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츠 포 사일런스 - 나의 몸짓은 너의 침묵을 가리고

waltze for silence - My gestures cover your silence

허진/ HURJIN / 許塡 / painting 

2023_0921 2023_1014 / 일요일 휴관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10 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_162×130cm_2023

허진 홈페이지_museum.imagian.net/?id_partner=%C7%E3%C1%F8

 

초대일시 / 2023_092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후원 / ()아트레온

주최 / 아트레온 아트센터

기획 / 아트레온 갤러리

 

아트레온 갤러리

Artreon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129(창천동 20-25번지) B1, 2

Tel. +82.(0)2.364.8900

www.artreon.co.kr

 

최후의 인간, 최초의 동물  "시각 예술의 다른 영역에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가 있다. 바이오필리아는 사람이 다른 생물, 특히 살아 있는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는 타고난 성향이다." (에드워드 윌슨(1929-2021), 지구의 정복자(2012) 중에서)

 

허진_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23-3 _ 한지에 수묵채색,_145cmX112cmX2_2023

허진이 최근 십여 년이 넘도록 천착해 온 이른바 동물 연작에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도구, 기계도 등장하지만 화면을 지배하는 소재는 단연 동물이다. 1990년대에 삼십 대의 허진은 다중인간익명인간연작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이 혼성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분열적이고 몰개성적이 되어 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냈다. 그는 90년대 말의 익명인간연작에서부터 식물, 산수 등과 함께 자연을 상징하는 소재로 동물을 그려 넣기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부터는 야생 동물을 화폭 전면에 내세운 유목동물이종융합동물연작을 작업의 주축으로 삼아 왔다. 허진의 관심사는 인간에서 동물로 진화한 셈이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2-9_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62X130cm_2022

허진이 그리는 동물은 현대인에게 낯설다. 그는 사자, 기린, 하마, 산양, 얼룩말, 코뿔소와 같은 열대 초원이나 삼림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을 그린다. 현대인이 접하는 동물은 기껏해야 인간의 울타리에 가둬 놓고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공장식 축산으로 사육되어 식탁에 오르는 육류뿐이다. 허진은 비윤리적으로 포획되어 동물원에 전시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비롯한 현대 도시인이 좀처럼 보기 힘든 자연 속 동물을 그린다. 자연에는 실재하나 인간 세계에 부재하는 야생 동물을 그리는 허진의 작업은, 단어 '그리다'의 다의(多義)를 구현하듯, 동물을 '재현'하고 동시에 '상상'하는 일이다. 그는 멀고 먼 야생의 자연이 현대인의 눈앞에 현전(現前)하게끔 하기 위해 동물을 그리고 또 그린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6 _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00cmX80cm_2023

유목동물연작에서 동물, 도구와 기계, 인간은 무작위로 화면에 배치되지만, 크기, 색상, 표현법은 소재에 따라 별도의 정해진 형식이 있다. 형태의 묘사는 실재하는 대상을 따르지만 채색은 실제 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허진은 우선 먹칠한 한지 바탕 위에 갈색, 녹색, 청색 위주의 붓질을 거듭하여 몇 종류의 야생 동물을 큼직하게 묘사한다. 동물의 몸 전면은 은색 펜의 날카롭고 반짝이는 선으로 촘촘히 채운다. 동물은 이처럼 큰 비중과 이질적 질감으로 돋보이게 그려져 작품의 중심 소재가 된다. 이어서 동물의 색보다 채도가 높은 색으로 신발, 헤드폰, 자동차, 비행기 등 문명의 이기를 그려 넣는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20 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53X45cm_2023

허진은 인간을 동물, 기계와 사뭇 다르게 표현한다. 윤곽만 드러내는 실루엣 기법으로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데, 먼저 그려진 동물, 기계 등과 중첩되는 부분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배경 위에 배치되는 부분은 바탕의 먹색이 드러나게 둔다. 세부 묘사 없이 노랗고 검은 면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는 존재임이 확인될 뿐, 개별성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 인간'으로 표현된다. 이종융합동물연작의 경우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이 한 몸을 이루어 등장하고, 배경 곳곳에 작은 바위섬이 그려지는 정도의 변주만 있을 뿐 유목동물연작과 형식적으로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한편 모든 작품의 여백은 단색으로 칠한 뒤에 밝고 연한 색조의 점묘로 채우는데, 그 결과 동물 연작은 망점이 있는 인쇄물 위에 동물, 기계, 인간의 콜라주가 올려진 듯한 허진 특유의 화면으로 완성된다

 

허진_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23-1 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_145X112cmX2_2023

유목동물+인간-문명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동물 연작의 전체 제목이다. 허진은 동물로 표상되는 야생의 자연과 기계로 상징되는 물질문명의 두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서 사유하는 화가이다. 작품의 명목과 실제에서 공히 동물이 중심인 만큼 허진은 생태주의자로 평가될 법하고, 그렇다면 그림 속 인간의 도구와 기계는 동물과 대립되는 문명 비판적 소재로 해석될 만하다. 그런데 동물과 기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형되기는 하지만, 양자의 의미와 가치가 대척된다고 판단할 만한 시각적 근거는 딱히 없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18 _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_72.7cmX60.5cm_2023

허진은 현대인의 삶에서 괴리된 자연과 현대의 일상을 지배하는 문명을 병치하여 보여 주되,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거나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거시적인 문제에 관한 한 판단과 선택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몫이어야 한다. 그림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동물과 기계 사이사이에 실루엣만으로 표현된 인간은 명시성이 높은 노랑과 검정의 배색 때문에 마치 경각심을 제고하는 표지판처럼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로 불릴 정도로 현명하지도 않고, 신이 창조했다고 믿을 만큼 특별하지도 않은,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인간에게 허진은 동물 연작으로 질문을 던진다. 사라져 가는 자연과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 문명의 이중 위기 속에서, 폴 고갱도 물었듯,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12 _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45X112cm_2023

