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RD EYE 제 3의 눈

신수정展 / SHINSUJUNG / 申水晶 / sculpture

 2013_1016 ▶ 2013_1022

 

 


신수정_Wild nature_혼합재료_148×28×32cm_2013

신수정_Wild nature_혼합재료_148×28×32cm_2013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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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시선 너머 저 곳 ● 생명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하나의 신비이다. 깨지기 쉽고, 비정형적이고 변형된 도자 인체의 모습과 오각형의 상징적인 기호들, 얼굴의 인체 형상의 전면으로 수없이 겹쳐진 다리와 몸통의 형상들, 검은 깃털로 목을 둘러싸고 해골 모양의 드로잉을 한 아이의 눈동자, 푸른색 너머 흰색의 상징적인 기호들이 가득한 허공을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는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신수정의 인체 형상들은 조각 작업에서 흔히 사용하는 재료가 아닌 세라믹 소재를 통해 표면이 반사되는 질감을 이루고 있으며, 앙리 루소의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자연의 색채를 느끼게 하는 회화적인 색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인체의 색채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없이 변해가고 있다.

 


신수정_세피로트의 나무 Ι_합판, LED_75×55×18cm_2013

 

 

신수정_세피로트의 나무 ΙΙ_합판, LED_60×60cm_2013_부분

그의 조각 작업은 "예술은 현대산업화의 획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 생명의 신비를 얘기하는 유희적 행동이 가장 본질적인 것에 가깝다."라고 이야기하는 글에서 보듯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들의 수수께끼를 탐구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Blue Lace, 2013」의 평면 작업들에서 드로잉으로 그려놓은 유태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종교 기호들이나 또는「Wild Nature, 2013」의 세라믹의 작업들에서 남성과 여성의 이중적인 모습을 한 얼굴 형상과 종교적인 기호들을 상징하는 다양한 꽃문양의 반복적인 형태와「Carnival」의 세라믹 인체 형상에서 보듯이 어린아이를 닮은 인체 도자 위에 남미 축제의 원초적인 의미를 그려놓은 해골 모양의 인체 드로잉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조각 작업에서 사용된 소재들을 통해서도 그 의미들을 내재하고 있다. ● 그의 인체 조각은「Wild Nature, 2013」에서 작업에서 보듯이 화려하지만 깨지기 쉬운 도자 작업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살아 있는 생명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들은 세라믹 소재와 같이 겉으로는 화려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바깥으로부터의 작은 충격에도 깨져 버릴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라믹의 소재는 인간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창세기 구절을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멀티 미디어적인 요소를 띠고 있는「세피로트의 나무 I, II」의 작업에서 선적인 모양의 인체 형상들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으며, 다양하며 화려한 색채들은 일상의 삶에서 정신없이 변해가는 사람들의 내적인 심리 상태를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수정_PLUR_혼합재료_200×130cm_2013

 

 

신수정_Carnival_혼합재료_80×35×25cm_2013

신수정_Carnival_혼합재료_80×35×25cm_2013_부분

그의 인체 형상들에서 드로잉의 기호들과 색채들은 종교적인 기호들을 통해 설명적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조각 작업은「Carnival, 2013」에서 보듯이 새의 깃털을 목에 두르고 있는 주술적인 의미의 기호들이나「Blue Lace, 2013」의 작품과 그 밖의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태 신비주의인 카발라를 상징하는 기호들과 색채들은 토속적인 무속 신앙이나 신비주의의 기호들을 탐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호와 색채들은 특정한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카발라에 대한 마담 블라봐츠키의 신화적인 해석이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것과 같은 기호의 문양과 앙리 루소와 같이 이국적이고 원시성을 느끼게 하는 색채들을 비추어 봤을 때 모든 생명의 원초적인 본질에 대한 수수께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의 인체 조각은「Wild Nature, 2013」나「Blue Lace, 2013」의 작업에서 보듯이 클림트와 같이 남성이나 여성의 인체 얼굴의 묘한 선과 색채들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Carnival, 2013」의 작업에서 보듯이 어린아이의 도자 인체 조각 위에 죽음을 의미하는 드로잉의 인체 형상이나「세피로트의 나무II, 2013」의 작업에서 모든 생명의 원형적인 기호들을 표현하는 작업에서 보듯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생명에 대한 본질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신수정_7개의 통로_혼합재료_289×30×30cm_2013

 

 

