 셈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지역 사진인의 비협조적인 자세다.
주최 측인 정선문화원에서 정선군청 홈페이지에 ‘장에 가자’ 초상사진 퍼포먼서 안내를 했는데,

그곳에다 비난하는 댓글을 올린 것이다.
정선 사진의 대가로 자처하는 스스로의 존재를 몰라주는데 따른 불만인지 모르지만,
전시는 보지도 않은 채,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와 실소를 머금게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협회원’이란 과대망상적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정선문화원의 전시작가란 말에 공식 인증된 작가 타이틀을 공개하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사진작가란 말이긴 하지만, 사협 회원이 아니니 촬영기사라는 것이고,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면 자기같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논지였다.
한 사진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우물 안 개구리 격인 일고의 가치 없는 글이었으나,

아마추어 공룡 집단 '한국사진작가협회'의 병폐를 보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었다.
회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교육은 뒷전으로 한 채,

숱한 공모전으로 회원들과 감투 늘리기에만 급급하더니, 이제 그 한계점에 달한 것 같았다.

나도 20여년 전 ‘한국사협’이라는 회보 편집장으로 그 조직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공모전비리는 일상이었고, 조직의 패거리적 병폐에 한계를 느꼈다.

그 당시 이사장이었던 고 문선호씨가 나의 ‘87민주항쟁’전시 추진에 제동을 건 적도 있었다.

사진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격려, 지원은 못할망정 전시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직서를 내 던지고 강행했지만, 사협이란 단체가 본래 힘 있는 정치에 아부나 하는 그런 어용단체인 것이다.

그 이후 사진과 교수들을 비롯하여 작가의식이 투철한 사진가들은 모두 사협을 탈퇴하여

‘민족사진가회’란 새로운 단체에 영입되었으나, 그 또한 사진가 김영수씨의 독주로 회원들의 결집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사실 작가들에게 단체는 중요치 않다. 공익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작가 개인으로서는 제약에 불가할 뿐이다.

‘예술인총연합회’ 산하 각 예술단체의 창립 배경도 결국은 부패 정권이 예술가들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계 내막도 모른 채, ‘사진작가증’이라 적은 전대미문의 회원증 하나에 현혹되어 

가입한 다수의 피해자(사협회원)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그들을 공모사진이나 형식사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진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이 것 저 것 고민거리만 안겨준 정선 전시였다.

글 / 조문호

-아래는 군청 홈페이지에 올린 전석원씨의 글-

“정선문화원에서 시행하는 전시사업은 작가가 아니라
촬영기사라고 표기해야 맞습니다
아무나 같다가 붙이는 작가타이틀 말고
국가에서 공식 인증된 작가타이틀을 공개 해주시면,
어떤 공인단체에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의문이 가서 묻고 싶습니다.
정선에 포크레인 공사를 정선문화원에서 무료로 다 해준다고 하면
정선에 포크레인 하시는 분들 포크레인 정선문화원에다가 다 세워놓고 항의 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문화 홍보와 마케팅이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추락시키면서까지 그렇게 절박하게 정선문화원을 운영 하는 것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정선문화원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제데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디지털아트분과 부위원장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강원도지회 사업간사
강원포토 대표 전석원 “

 

 



-정영신씨가 찍은 아래 사진들은, 전시가 끝나는 지난 15일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이다.-

대구에서 온 양기원씨, 부산에서 온 최종렬씨, 서울에서 온 이도영, 심재현, 이명화, 송민준, 손영주, 이해인, 박찬의씨 정선의 이하윤, 이진순씨, 그리고 무지개빛 청개구리라는 이은영, 엄세빈, 박상우, 박준우, 박용현, 전도연, 송영은, 김민지, 박종선, 김봉섭, 신윤택, 정우준, 임나경 학생 등

 

 

 

 

 

 

 

 

 

 

 

 

 





 

 

지난 9일 벼루고 벼루던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키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선생님께서 한 번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날짜를 잡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렸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선생님 핸드폰은 잘 연결되지 않는 고물이라 내심 걱정되었다.
네 번째 전화에서 어렵사리 연결되어 아내와 함께 부랴부랴 약수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마중 나온 선생님보다 밝게 웃으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더 좋았다.
끼니마다 선생님께서 쑨 죽으로 연명해 그런지 초채한 모습이긴 하나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셨다.
“하도 죽을 많이 끓여 이젠 죽 박사가 됐다”며 선생님도 웃으셨다.

탁자 위에는 이번에 나온 “사진예술“8월호가 놓여 있었다.
최민식선생 사진상 논란을 대충 아실 것 같아 선생님 생각을 여쭈어 보았다.
"1968년3월1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든 개인사진집이 최민식 휴먼1집이다"며
말문을 여셨다.