수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보여 주듯 인류가 최초로 재현한 대상은 동물이다. 허진의 동물 연작을 오롯이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시 고갱의 질문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무엇인지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생존과 생업, 주술과 종교, 부와 권력, 전쟁과 지배, 놀이와 여가, 과학과 의학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동물에 투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동물을 그리고, 동물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고, 때로는 재현된 동물의 효과가 실재하는 동물의 효용을 압도하기도 했다. 동물이 그저 귀엽고, 신기하고, 무서워 보이기만 하는 현대인이라면, 그래서 허진의 동물 연작이 영 낯설어 보인다면 미술사와 인류사를 되짚어 보라. 허진이 제목에 붙인 '유목'에서 질 들뢰즈의 노마디즘까지 읽어 내려는 수고로움 대신에, 그의 동물 연작을 인간 종족이 정주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세는 말할 것도 없고 홀로세 이전에 그렸던 동굴 벽화와 나란히 놓고 보라.

 

허진_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23-2 _ 한지에 수묵채색,_145cmX112cmX2_2023

허진의 동물 연작은 인류 최초의 그림과 적잖이 닮았다. 구석기인과 허진의 그림에서는 모두 무한정의 공간을 누비는 야생 동물이 주인공이며,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동물과 관계를 맺는 조연일 뿐이다. 허진은 동물의 몸에 은빛 선을 긋고 또 그어 빛나게 하며, 점안(點眼)하여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림에도 반영되었듯이 기술의 축적에 따라 인간이 쓰는 기구는 복잡해지고 거대해졌지만, 유목동물+인간-문명, 즉 동물과 인간을 합한 뒤에 문명을 빼 보자는 작가의 수식을 따르자면, 결국 남는 것은 자연의 동물과 맨몸의 인간이다. 동물과 인간이 공생했던 원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허진의 동물 연작은 문명 시대를 거치며 인간이 동물에 투사하고 부과해 온 욕망을 거두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림의 기원을 탐구하여 시원적 그림을 남기고 싶은 화가의 욕망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최석원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23-13 _ 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_130.5cmX97cm_2023

The Last Man, the First Animal "In another sphere of the visual arts there is biophilia, the innate affiliation people seek with other organisms, and especially with the living natural world." (Edward O. Wilson, The Social Conquest of Earth (2012)) Although humans, human-made implements, and machines are featured in the animal series Hur Jin has delved deeply into for over a decade, the subject matter that is dominant in his works is by far the animal. Hur Jin's work in the 1990s (when he was in his thirties), particularly through his series Multiple Humans and Anonymous Humans, sought the portrayal of contemporary individuals who were increasingly characterized by a sense of disconnection and depersonalization against a backdrop of nature and civilization. His art captured the complex interplay between different aspects of human existence, blurring the boundaries between past and present, nature and civilization. With the series Anonymous Humans, he began illustrating subject matter symbolic of nature such as plants, mountains, water, and animals. From the mid-2000s, he concentrated primarily on creating Nomadic Animals and Dual Fused Animals, two series in which wild animals are brought to the focus of his work. His interest was in the evolution from humans to animals. The animals Hur Jin has depicted are unfamiliar to contemporary people. He paints wild animals inhabiting tropical grasslands and forests such as lions, giraffes, hippos, mountain goats, zebras, and rhinos. The animals contemporary people can come into contact with are at most companion animals raised in human enclosures or animals for meat raised by factory farming and brought to our dining tables. Hur portrays animals in nature that modern urbanites including himself can rarely see unless they are unethically captured and displayed in zoos. His work of painting wild animals that exist in nature but are absent in the human world is concerned with 'reproducing' and 'imagining' animals as if embodying the multiple meanings of the word 'painting.' He repeatedly paints animals to bring wild nature before the eyes of contemporary people. In the Nomadic Animals series, animals, tools, machines, and humans are randomly placed in the scene, but their scale, color, and expression follow a predetermined format depending on the material. The depiction of form is realistic, but his use of color diverges from strict realism. First of all, Hur depicts several kinds of animals in large sizes by repeating brushwork primarily in brown, green, and blue on an inked background of hanji (handmade Korean paper). The whole body of an animal is filled with sharp, shiny lines with a silver pen. Animals in this series are illustrated prominently in large proportions and disparate textures. In succession, objects of civilization such as shoes, headphones, cars, and airplanes are painted in colors with a higher chroma than those of the animals. Hur Jin portrays humans quite differently from animals and machines. He illustrates human figures using a silhouette technique that reveals only the outline. Sections that overlap with the animal or machine are painted yellow, and sections placed in the background are left unfilled with any color to expose the ink color of the background. Humans, expressed simply with intersecting yellow and black planes without any detailed depiction, are only confirmed to be walking upright. They are depicted as 'anonymous humans' without individuality. In the Dual Fused Animals, animals of different species appear as one body. In terms of form, works from this series are in line with those from the Nomadic Animals despite a variation brought on by small rocky isles painted here and there in the background. Meanwhile, the blank spaces of all of his works are in monochrome and then painted with dots in bright and light shades of colors. As a result, his animal series is completed as scenes unique to Hur, in which a collage of animals, machines, and humans is printed on material with halftone dots. Nomadic Animals+Humans-Civilization and Dual Fused Animals+Utopia are the full titles of his animal series. Hur is a painter who thinks about the two worlds of wild nature represented by animals and material civilization symbolized by machines, and the humans who exist between them. He may be evaluated as an ecologist because animals are both nominally and actually central in his work. If so, implements and machines in his paintings can be interpreted as critical subject matter of material civilization in opposition to animals. Although animals and machines are artistically depicted in different manners, there is no particular visual basis to judge that their meanings and values are in opposition to each other. Hur juxtaposes nature separated from the lives of contemporary people and the civilization dominating modern daily life but does not think of nature and civilization in a dichotomous way or provide an answer to the question concer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When it comes to such a macroscopic issue, judgment and selection should be up to a human group, not any specific individual. A human being expressed only as a silhouette between animals and machines looks like a sign arousing attention due to the highly explicit yellow and black color scheme. Hur Jin puts a question to humans who are the hominid, within the order primate, within the class mammal, within the phylum chordate, within the kingdom animalia. We humans are neither wise enough to be called Homo sapience nor special enough to be believed to have been created by God. As Paul Gauguin asked, in the midst of the double crisis of disappearing nature and seemingly unsustainable civilization, "Where do we go?" As shown in cave paintings from the Paleolithic era tens of thousands of years ago, the first subjects humans depicted were animals. In order to fully appreciate Hur's animal series, it is necessary to go back to Gauguin's questions and reflect on where we come from and what we are. Historically, humans have projected their desires pertaining to elements such as survival and livelihood, conjury and religion, wealth and power, war and domination, play and leisure, and science and medicine onto animals. In this process, the act of drawing animals and appreciating animal pictures was the main means to satisfy human desires. And the effect of represented animals at times overwhelmed the utility of real animals. If you are a contemporary person who feels that animals are just cute, amazing, or scary, and if you feel that Hur's animals look unfamiliar, you need to look back on art history and human history. Instead of going through the trouble of trying to catch Gilles Deleuze's nomadism in Hur's title 'nomadic,' you may draw a parallel between his animal series and cave paintings rendered long before the settlement of human civilization, before the Holocene, and the Anthropocene. Hur's animal series bears a significant resemblance to humanity's first pictures. Wild animals roaming in an infinite space are the main characters in both Paleolithic people's pictures and Hur's paintings, and humans are nothing but minor characters who establish relations with animals as a group of people, not as individuals. Hur repeatedly draws silver lines on the animal's bodies to breathe life into them and make them shine. As reflected in his paintings, implements humans use have become larger and more complex due to the accumulation of technology, but what's left in the end is animals in nature and humans with nothing, based on Hur's formula of 'nomadic animals+humans-civilization' that is, combining animals and humans and then subtracting civilization. Although it does not advocate a return to primitive times when animals and humans coexisted, his animal series suggests that we try to suppress the desires humans have projected and imposed on animals throughout the era of civilization. This alludes to his own desire to create original paintings through an exploration of the origin of painting.  Seokwon Choi