신수정_Flo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65cm_2013

신수정_Blue lace_혼합재료_120×65cm_2013

「Blue Lace, 2013」의 작업에서 푸른색의 바탕색은 칸딘스키가「예술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를 벗어나 도달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체 얼굴의 형상은 인간의 원형적인 본질을 상징하는 기호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인체 형상의 눈빛이 향하는 곳은 푸른색의 바탕색과 카발라에서 원형적인 생명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흰색의 오각형의 별인 것이다. ● 그의 깨지기 쉬운 도자 재료와 남성과 여성의 이중적인 모습을 내재한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인체 형상, 멀티 미디어적인 조형적인 작업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향해가는 원초적인 곳에 대한 의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시선은 이번 전시에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무의식적으로 향하는 곳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 조관용

Vol.20131016g | 신수정展 / SHINSUJUNG / 申水晶 / sculpture


Uneasy Blank

김해진展 / KIMHAEJIN / 金海辰 / sculpture

2013_1016 ▶ 2013_1022

 

 


김해진_흘러나오다.._무발포 우레탄_140×25×25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Tel. +82.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나는 나뿐만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사소하지만 누구나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멍한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있지 않다. 혼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건지 아무생각 없이 있는건지 그 속을 알 수 없다. 겉모습은 눈도 크게 뜨지 않고, 온몸의 힘을 빼고 편안해 보인다. 그 사람들은 일상속의 나 자신이고, 내가 본 현대인들의 일면이다. 작품 속 사람들은 보는이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온몸에 힘을 빼고, 처지고, 주욱 늘어진 상태로 높고, 길고, 좁은 좌대 위에 올라가 있거나, 또는 그냥 바닥에 툭툭 던저져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상황, 사회이다. 그곳에서 멍한 상태로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김해진_흘러나오다..(dc)_무발포 우레탄_140×25×25cm_2013

 

 

김해진_새벽 5시 35분.1_혼합재료_120×30×30cm_2013

 

 

김해진_새벽 5시 35분.2_혼합재료_120×30×30cm_2013

 

 

김해진_새벽 5시 35분.3_혼합재료_120×30×30cm_2013

 

 

김해진_무감각소유자1_무발포 우레탄_60×55×18cm_2013

 

 

김해진_무감각소유자 2_무발포 우레탄_72×70×25cm_2013

멍함으로서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하게 노출되는 상태가 된다. 지루, 모호, 혼란, 상실, 안정, 슬픔, 기쁨, 불안, 등 모든 감정상태로 가특차 무감각한 상태가 된다. 온몸의 감정, 생각들이 아우라, 분위기로서 밖으로 흘러나온다. 인체작업 외의 사진 작업은 그러한 상태에서 바라본 시각을 옮겨놓은것이다. 사진의 한컷 한컷은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장면인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람도 지나가고, 바람도 불고, 차도 지나간다. 그러한 환경에 구애 받지않고 나는 그것들을 시야에 담긴하되 그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 김해진

Vol.20131016e | 김해진展 / KIMHAEJIN / 金海辰 / sculpture


10일부터 김덕기 씨 소품전                              

=김덕기 씨의 ‘행복한 마을로 가는 길’.


“그림은 모두의 가슴과 가슴에 행복한 미소의 다리입니다. 마티스가 자신의 그림을 ‘쉼을 주는 안락의자’라고 했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생생한 기운을 전해주고 싶어요.”

누구나 꿈꾸는 소박한 가족의 일상과 행복을 화려한 색채로 화폭에 담아온 화가 김덕기 씨(44)가 오는 25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작은 꿈 명품 100선’전을 연다. ‘작은 꿈’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마당에 꽃을 심고 가꾸는 풍경, 아빠와 함께 그네 타는 아이들, 공원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비둘기, 휴일을 즐기는 가족의 모습 등을 차지게 묘사한 소품 100점을 건다. 행복한 현대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앙증맞은 작품들이다.


김씨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보성고 미술강사를 거쳐 2007년부터 전업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는 “해체된 가정을 회복하는 일이 정부와 사회, 우리 모두의 몫”이라며 단란한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고집스럽게 그려왔다. 최근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과 행복도 붓끝으로 피워내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현란한 기교나 난해함이 전혀 없다. 대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붓놀림 같은 동화 세계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질박한 느낌의 화면에 작가 특유의 짙은 감성과 따스함이 배어 있다.

(02)732-3558

[한국경제]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동양화의 전통 기법에 현대 회화를 접목한 왕열 개인전 ‘스르르 展’
이번 전시회는 유토피아를 주제로 ‘신무릉도’ 시리즈 40여 점을 선보입니다.
작가는 “사람의 본질,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며 기형적으로 생긴 말을 통해 유토피아를 묘사했다고 전했습니다.
또 작품을 통해 힘들고 바쁜 현대인들이 마음의 치유를 얻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명상여행으로의 초대는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14일까지 이어집니다.