선생께서 추천해 동아일보에서 그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정신이나 사진들이 좋아 만들었는데, 그 일로 중앙정보부까지 끌려 같다고 한다.
거지일색으로 찍은 사진 책을 만든 것이 북한의 사주를 받지 않았냐는 것인데,
동아일보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하셨단다.
요즘 젊은 사진가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비하하는 것은 두고 꺼낸 말씀이시다.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의 시대적 배경부터 생각해야 한다며,
평생을 몸 바쳐 일군 업적을 얄팍한 논리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맥에 의한 수상자 결정은 사람들이 정에 약해 그런 것이지만,
이젠 바뀔 때도 되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서둘러 일어 나셨다.

“요 앞에 잘 하는 도가니탕 집이 있으니 가자”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러 왔으니 선생님께서 계산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씰데없는 소리’라며 말을 자르신다.
가게 가서는 주인더러 ‘이 사람한테 돈 받으면 다시 안 온다’며 엄포까지 놓으신다.

자리를 끝낸 후 댁까지 모셔 드리겠다는 말도 일거에 뭉게버리고,
지하철 에리베이터까지 따라 내려 오셔서 민망스럽게 만든다.
“선생님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저도 마누라 아프면 선생님께 죽 쑤는 거 배우러 올게요.”

사진, 글 / 조문호

 

 

 

 

 

 

 

 

 

 


 

 

시세이선생의 ‘격동한국 50년’사진전에서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개막식이 끝나고 헤어지기 아쉬워, 몇몇 분들이 시세이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인근 맥주 집을 찾았다.

 

자리에 함께한 분으로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전민조, 김보섭, 이기명, 이규상, 안미숙, 정영신, 김남진,

안해룡, 이상엽, 김지연, 이상봉, 김승혜, 조성호, 견석기, 남 준, 곽명우씨 등 20명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모자를 돌려 술값을 걷을 작정이었으나,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에 시세이선생께서

먼저 계산하고 일어 나셨다. 가난한 원로사진가의 주머니를 털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후 대부분 자리를 떠났으나 김보섭, 안해룡, 김남진, 이상엽, 조성호, 견석기씨 등 여러 명이 남아 술을 더 마셨다.

 

그 때 옆자리에 앉은 안해룡씨로 부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관람객이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 사진을 찍었지만, 제목만 없다면 그냥 할머니 사진이지 아무도 위안부사진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조선족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하기 위해 그 학교에서 배웠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삼 세대를 함께

교정에 세워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조선족 학교의 역사가 설명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집 제작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의 나열식 편집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내용끼리 모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다.

80년대 후반 ‘사진집단 사실’에서 처음 만났는데, 90년도 나의 ‘전동동588’전시 팜프렛도 그 친구가 만든 것이다.

일찍부터 사진은 물론 편집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지금은 취재에다 다큐영화까지 여러 가지 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각 자의 길을 가느라 만남의 시간이 없었지만, 가끔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오후5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일본의 원로 다큐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전이 열렸다.

한국을 제2의 고향삼아 50년 동안 기록해 온 시세이선생의 진귀한 사진들은 감동 그 자체다.

그 분의 사진들을 대할 때마다 늘 부끄럽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 분이 대신한 것이다. 나야 시세이선생보다 한 참 늦게 사진을 시작했지만,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대부분 살롱사진에 빠져 기록의 중요성을 놓쳤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시사성 사진들은 우리나라 기자들도 찍었겠지만,

우리가 방치한 한국 이면사는 그가 남긴 사진들이 유일한 게 많다. 미군기지촌을 오가는 양공주들의 모습이나

청계천 판자촌에서 사는 서민들의 생활사 등 보석 같은 사진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역시 가난한 다큐사진가로 힘들게 살아간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가 ‘격동한국50년’이란 사진집을 발간하며 전시를 도왔으나, 모두들 힘에 부치는 전시였다.

일본에서 직접 프린트해 온 작품이었지만, 획일화된 규격에다 빌린 액자라 작품에 비해 전시 효과는 반감되었다.

가난이 유죄다. 그러나 사진들이 너무 좋아, 보고 또 보게 만들었다.

판매가격도 오리지널 프린트 한 점에 250만원이면 국내 작가들에 비해 한참 싼 가격이다.

개인이 일본의 원로사진가 시세이선생의 명작을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된다.


그 날 전시장에는 국내 다큐사진가는 물론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윤주영, 한정식, 황규태, 박 도, 김승곤, 구자호, 전민조, 이규상, 안미숙, 김녕만, 김보섭,

엄상빈, 임향자, 이기명, 김남진, 안해룡, 이상엽, 정영신, 김지연, 최경자, 이경수, 천수림, 이상봉, 김승혜, 조성호, 한선영,

마동욱, 나떠구, 견석기, 남 준, 곽명우, 김양수, 성윤미, 인현우씨 등 100여명이 전시를 관람하며 축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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