 

  한국과 핀란드 수교50주년을 기념하는 이어지다전에

고 안애경의 헌신을 기억하려는 예술창고가 마련되었다.

 

그녀가 수집한 컬렉션과 워크샵을 통해 한국과 핀란드 수교 50주년의

발자취를 기념하며 함께 나아 갈 길을 모색하려는 취지다.

 

  지난 21일부터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안애경 예술창고에서 릴레이 뜨개 워크숍도 열린다.

 

  주한 핀란드대사관과 그녀의 가족을 비롯한 친구들이 힘을 모아 마련한 전시에는

자연이 일상에 스며들어 디자인이 된 창조물을 소개해 온, 한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안애경(64)씨는 일 년 전 광주에서 과로로 쓰러져, 일주일간 사경을 헤매다 목숨을 잃었다.

 

  그 일주기를 맞아 필란드 대사관에서 그녀의 추모 공간을 겸한 특별한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녀의 공적을 한국보다 필란드가 더 인정하는 것 같았다.

 

  안애경씨는 미술, 공예,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즐겨 온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큐레이터이자 아트디렉트였다.

 

   '핀란드국립박물관'과 '필란드디자인뮤지엄', '핀란드공예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한국 공공디자인 엑스포' 등의 초청 큐레이터로 일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한 일상 속의 디자인과 건축 및 예술교육을 소개하며,

국제전시와 교육프로그램 등을 기획하여 진행해 왔다.

 

  북유럽의 자연과 삶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북유럽 친구들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예술교육을 진행했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학교디자인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핀란드와 서울을 오가며 북유럽 문화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친환경적인 예술을 추구하며 우리네 삶을 개선하는데도 온 힘을 쏟아왔다.

 

  그녀의 삶은 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었다.

미술과 디자인은 일상에 뭔가 써 먹을 수 있어야 한다며,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해 만들어갔다.

사람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디자인이었고, 디자인이 그녀의 삶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생길 때마다 책을 쓴다는 그녀는 소리 없는 질서’, ‘핀란드 디자인산책’,

북유럽디자인’, ‘북유럽학교 핀란드’, ‘북유럽학교 노르웨이등 여러 가지 책도 펴냈다.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6년 전 인사동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이 초대한 오찬회에서다.

동자동에서 찍은 사진들을 빈민에게 돌려주는 빨래 줄 전시를 할 것이고 했더니,

자기도 구경하고 싶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게 인연이 되어 서로 오 가게 되었는데, 허리 관절염으로 비좁은 쪽방에서 제대로

누울 수가 없다는 글을 페북에 올렸더니, 핀란드 목공예가를 이끌고 달려왔다.

좁은 공간에 맞는 목침대를 직접 만들어 줄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나 역시 그녀가 기획 추진한 서서울호수공원에 만든 ‘예술로 놀이터

어린이 아트캠프, 오산에 만든 어린이 놀이공간 ’나무처럼‘ 같은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친환경에 관한 세미나나 워크숍 등 그녀가 하는 일마다 유심히 지켜보게 된 것이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린 워크숍에서는

'우리는 지금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질문을 던져 많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

 

  한 번은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가 마련한 대사관저 만찬 초대를 받았는데,

그동안 핀란드를 오가며 문화전도사 역할을 해 온 그녀의 역량을 재확인한 자리가 되었다.