 

(영상취재/편집: 김미라 기자)



DESIRE 디자이어

커트만展 / CURT MAN / photography

2013_0929 ▶ 2013_1011

 

 


커트만_POP BIKE_피그먼트 프린트_40×50inch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SHINYOUNG communication_VISION CREATIVE, INC.

관람시간 / 10:00am~09:00pm / 주말,공휴일_10:00am~07: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Tel. +82.2.730.7707

www.palaisdeseoul.net


매혹의 상품들 ● 광고의 이미지, 상품 이미지는 우리를 유혹한다. 복잡한 구조를 숨기고 매끈하게 디자인된 기계들, 질소로 빵빵하게 부풀려져 있는 폴리프로필렌 과자봉지, 여자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로빈스 에그 블루(robin's egg blue)의 보석포장 박스...이런 유혹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고, 때로는 그것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커트만은 현대인들의 욕망과 소비문화를 다루고 있다. ● 커트만 작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물품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전혀 다른 형상을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해 왔다. 이번 Desire전에서는 명품(Designers Label)의 상품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일반적으로 명품은 그 공정의 치밀함이나 수작업, 디자인 등이 그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커트만의 작품의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은 시계, 골프채, 신발 등 명품들이다. 그리고 그 명품들이 모여 하나의 명품 형상을 완성한다. 이런 형식은 명품의 상품적 가치는 그저 명품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보여준다. 작가는 명품을 욕망하는 것이 그것의 효용가치보다는 그 레이블 안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본다. 고가의 명품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재력이 있어야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즉 명품을 소유하는 것은 소유자의 재력을 드러내는 것이며 자본의 크기에 의해 지위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 이처럼 대부분의 가치가 교환가치로 평가되는 현대사회에서 명품은 가장 쉽게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급장으로 쓰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진실한 사회적 계급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의 소비 수준을 곧 그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감추어진 자본을 측정하는 것보다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거짓으로 꾸며진 자아, 가짜명품으로라도 자신을 포장하려는 개인들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져본다. 작품 속의 핸드백, 자동차, 시계 등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단순한 이미지들이다. 이미지임에도 명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명품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끈하고 화려한 외관과 섬세한 디테일 등에 반응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 구현된 명품이미지는 어떤 레이블에도 속하지 않고 작가가 창조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보는 명품이라는 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 오늘날 최상의 디자인이란 소비사회에서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자신을 현시할 수 있는 것, 계급적 평등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물건을 넣을 가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샤넬백이 필요하고, 편하고 실용적인 운동화가 아닌 나이키를 신는다. 고급 상품을 욕망하는 페티시즘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극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디자인과 유행이 계속되고, 건전하지 못한 욕망은 지속적으로 소비를 추구한다. 욕망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자체가 되어버린 욕망. 작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아이러니한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 이수

 


커트만_POP NIKE_피그먼트 프린트_30×30inch_2013

 

 

 

커트만_POP MICKEY_피그먼트 프린트_40×40inch_2013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의 '욕망'을 나라는 인간 주체의 근원적인 존재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끝없이 갈구하는 '욕망'의 환유라고보았다. 이는 샤르트르와 같은 기존 실존철학에서의 인간의 욕망의 결핍에서 보다 나아가 근원적인 결핍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크 라캉'이 말하는 이 욕망은 결과적으로 근원적인 결핍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 과정은 끊임없는 치환의 연속이라고 본것이다. 또, 이기적인 유전자" 라는 책을 통해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비슷한 문화적인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기했었다. DNA와 같이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밈(Meme)이라는 인간 사이에 모방과 학습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문화적이면서 개념적인 존재를 제시했었다. 밈의 사회적인 학습과 모방으로 인한 욕망은 현대인들을 가장 강렬하게 지배를 한다. 이러한 밈은 사조나 유행, 트렌드 등 문화적인 소통과 아주 밀접한 이해구조를 가지고 있다. ● 이전 전시회 Trinity 에 다뤘던 정/중/동 을 통해서 죽음과 삶, 은유의 세계의 regorganize(재구성) 등 좀 더 폭넓은 스펙트럼에서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 전시회 Desire에서는 인간이 쫓는 욕망의 밈과 허상, 하이엔드(High-End) 소비품들과 황금만능으로 치장된 미디어산업, 광고의 허구성등을 다뤄보고자 하였다. ● Designer label(명품)은 그 제품의 실용가치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이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희소성의 논리가 정당하게 대접받는 그런 제품을 말하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 명품이 가지는 질보다도, 그것을 지님으로서 남보다는 우월한 특권의식을 그속에 담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과거의 신분제는, 현대의 자유 평등사회에서 명품 소유라는 등급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Grade(급)이 매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은 바로 이러한 명품의 소유를 통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은밀하고 달콤한 욕망은 짝퉁을 소유하면서까지 가짜신분 취득에 자신의 EGO를 타락시키고 있는 것인가?