 

  한국과 핀란드 수교50주년을 기념하는 '안애경의 예술창고'는 고인의 언니 안병애씨 노력으로 꾸며졌다.

 

소장품인 이딸라 유리 블로잉, 파이프로 만들어낸 오이바또이카 컬렉션 꽃병 등

핀란드를 상징하는 도자기 작품들도 선보였다.

 

  전시장 벽에는 안애경씨가 고등학생 때 그린 작품으로, 대학 미술제에 응모하여 입상한 작품도 걸렸고,

한 쪽 구석에 마련된 모니터에서는 안애경씨의 공적과 그녀의 아름다운 삶을 말하는

핀란드 친구들의 인터뷰가 소개되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안병애씨가 진행하는 뜨개 워크숍에서 만들어 질 방석들은,

쪽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동자동 빈민들에게 나누어 줄 계획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내일(29일) 까지라, 보실 분은 서두르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이청운 화백이 청운을 꿈을 안고 상경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그가 화단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71년 구상회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다,

그리고 데뷔한 지 10년 만에 중앙미전에서 특선을 받으며 재 부상한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련도 따랐다.

 

박통 때인 1970년대 말에는 독제에 항거하는 ‘현실과 발언’에 합세해 혼이 난적도 있다.

정의감을 억누를 수 없어 참여했지만, 그가 표적이 된 것이다.

 

어리숙한 이화백을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그를 납치해 무려 50일이나 감금해 버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출감하자 말자 낯설고 먼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가 주로 그렸던 그림 소재는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 바닷가 풍경이었다

애수에 젖은 풍경들은 질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둡지만 서정적인 바다가 바로 이청운의 그림 세계다.

 

그가 아프기 전에 부산 청사포로 화실을 잠깐 옮긴 적이 있었다.

비릿한 바닷가 추억을 떠올리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항상 10년이라는 변곡점이 따랐다.

병마와 싸운 지도 이제 10년이 가까워오니, 곧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먼지 덮인 미완의 작품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지난 20일, '청운이형 병문안 가자'는 연락을 김명성씨로부터 받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다 몸도 편치 않았지만, 누워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가지 못했으니, 그를 본 지도 3년이 넘어 버렸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 응암역에 내렸는데,

약속 장소인 서부경찰서 앞에는 김명성씨와 조해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뒤이어 송상욱, 김영복, 전활철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화실에는 부인 이상랑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간병하느라 고생해서 그런지, 곱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대조적으로 이청운씨는 동자 같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청운 화백이 지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도 어언 십 년이 가깝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이청운 화백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다.

살신성인,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아내 덕이지만,

미완의 그림을 두고 눈감지 못하는 이화백의 절박함도 더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처음 병문안 갔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소연 했는데,

소망을 이루고 싶은 집념에 십 년을 버텨낸 것 같다.

병상에 누워  곳곳에 걸린 미완의 그림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구상과 고민을 했겠는가?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 미완의 그림에 혼을 불어넣을 때다.

 

털고 일어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구상한 것을 에이 아이가 완성케 하면 안될까?

 

어두운 잿빛 화실의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래된 자화상 같다.

이젤은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봇대 같기도 하고,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든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뒤 늦게 뮤지션 김상현씨가 등장했다.

그 역시 중병으로 투병하는 처지지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힘들게 찾아온 것이다.

전에는 아코디온을 메고 와 셀브루의 우산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청운의 표정은 아쉬운 감이 역력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상현씨 역시, 힘들어 악기를 가져오지 못한 심정이 어떻겠나?

 

물감이 짓이겨져 걸려 있는 팔레트 행렬도 정겹고,

이젤에 기대어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등대 또한 얼마나 불을 밝히고 싶겠는가?

모든 게 정지된 풍경이지만, 그 자체가 이청운의 삶이고 색깔이었다.

 

김명성씨는 이청운 미완의 작품 전을 열겠다고 말하지만, 안쪽에 누운 이 화백 들을까 걱정되었다.

긴 세월 눈 감지 못한 이유가 뭔 데, 자존심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화실에서 나왔지만 그냥 헤어질 수 없어, 서부경찰서 후문 쪽에 자리 잡은 마포나루로 갔다.

푸짐한 갖가지 해산물이 나왔는데, 인사동 낭인들 술자리에 어찌 소리가 없을소냐?

‘부용산’으로 시작한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흘러간 노래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들였다.

 

'내 이름은 순이' 라는 노래인데, 가사 내용이 대폿집 작부의 신세타령이었다.

"내이름은 순이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 그냥 십팔번으로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니 랍니다. 괴로워서 마신 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에 부모형제 내동생이 보고파 웁니다.

그 날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뜬소문도 거짓이예요"

 

오랜만에 듣는 송상욱선생 노래도 흥겹지만, 술상 두드리는 젓가락 반주가 더 죽였다.

 

사진, / 조문호

 

 

 

서인사마당 주차장 가는 '인사11'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이 있다.

80년도 초반부터 출입했으니, 내가 들린 요식업종 중 가장 오래된 가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귀천이나 사동집도 남았지만, 술과 인연이 닿는 집은 부산식당이 유일하다.

 

지금은 사동집주인인 송점순씨만 살아계실 뿐,

부산식당조성민씨나 귀천의 목순옥씨는 세상을 떠나 아들이나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 전승되어, ‘부산식당생태탕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 온 술안주다.

 

그리고 밥도 언제나 새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내놓았다.

맛은 있어도 음식이 늦어 손님들의 불만과 독촉도 따랐지만,

아무리 빨리 달라고 난리를 쳐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밥이나 생태탕을 먹게 되면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어쩌랴!

 

지금은 인정 많던 부산식당주인장 조성민씨는 가고 없지만,

16년 전 인사동 사람들전시 때 찍은 초상사진만 남아 부산식당트레이드마크처럼 벽에 걸려있다.

 

지난 18일은 건축가 임태종씨로 부터 부산식당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오후 다섯 시 무렵, 정동지 따라 갔더니 임태종씨를 비롯하여 인천의 김광원씨도 와 계셨다.

김광원씨는 처음 만났으나, 정영신씨 장터 사진을 소장한 사업가란다.

모든 것이 작품을 꾸준히 소장해 준 임태종씨 덕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인사동 사진을 비롯하여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등 여러 점을 컬랙션 했는데,

그 날도 정영신의 장터 사진 두 점을 사겠다고 했다.

사진을 사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밥과 술까지 사주어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독지가가 있는 덕에 가난한 예술가가 어렵사리 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좀 있으니, 양산에서 일하는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한때 인사동 지킴이로 불린 그는 양산에 살지만, 틈만 있으면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요즘은 몸이 아파 약 먹는 처지라 술을 마실 수 없으나,

이런 반갑고 고마운 자리에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부산식당의 오래된 늦장 부림도 여전했다.

밥부터 주었으면 술보다 밥을 먹었을 텐데, 생태찌개를 반쯤 먹어서야 밥이 나왔다.

금방 지어낸 밥이라 맛있기는 하지만, 인내력 없는 사람은 열 받기 십상이다.

 

그 날은 김광원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땅값 비싼 인천 송도에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분은 공들인 것만큼 돌려주는 농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분으로,

주변에 몰려드는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단다.

공터만 보이면 갖다 버리는 못된 인간들의 습성은 어디나 똑 같았다.

 

그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섬에 들어가 번데기 장사를 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여태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주었는데,

진정성있는 처신으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차로 늘 마중으로 옮겼으나,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어 먼저 일어나야 했다.

인사동의 술자리는 늘 아쉽기만 하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이 잡상들이 난무한 남대문시장처럼 변해 버린 지도 꽤 오래되었다.

돈 따라 유행 따라 가는 물줄기를 되돌릴 수야 없겠지만,

종로구청이나 인사동전통보존회등 인사동을 지켜야 할

민관 조직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있다.

 

아니 대책이 없다는 것 보다 방관하며 조장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여러 차례 대안도 제시해 보았으나 시도는 커녕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세월만 지나면 월급이 나오는 공무원들의 안이한 관행도 문제지만,

돈이 먼저인 장사꾼들의 잇속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더 애석한 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풍미해 왔던 인사동 풍류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문화와 풍류가 좋아 수십 년에 걸쳐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인사동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젠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대폿집마저 젊은이들 술집으로 바뀌어 버렸다.

 

인사동을 찾던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뜸해져, 인사동을 기록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7년 전부터 병행해 온 동자동 쪽방이라도 제대로 기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몇 달 전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인사동에 나오지 않았다.

 

지난달 정영신씨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를 돕기 위해

보름 동안 인사동에 머물 기회가 생겼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오래된 영화제목처럼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가 된 것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인사동은 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옷가게야 예전부터 많았지만 대형 모자점도 두 군데나 생겼고

새로운 악세서리 전문매장도 여러 곳 들어섰다.

 

다행인 것은 새로 생긴 갤러리도 보인다는 것은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이 팔리는 상업 갤러리는 주로 강남이나 평창동에 있지만,

인사동은 대관 위주로 운영되는 전시장이 대부분이다.

무려 100여 개나 전시장이 몰린 인사동은 전시문화의 본산 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건물주가 직영하는 통인화랑, 선화랑 등은 초대전으로 끌어 가지만,

관훈미술관이나 동산방’ 등은 문 열 때보다 문 닫은 때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 외의 갤러리는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 대관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유명세 덜한 예술가들이 몰리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싼 점포세를 감당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난 전통문화 가게들은 되돌릴 수 없으나,

갤러리가 밀집한 인사동만의 장점을 활용하여 전시문화를 일으켜 세우면 어떨까?

 물 건너 간 인사동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사람은 있으나

인사동 전시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더 한심한 것은 인사동에 100여 개에 가까운 화랑이 몰려 있으나

종로구청문화과는 물론 인사전통문화보존회 등 어느 한 곳도

 인사동에 갤러리가 몇 개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종로구청 담당자의 궁색한 답변으로는 2년 전 기준으로 146개라는데,

그것도 골동 매장인지 화랑인지 구체적인 구분도 없었다.

 

그리고 인사동 홍보관을 비롯하여 인사동에 안내소가 두 군데나 있지만,

어디에도 어느 전시장에서 무슨 전시가 열리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안내할 사람도 없다.

인사동에 관광객이 그렇게 많이 몰려 오지만 전시를 소개할 사람조차 없으니,

전시 보러 오는 사람 없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인사동에서 보름 동안 전시장을 지켜보았으나, 대개 알고 찾아온 분이 대부분이고,

지나치는 관광객이 전시장을 찾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전시 포스터를 붙이려고 돌아다녔으나, 포스터 붙이는 벽보판이 없었다.

그나마 유리창을 벽보판으로 내준 부산식당이 유일했다.

 

겨우 다섯 장 갖고 나온 포스터를 아는 술집이나 식당에 넉 장 붙이고,

한 장 남은 포스터를 공사장 가림 막에 붙여 놓았더니,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참히 찢겨져 거리에 버려졌다.

 

늦었지만 인사동을 전시문화 중심지로 부흥시키는 일에 힘을 모아보자.

화랑 주인과 예술가들이 나서서 민관단체의 협력을 이끌어내면 가능하리라 본다. 

먼저 종로구청 문화과에 전시행정에 밝은 전문가 고용을 청원하자.

 

그리고 안내소마다 인사동에 열리는 전시목록을 비치하고,

미술평론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좋은 전시를 선별해 내도록 하자.