 

 


커트만_POP CADILLAC_피그먼트 프린트_30×50inch_2013

 

 

 

 

커트만_POP BOOTS_피그먼트 프린트_40×30inch_2013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이러한 인간의 욕망의 허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각 작품들에는 소비재들의 element(요소) 또한 명품을 이용했거나, 이전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Wire나 skeleton 등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하기도 했다. 모든 생물은 죽으면 Skeleton을 남기고, 모든 명품은 그 자체의 leather나 label, steel 들을 남기지 않는가? 작품들의 배경칼라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마음의 깊이만큼이나 깊고 어둡게 치장되어있고, 그속에 드러난 피사체들은 더이상 감출수 없을 정도로 선연하게 드러나, 마치 인간의 욕망의 실루엣을 드러내놓고 있다. ● 현대의 인간은 어려서부터 인간의 요람이라고할수 있는 고급 유모차부터 성인이 되어서 시계, 가방, 자동차에까지 그 욕망을 나이와 더불어 병립시키고 있다. 또한 어린시절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마저도, 성인이 되기전에 구매욕구를 길들이기 위해서 소유해야할 하나의 아이템으로 자리잡히게끔 기업들이 포장하여 돈으로 유혹하게 하지 않는가. 게다가 제품의 천편일률적인 트랜드에 따른 사양의 보편화도 문제라고 할수 있다. 기업은 돈을 위해서 소비자의 욕구를 쫓아가다보니 각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져가는 경우다. 브랜드의 본연의 제품철학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인가? ● 사회학적으로 보아도, 인간의 욕망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을 통해서 인류는 진화를 하고, 역사와 문명을 만들었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소비재로서의 욕망. 밈을 통해서 계속 진화하고 학습된 그 욕망엔 끝이 없지만, 그걸 욕망하는 인간은 나약하며 그 한계가 있다. ■ 커트만

 

 


커트만_POP PORORO_피그먼트 프린트_40×40inch_2013

 

 

 

커트만_POP BAG_피그먼트 프린트_30×30inch_2013

French psychoanalyst 'Jacques Lacan' regarded human desire as metonymy of desire longing continuously for solving the underlying lack of being as a human being, so called, the "I". This stressed fundamental deficiency further toward from the lack of human desire in the existing existential philosophy like Sartre. This desire said by Jacques Lacan is considered that it is not able to solve the ultimate deficiency and the procedure is an endless series of replacements. In addition, Richard Dawkins who presented a new theory through the book "Selfish gene" had advanced a hypothesis that there was a cultural gene similar to a biological gene. Not a substantial being such as DNA, but he had suggested the existence of Meme which is cultural, conceptional and can be communicated through imitation and learning among human beings. The desire caused by social learning and imitation of Meme controls modern people most intensely. This Meme has so close understanding structure to the cultural communication of the trend for the thought and popularity. ● It will be dealt, in this exhibition DESIRE, with the Meme and a false image of man-chasing desire, High-End consumer goods, the media industry with the golden master and the fiction of advertisement etc., whereas in the last exhibition TRINITY, it was handled the story in more extensive spectrum of life and death, reorganization of metaphoric world or so through the movement within stillness. ● Designer label means such a product which scarcity logic is rightfully treated as well as given to someone who carries an aura surpassing the product's practical value, while, in modern people, it projects the desire as it is to contain a superior sense of privilege in it by possessing it rather than its real value. The past identification system may be appeared in modern society of liberty and equality putting an invisible grade by possessing luxury goods. It is showed the desire to raising identification as a vicarious pleasure by taking advantage of luxury items. Is this covert and sweet desire corrupting one's Ego for gaining a fake identification, despite possessing counterfeits? ● Through this coming exhibition, it is going to be expressed this illusion of human desire. For each work, luxury goods have been used in the element of consumption goods for each work, as well as, like previous exhibition, various objects have been applied such as wires and skeletons. All the creature die, leaving skeletons and every luxury goods leaves its leather, label or steel. The background color of the works is decorated as deep and dark as heart contained human desire and the subjects in it come out clearly as cannot hide them any more as if it shows the silhouette of human desire. ● Modern people have been standing the desire side by side with age from luxury stroller which can be called by human cradle at young age to watches, bags, cars at coming of age. Even also the protagonists of animations that is enjoyed in childhood are wrapped in attractive packaging by business to be settled as a must-have item to raise purchasing desire before reaching adult age.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specification of common in accordance with product's one-size-fits-all trend is also a problem. As a result of chasing the consumer's desire for the sake of the money, the identity of each brand is disappearing. Where really is the shedding light on the role of the brand's product philosophy? ● In the sociological view, human desire is never negative. Humanity has evolved through the desire and has created history and civilization. The desire, as a constantly craving consumer goods, even though there is no end on the desire which has been evolved and learnt through Meme, human beings chasing it are weak, and there is a limit. ■ CURT MAN

Vol.20130929g | 커트만展 / CURT MAN / photography


이산 저산 서울진경

조풍류展 / CHOPOONGRYU / 趙風流 / painting

2013_1009 ▶ 2013_1015

 

 


조풍류_푸른밤의 여정-인왕산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 금니_130×1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조풍류 카페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1009_수요일_05:00pm

부대행사 / 2013_1012_토요일_05:00pm

힐링국악 컨써트 "풍류한마당"

판소리_대금산조_아쟁산조_가야금병창_남도민요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그를 처음 만난 건 바다였다. 몇몇이 작당하여 태안 앞바다에 통통배 띄우고 낚싯대를 드리운 자리였다. 어느 명창이 심청가 한 자락을 풀어내는데 그가 옆에서 추임새 넣으며 흥을 돋우었다. 소리꾼인가 했는데 그림을 그린다기에 '야메 화백'인가 하였다. 그날 밤 뭍에 올라 이슥토록 공차며 노는데 이 자의 발재간이 예사롭지 않았다. 음, 근수는 좀 나가지만 화가를 가장한 운동선수로구나. ● 그를 다시 만난 건 산이었다. 소리꾼들이 경기도 양주 산중턱 정자에서 한바탕 노는데, 그가 또 북채를 잡았다. 배 위에서 더듬거리던 솜씨는 그새 놀랄 만큼 늘어 소리와 북장단의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졌다. 일당들은 그날 밤 동네로 내려와 밥 먹으며 2라운드, 밥 먹고 3라운드에 돌입했다. 뽕짝에 팝송에 만담까지 오만소리가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 기타를 뜯고 드럼을 두드리며 마이크까지 잡고 좌중을 흔드는 자가 있었으니 또한 그, 조용식이었다. 이제 보니 이 자가 '천하의 놀새족'이로구나. ● 그러더니 어느 날 신문에 그의 뒤통수가 나왔다. 두 개의 지면을 꽉 채운 대문짝만한 사진 한쪽에 그가 북채를 쥐고 앉아있는 게 아닌가.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백령도에서 열린 통일기원 문화행사 마당이었다. 청바지 자유인이 의관을 갖추니 의젓했다. 이 자가 마침내 '전국구 딴따라'로 나섰구나.

 

 


조풍류_북한산의 노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 금니_80×100cm_2013

 

 

 

 

조풍류_북한산의 노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 금니_53×76cm_2013

갈수록 태산이요, 알수록 장강인 그가 결정타를 먹였다. 가을 단풍 지기 전 제대로 놀아보겠다기에, 오호라 드디어 딴따라공화국 놀새당수 취임기념 올림픽스타디움콘서트를 여는구나 했더니, 개인전이란다. 그것도 여섯 번째.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당최 알 도리가 없어서 수소문을 하여 수유동 아지트를 급습하였다. 볕 좋은 날 점심때였다. - 문을 열라. - 누추하오. - 비루한데서 예술 나는 법이오. - 그러하오면... ● 허, 들어서며 숨이 턱 막혔다. 화실의 벽 한쪽을 옆으로 4m에 아래위로 2.2m의 도봉산 밤풍경이 채우고 있었다. 짙푸른 밤하늘에 보름달이 교교했다. 통렬한 색채, 통쾌한 여백, 통 큰 생략... 간결한 화폭에서 요해불가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뉴욕의 유엔사무총장 집무실에 이 자의 그림이 들어간 이유가 있구나. - 고수, 카수, 선수, 딴따라(대학생을 가르치는 훈장이기도 하다)... 본업이 뭔가. -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었소. 그래도 돌고 돌다 보니 붓질이 딱 내 업이 되더이다. 아교에 갠 돌가루를 거친 붓으로 꾹꾹 눌러 그린다. 전매특허가 된 '벽화기법'이다. - 많이 보던 풍경이오. ● 그가 손을 들어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북한과 도봉의 연봉이 주르륵 흘러가고 있었다. 발 딛고 선 오늘을 소재로 삼았다는 뜻이렷다. 이번에 내놓은 작품들이 북한․도봉․수락․인왕․남산 같은 서울 산들의 밤낮과 사계인 이유다. 금가루를 써 그림은 어두울수록 우아하게 빛난다. 해바라기에 빠졌을 때 그는 치밀했다. 남도의 산하를 주유할 때는 부드럽더니 '이산 저산'에서는 품이 넓어졌다. - 부감을 버렸는가. - 그것이 버릴 일이오? 시선이 땅으로 내려온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터이다. 그러고 보니 요 몇 년간 그는 다양한 자들과 뒹굴며 놀았다. 놀며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고 사람 보는 눈이 깊어졌는데, 그러면서 그림의 지평을 확장한 것이리라. 놀이가 화업의 양분이 된 셈이다.