좋은 전시나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전시가 선정되면 집중적으로 홍보하자. 

 

 가로등마다 그날의 중요 전시를 알릴 수 있는 세로 광고 현수막을 내걸어,

홍보하는 일부터 한 번 힘을 쏟아 보자.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인사동이 살길이다.

 

사진, / 조문호

 

조형의 기본에서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까지

From the basics of molding to a painting touched with one's eyes

권성원/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2023_0916 2023_1012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1_모두의 환타지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권성원 블로그_blog.naver.com/forflame

 

초대일시 / 2023_0916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23_100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아팅

arting gallery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4013 2

@arting.gallery.seoul

 

조형의 기본에서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까지 채색 효과를 배제하고 단색으로 대상의 형태와 명암을 잡는 그리기 기법을 드로잉 혹은 드로우라 표기한다. 그걸 제목으로 딴 2022년 작 Draw는 이번 개인전에 세 점 나왔다. 종래 작업 연보와 달라진 이번 개인전의 변화를 읽는 출발점으로 이 연작을 꼽기로 했다. 원통 원뿔 육면체 원형 사면체 같은 기본 도형은 권성원의 작업 연보에서 개인 도상에 가까운 브랜드로 굳었다. Draw는 공중에 부양한 갖가지 기본 도형들 사이로 붓질의 시원한 질감이 뱀처럼 휘감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붓질의 움직임이 만든 유기성과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구성된 기본 도형의 각진 질감은 하나의 결합체가 되어 역동감과 안정감이 혼재된 미묘한 인상을 준다. 붓질과 기본도형의 상반된 질감의 결합은, 노을 진 하늘을 붓으로 그린 바탕에 각진 도형들의 뭉치를 중심에 올린 신작 An Icon of Flatland이나, 표현주의적 붓질 위에 도형과 붓질을 뒤섞은 D-Formation으로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1_모두의 환타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_부분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2_모두의 환타지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권성원_Draw-1_종이에 아크릴채색_46×34cm_2022

권성원은 2017년 이래 줄곧 시각예술의 다양한 원형에서 화면에 쓰일 기본 요소와 구성을 참조해왔다. 조형의 기본은 권성원의 초지일관한 미적 태도다. 세모 네모 원처럼 기본 도형들의 입체 버전으로 화면을 채워왔으니 말이다. 채색도 혼색을 하지 않고 3원색이라는 기본색을 병치 혼합시켜 밝고 맑은 색상을 구사했는데, 이번 신작에선 색상의 화려함이 이전보다 더하다. 작년 그의 개인전 서문에서, 나는 스토리가 사라지고 기본 도형과 3원색으로 구성된 작업 계보를 두고 '이미지 뭉치'라고 표현한 바 있다.

 

권성원_D-formation 22-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60.5cm_2022
권성원_D-formation 22-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53cm_2022

채색과 구성처럼 미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외에도, 출품작 Draw처럼 시각예술의 기본 기법을 제목으로 작명하는 것도 권성원에겐 흔하다. 연작 형성 Formation이나 '변형' 쯤으로 번역될 D-Formation연작이 그렇다. 형성이건 변형이건 이처럼 명시된 제목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권성원 그림은 튜브로 짜낸 수직선과 수평선 물감의 줄로 화면이 구성되며 완성작에 이르기에, 직물 짤 때 씨줄과 날줄의 엮임을 연상할 만큼 체계적으로 화면이 축조된다.

 

권성원_Flatland 23-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
권성원_Flatland 23-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_부분
권성원_Flatland 2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

그림의 안에 담긴 의미보다 작품 표면이 주는 첫 인상에서 작품의 우열을 가를 때가 많은 게 미술 현장인데, 이 점에 착안해서 기획한 그룹전 미술의 피부(2022년 아팅)에 그가 초대된 것도 권성원 그림의 촉각성 때문이었다. 이번 개인전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2023.0916~1012 아팅)에 나타난 변화로는 Draw처럼 도형의 기하학적 경직성과 붓질의 표현주의적 기법을 결합시킨 화면을 시작으로, 표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튜브를 짜 올리는 물감의 층을 기존보다 더 두툼하게 올린 점을 들 수 있다. 하얀색 바탕 화면에 수직 수평선으로 채워진 두툼한 물감의 색줄 사이에 틈새가 있다. 그 틈새 때문에 그림을 정면으로 볼 때와 측면으로 볼 때 색의 질감이 다르게 지각되는 렌티큘러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권성원_전환의 징후_붉은 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240cm_2023
권성원_입면화된 풍경 1-우크라이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7×80.5cm_2022
권성원_입면화된 풍경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2
권성원_2D roller coaster_종이에 아크릴채색_51×37cm_2022

기존 작업보다 두툼한 물감의 층위가 돋보이는 신작은 두꺼운 물감 덧칠로 화면의 입체감을 극대화했던 반 고흐를 차용한 전환의 징후_붉은 밤이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소용돌이치는 푸르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왼편에 불타오르는 검푸른 삼나무를 배치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권성원의 튜브를 통과하면서 전환의 징후_붉은 밤이란 제목을 달았다. 권성원의 도상인 기본 도형들로 화면의 밑면을 깔고 그 위로 튜브로 짜낸 붉은 물감의 소용돌이 밤하늘을 3면화로 길게 올렸다. 그리고 원작에선 한 그루인 삼나무를 양편에 각각 배치해 좌우대칭이라는 권성원의 또 다른 프레임에 끼웠다. 반이정

Deep End, natural rhythm-Time of rhythmical flow

심연, 자연율-결이 흐르는 시간

김정남/ KIMJEONGNAM / 金政南 / painting

2023_0920 2023_0925

김정남_natural rhythm 027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73×117cm_2023

 

김정남 인스타그램_@rhythm_tan_Jeongna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후원 / 강원특별자치도_강원문화재단