 

 


조풍류_도봉산의 가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_130×220cm_2013

 

 

 

조풍류_방겸재인왕제색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_33×41cm_2013


그의 대책 없이 대략난감통속뷁B끕딴따라뽕짝꽐라스러운 재능의 뿌리는 나고 자란 목포에 있다. 중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기타 소리에 홀려 미술실 문턱을 넘고, 대타로 나간 미술대회에서 덜컥 홈런을 때리고, 노래에 미쳐 그림에 빠져 홍대 앞을 휘젓고... 이런 풍류디엔에이는 무엇보다 전라남도 판소리 인간문화재이신 어머니 김순자 명창에게서 받은 것이 틀림없다. 스승 남천 송수남은 생전에 말했다. - 개성 넘치는 너의 재주를 보석처럼 아껴라. ● 조용식의 그림은 따뜻하다. 유치원 꼬마, 수퍼 아줌마, 택배 청년, 택시 아저씨, 동네치과 의사, 천주교도, 불교도, 회교도, 어부, 농부, 주부, 지리산 반달곰, 설악산 까치... 미국 사람과 우간다 사람까지 뒤돌아와 다시 볼 그림이다. 상처 나고 해진 이 땅의 풍경은 그의 손에서 다정하고 유순해진다. 높은 산 아래 나직한 집들은 식구들이 기다리는 안식처다. 깊은 밤 푸른 산 아래 반짝이는 노란 불빛에선 방방곡곡 다니며 자선공연을 펼치는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러니 눈 덮인 산조차 포근해 보이는 것이다. ● 조용식의 그림은 경쾌하다. 고졸하고 근엄한 먹이 아닌 색색의 돌가루가 그림 재료다. 무거운 느낌의 돌이 채색을 만나 가볍고 유쾌한 재료가 됐다. 꽉 막힌 꼰대들을 조롱하며 날렵하게 핵심을 찔러 논점을 장악해가는 논객의 모습을 그의 채색에서 본다. 기성의 규율과 전통문법은 그에게 해체와 수선과 재조립의 대상이다. 타진과 모색의 단계에서 지금 그는 창조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는 조용식 화업의 유니버설조인트가 될 듯싶다.

 

 


삼각산의 가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_130×160cm_2013

 

 

 

조풍류_북한산의 봄_캔버스에 호분, 분채, 석채_122×190cm_2013

조용식의 그림은 치유다. 힐링 힐링 힐링...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어딜 가나 힐링 타령이다. 타령이 지나쳐 스트레스가 될 정도다. 진짜 힐링은 우기지 않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산 저산'의 그림들은 주장하지 않는다. 그림에 스민 치유의 기운은 작가가 여유와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고, 그림과의 갈등과 불화를 끝내간다는 의미다. 주변을 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 그의 畵名은 '조풍류'다. 한번 뿐인 세상 제대로 한번 푸지게 놀고 가자는 의지일 테다. 그가 말한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 여행을 떠나고, 음악을 만나고, 북과 장구를 배우고, 어설프게나마 악기를 만질 때가 가장 진실하고 행복하다. 난 내 그림과 음악에 어떤 막연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 그리고 저 그림들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는 희망이 있다. ● 격정은 음악이 되었다, 열정은 그림이 되었다. 왼쪽엔 어화세상 펼쳐 놓고 오른손엔 붓을 든 '초절정수퍼울트라A끕캡숑잡것' 하나가 인수봉 아래서 세상을 향해 군불을 지피고 있다. 가을비 내리는 날 조풍류를 꼬셔 낮술 한 사발 해야겠다. ■ 안충기