 

아트가가 갤러리

ART GAGA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41

(인사동 183-4번지) 1

Tel. 070.7758.3025

www.gagagallery.com

@artgaga_gallery

 

김정남의 작업-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08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81×13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1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1×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204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0.5×91cm_2022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은 에너지의 물적 형상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움직인다.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렇게 바람과 바람이, 공기와 공기가,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결을 만든다. 거시적(혹은 미시적)으로 말하자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존재를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결은 어쩌면 존재에 아로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풍경에도 지문이 있고, 상처에도 지문이 있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2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 617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결은 흐른다.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행 중이기 때문이다. 결이 흐를 때 마구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는 듯 흐르는 강약이 있고, 주기가 있고, 패턴이 있다. 그게 뭔가. 율이다. 리듬이다. 리듬이 자연에 탑재되면 자연율이 된다. 자연이 숨겨놓고 있는 리듬 그러므로 음률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품고 있는 소리 그러므로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은연중 실현(그러므로 암시)하고 있는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의 호흡, 자연의 숨결, 자연의 기운, 자연의 섭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에는 결이 있고, 율이 있다. 주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산을 쳐다보면(시선), 산도 쳐다본다(응시). 그렇게 내가 산을 쳐다볼 때, 나에게서 산 쪽으로 산에서 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고 공감이다.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어쩌면 작가가 산맥에서 캐낸, 그러므로 산맥을 자기식으로 단순화한, 산맥의, 자연의, 풍경의 골격이라고 해도 좋다(그리고 알다시피 그 골격을 도상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등고선이 유래했다). 자연도 존재도 결을, 율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산맥을 유비적으로 해석한,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김정남_natural rhythm 417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41×61.5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렇게 작가는 산을 그린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고 자연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산을 새긴다. 새긴다? 알루미늄 판각이다.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김정남_natural rhythm 32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2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91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김정남_natural rhythm 13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종전 작업과는 사뭇 다른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기왕의 판각 작업과는 별도로 꽤 오랫동안 형식실험 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림을 보면 어둑한 화면 위로 무분별한 붓질이 가로지르는 것이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란 점에서 몸 그림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배경 화면과 붓질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배경 화면이 밀어 올린 붓질들의 춤을 보는 것 같고,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 자기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판각 작업이 에토스가 그린 그림이라면, 자기를 방기한 채 직관에 내 맞긴 그림이 파토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 그처럼 무분별한 붓질이 어둑한 배경 화면과 대비되면서 얼핏 산세가 보이고 풍경이 보인다.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린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풍경이 된 파토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를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

After the Unsustainable

2023_0817 2023_0923 / ,,공휴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태연_윤주희_조재영

믹스앤픽스(권동현_구재회_신익균_염철호_최주원)

 

후원 / 재단법인 일심_씨알콜렉티브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시각예술창작산실

,협력기획 / 현민혜(큐레이터)

관람시간 / 12:00pm~06:00pm / ,,공휴일 휴관

 

씨알콜렉티브

CR Collective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20 일심빌딩 2

Tel. +82.(0)2.333.0022

cr-collective.co.kr

 