Vol.20131009a | 조풍류展 / CHOPOONGRYU / 趙風流 / painting


Sequence Structure

강정윤展 / KANGJEONGYOON / 姜晶玧 / sculpture

2013_1016 ▶ 2013_1022

 

 


강정윤_Grid Structure Ⅰ_우레탄, 철망_140×68×58cm_2013

강정윤_Grid Structure Ⅲ_우레탄, 철망_100×78×54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강정윤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분해와 조립 : 강정윤의 근작들 ● 강정윤의 근작들은 '분석'에서 시작한다. '분석'이란 무엇인가? '分析'이라는 한자어가 말해주듯 그것은 '나누고 가르는 일'을 뜻한다. 분석가는 이렇게 '나누고 가르는 일'을 거듭하여 분석 대상의 기본단위를 찾아낸다. 다음으로 분석가는 기본단위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전체를 이루는지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분석가의 목표는 분석대상의 구조(structure)를 해명하는 것이다. 분석가로서 강정윤의 관찰 대상은 '아파트'다. "아파트라는 건축물, 또는 건물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본단위들의 결합규칙은 무엇인가"가 이 작가의 기본 관심사다. 어떤 의미에서 아파트를 분석하는 강정윤의 태도는 단어나 문장을 커뮤니케이션의 문맥에서 떼어낸 다음 기호 자체, 기호 속성들, 그리고 그 내적 구성에 초점을 두어 분석하는 기호학자, 언어학자의 태도를 닮았다. ● 이렇게 분석에서 시작한 작업은 분석을 통해 얻은 단위와 결합규칙을 참조하여 재구성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러한 재구성 작업은 크게 계열과 결합의 축을 따라 전개된다. 첫째는 계열의 축에서 발견한 단위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 내지는 결합하여 새로운 구성물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결합의 축에서 발견한 (단위들의)조합규칙을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강정윤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방식은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함께 적용된다. 이러한 실험은 일상언어의 문법을 뒤트는 방식으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시인의 그것을 꽤 닮았다. 이제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강정윤_Grid Structure Ⅰ_우레탄, 철망_140×68×58cm_2013

 

 

 

강정윤_Grid StructureⅡ_우레탄, 철망_120×68×48cm_2013

 

 

 

강정윤_Sequence StructureⅠ_혼합재료_120×53×11cm_2013

 

 

 

강정윤_Sequence StructureⅡ_혼합재료_120×43.5×11cm_2013

강정윤은 뒤로 물러나 아파트 전체의 형상을 관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분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체 형상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찾는다. 분석의 첫 번째 수준에서 아파트 전체형상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층'이다. 통상적으로 '층'은 '가로로 긴 형태의 사각형'의 외양을 갖는다. 기본 단위로서 층은 '쌓기'의 방식으로 결합된다. 즉 하나의 층 위에 다른 하나의 층이 올라가고 그 위에 다시 하나의 층이 올라가는 일이 반복된다. 쌓기가 완료되면 아파트 전체의 외양이 형성된다. 그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의 모양새를 갖는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는 '가로로 길고', 다른 하나는 '세로로 길지만' 층의 사각형태와 아파트 전체의 사각형태가 대부분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파트의 전체 형태는 그 단위인 층의 형태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아파트 건물이 구조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한 방식이다. 하지만 분석을 좀 더 진행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기본단위로서 층은 다시 하위 단위로 분절 가능하다. 그 하위 단위란 '가구'다. 하나의 층은 다가구로 구성될 수도 있고 두 가구로 구성될 수도 있다. 주목할 점은 개별 가구의 사각형태는 전체(층)의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파트의 '전체형태-층'의 수준에서 관철되던 통일성이 '층-가구'의 수준에서는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슨해짐'의 양상은 개별 가구를 구성하는 더 작은 다양한 사각형들(방, 창문)을 발견하는 순간 좀 더 부각될 것이다. ● 이러한 분석을 통해 발견한 단위들과 결합규칙들이 강정윤 작업의 재료다. 먼저 층을 여러 개 만들고 그 층을 겹쳐 쌓는 방식으로 제작한「Grid Structure」연작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물 주변에 비계(아시바)를 연상시키는 정사각형 그리드 틀을 배치한다. 주지하다시피 정사각형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고 따라서 여러 개의 정사각형으로 구성된 정사각형 그리드에서 항상 부분은 전체의 형상을 닮게 된다. 이러한 그리드의 구조적 양상은 아파트의 전체 구조적 양상과 독특한 협력 또는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Grid Structure」는 아파트 구조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아파트 전체형상-층'의 관계를 떼어내 새로운 문맥에 배치한 경우다. 또「Suspended Structure」에서는 한 아파트에서 찾아낸 기본 단위로 1가구, 또는 2, 4, 6가구(의 이미지)를 떼어내 다른 아파트들에서 찾아낸 가구단위들(의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강정윤은 그 단위 조각들을 하나의 전체 사각형 안에 연이어 이어 붙였다. 이렇게 본래의 문맥 속에서 분리한 단위들을 새로운 문맥 속에서 결합하는 일은 본래의 문맥, 곧 아파트 건축물이 갖는 구조적 통일성과 안정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다.