'이제 지구 온난화의 시대는 가고 열대화의 시대 global boiling이 시작되었다.' ('23.7.28, UN발표) 우리는 유례없는 이상 기후와 환경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와 위기감은 생태, 환경, 지속가능성을 오늘날 인류의 가장 긴박한 주제로 만들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도록 강제한다. 맹목적인 당위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된 실천 과제들은 인류가 직면한 이 거대한 위기를 해결할 효과적, 필수적인 대안인지 검증되지 않은 채 '할 수 없는 것'만 아니면 하도록 행동을 요구 받는다. 반드시 해야 하는 우선 과제와 나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실용과도 관계없고 잉여의 산물인 창작 작업과 전시는 효율과 발전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까. 새로운 미감을 위해 본 적도 없는 재료를 수집하고 실험하여 형태를 만드는 창작 과정은 수많은 부산물과 쓰레기를 수반한다. 작품에 맞는 전시 구성, 작품 제작, 가벽 설치, 운송, 디자인 등, 무수한 자원의 소모를 거쳐 전시가 만들어지고, 끝난 뒤 다음 전시를 위해 폐기라는 효율적인 절차를 밟는다. 창작자는 지속해서 새롭고 발전된 작품 제작을 요구받지만, 대부분 작품은 판매 전까지 작업실 구석에 보관되고, 결국 구작(舊作)을 더 이상 보관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작품 폐기까지 진행되기 십상이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자면, 예술이 '환경'을 언급한다는 건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문제에서 창작자도 예외는 아니기에 창작자는 환경 파괴에 가담할지 모른다는 정체 모를 죄책감과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분열적인 감각을 느낀다. 창작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는 거대한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은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으며, 창작행위와 작품, 전시라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김태연은 창작물이 시공간을 초월해 지속가능성으로서 '구작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중성적 구조물은 개인전 이후 컨테이너에 보관해두었던 설치 작품 중에서 지지대나 받침대와 같은 부수적 구조물들이 작품의 보조를 넘어서 상호보완하며 기능을 상쇄해 대상 그 자체가 주연으로 새롭게 등장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Foams는 큰 부피와 내구성이 약한 재료 등으로 인해 보관상 한계가 있었던 구작에 특별한 향방을 마련함으로써 유보적 지속가능성의 면모를 찾아본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윤주희는 삶의 의지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제작되었던 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를 변형해 뭘 굳이를 만들었다. 작가는 단단하게 서 있던 작품을 분절하고 위태로운 형상으로 흩뜨려 또 다른 자리를 점유하게 한다. 이는 기존의 작품을 다시 존재하게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던 "뭘 굳이"로 시작된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의 또 다른 모습일 터이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분절된 구조 위에 앉아 스스로 삶의 지속 가능한 방식에 대해 공명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조재영은 증식과 변용의 가능성을 담은 조각의 본질에서 환경 문제와의 유사성을 탐색한다. 부동의 상태로 멈춰진 조각이 아니라 유닛(unit)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노마드의 상태를 구현한 앨리스의 방은 고정된 불변의 명제란 무엇인가를 재사유하게 한다. 존재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변화를 거쳐 완성되는 조각 작품처럼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한정된 활동과 규격화된 정답 찾기가 아니라 핵심의 중심을 찾아 끊임없는 비워내기임과 동시에 한없이 증식 가능한 변용/변형의 순간에 집중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믹스앤픽스는 작품화가 되지 않았지만 버릴 수 없는 사물들을 수집하고 재조합하여 벼룩시장 좌판의 미감을 재현한다. 작가로서 혼자 할 수 없거나 혼자서 버거운 부분을 5명 작가들의 협업으로 보완하고 채우기 위해 결성된 믹스앤픽스는 유의미한 나눔을 위해 공유된 비효율적 다양체를 작업실 한편에 자리했던 터널 모양의 진열대 위에 채워나간다.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사물들은 무질서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조형성을 통해 사물이 지닌 쓰임과 버림, 소유와 나눔 등의 가치를 환기한다. 이번 전시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4명의 작가/팀이 조각 작업을 진행하면서 생태, 환경,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재사유하고 최소단위의 유닛으로 분해하며 존재의 물리적 조건 안에서 나눔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효용가치라는 미명 아래 숨겨진 끊임없는 무한 욕망의 증식이 가져온 비극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다. 예술은 인류 미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또 다른 진지한 모색을 살펴야 한다는 신념의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그 나머지- 젠가(Zenga)의 무수한 조각들을 빼어내도 서 있을 수 있는 날카로운 긴장의 균형감을 찾아보려는 시도와 같을 것이다. 씨알콜렉티브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The era of global warming has ended; the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UN announcement, July 28, 2023). Nowadays, we are facing unprecedented abnormal climate and environmental problems. The pace of change and a sense of crisis have made ecology, environment, and sustainability the most urgent subjects of mankind and force us to find and do whatever we can. Individuals are imposed to perform tasks for action by unsupported justification and required to do something unless they are "not able to" without verifying if it is an effective and essential alternative to solve the huge crisis of humanity. We do not even properly discuss high priorities and non-urgent issues. If so, how should creative works and exhibitions, which are products of impractical surplus, stand in this social demand of sustainable development? The creative process of collecting and experimenting with unique and rare materials for a new sense of beauty involves numerous byproducts and waste. An exhibition is created through the consumption of countless resources such as materials and energies for the exhibition composition, production of works, installation of walls and facilities, shipping, and design. After the exhibition is over, efficient disposal is also executed for the next exhibition. Creators continue to be required to produce new and better works, but most of the works are kept in the corner of a studio until they are sold. If an artist can no longer afford to store old works, they are likely to be discarded. Considering this, it is quite ironic that art mentions the environment. Because creators are no exception to current problems, they also feel ambiguous between the unknown guilt of participating in environmental destruction and the desire to create new works. What can or cannot a creator do? In this context, this exhibition explores how meaningful our actions can be from a huge ecological perspective and how they can be delivered through the process of creative activities, works, and exhibitions. Taeyeon Kim attempts a "new interpretation of old work" as sustainability of a creation transcending time and space. Neutral Structure reveals how supplemental objects, such as supports and holders, which were used to support the installation works and stored in containers after exhibitions, can complement each other beyond their assistive roles and re-emerge as the main subjects. Foams looks for reserved sustainability by providing a special revision of an old work that had difficulties in storage due to its large size and frail materials. Juhee Youn transformed her previous work Monument for Those Living a Long Day, a sculpture that symbolizes the will to live, into a new work Why Bother. The artist splits the sturdy work into a fragmented, unstable, and precarious shape, allowing it to occupy another position. This may be another answer of her own to the question "why bother [to rework a previous work]?" that was constantly repeated in the process of reworking the existing work. Youn expects spactators to have an opportunity to be resonated with sustainable way of life sitting on a segmented structure. Jaiyoung Cho explores the similarity between environmental problems and the essence of sculpture containing the possibility of proliferation and transformation. Alice's Room makes us rethink the definition of a fixed, immutable proposition by being dismantled and reconstructed as a unit rather than a piece in an immovable state. For Cho, sustainable development, like sculpture completed through fluid changes according to the physical conditions of existence, focuses on the moment of transformation/modification that is infinitely multiplying and emptying out to find the core rather than limited activities and standardized answers. MIX n FIX reproduces the beauty of a flea or garage market by collecting and recombining objects that have not been made into artworks yet cannot be thrown away. The group was formed to supplement and share the works that are burdensome to individual artists or exceeds one's capacity through the collaboration of five artists. They fill a tunnel-shaped display in a corner of their studio with inefficient objects for meaningful sharing. Objects that look like odds and ends evoke the values of using, abandoning, possessing, and sharing through new formality in disorder. The exhibition After the Unsustainable demonstrates the process of artistic praxis for ecology, environment, and sustainability through sculptures created by four artists and team. The artists rethink their works, dismantle them into the smallest units, and reexamine the meaning of sharing within the physical conditions of existence. This exhibition, in this context, is a critical interpretation of the tragedy generated by the constant proliferation and infinite desires of capitalism in the name of efficiency and utility value. It is also a way of believing that we should seriously look for an alternative to current environmental issues without turning our eyes from unsolved problems of humankind. Ultimately, it is an attempt to find the best possible alternative after acknowledging what we cannot do and find the balance within sharp tension like a firmly standing Jenga puzzle even after losing many pieces. CR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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