 


강정윤_Array StructureⅠ_혼합재료_54×72×37cm_2013

 

 

강정윤_Suspended StructureⅠ_혼합재료_160×180×100cm_2013

강정윤의 재료는 또 다른 분석에서도 나온다. 그것은 다음의 관찰에서 유래한다. 앞서의 분석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시도된 것이라면 여기서는 전체의 확인이 불가능한 가까운 거리에서 분석이 시도된다. 여기서는 시각보다는 촉각적인 것이 좀 더 우세할 것이다. 즉 아파트는 멀리서 보면 평평하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하다. 즉 아파트는 깊이 지각의 수준에서 여러 개의 레이어들로 구성된다(아파트의 이중창문을 예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는 심리 수준에서 여러 개의 레이어를 갖는다(예컨대 바깥쪽과 안쪽). 즉 여러 개의 레이어들로 겹쳐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해서 강정윤은 지각, 인지 수준의 레이어들을 강조하는 전략을 취한다. 아파트의 표면을 벽감(niche) 같은 것에 깊이 밀어 넣고 LED조명을 가하여 그림자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레이어의 겹침을 강조하는 작업-「Array Structure」이나 실내를 여러 레이어로 겹쳐서 구축한 후 LED를 순차적으로 점등시키는 방식으로 심리적 깊이를 강조한「Sequence Structure」연작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두 작업은 평소에는 (또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에서) 잘 보이지 않은 아파트의 어떤 구조적 양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가시화, 부각시킴으로써 아파트의 구조적 양상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하거나 뒤흔드는 모양새다. ● 정리해보기로 하자. 강정윤은 아파트의 구조분석을 통해 얻은 단위들과 결합규칙들을 자신의 작업에서 새롭게 선택,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조를 강화 내지는 전복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가는 아파트 분석을 매개로 삼아 우리가 세상을 좀 더 낯설게, 또는 창조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아도르노를 빌려 "인위적인 객관화 과정을 통해 사물의 세계를 초월한" 사례로 평가할 수도 있을게다. ■ 홍지석

Vol.20131016c | 강정윤展 / KANGJEONGYOON / 姜晶玧 / sculpture


Hello, I See You.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2013_0911 ▶ 2013_1120 / 일,공휴일 휴관

 

 


황규태_길_Ed. 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317c | 황규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1:00am~04: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J ART SPACE J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159-3번지Tel. +82.31.712.7528

www.artspacej.com


필연성과 자의성의 경계를 넘은 황규태의 자유로움 ● 황규태 사진의 자유로움을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말이고 설명이고를 떠난 자유로움인데 무엇을 말 하겠는가. 필자가 황규태의 자유로움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원풍경-다큐멘트』에서였다. '사진계'라는 말 자체, 그곳을 주름 잡는 아무개, 아무개 선생이라는 말 자체에 신물이 나 있던 필자에게 절대로 양복을 안 입으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이 없이 마냥 천진하기만 한 어린애 같은 황규태는 유일하게 마주 대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진가로 보였다. 그 전시에서 황규태는 수면에 비치는 빛을 깊은 노출부족으로 찍어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만든 것을 아주 큰 대형 프린트로 걸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루는 솜씨의 근간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자유로움이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사진을 좀 한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황규태가 유일하다. 다들 "이것은 지켜야 한다"는 식의 신주단지 모시는 태도로 사진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의 25년간의 평론생활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 그런데 평론가로서 황규태가 왜 자유로운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평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 자유로운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평론가는 근원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표면을 다루는 사람이므로.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표면의 매트릭스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만 더 정확히 말하면 설명하려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매트릭스에 질서, 규율, 위계 따위들이 들어차 있다면 황규태의 매트릭스에는 자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른 평론가 같으면 그의 성장과정이나 인물 됨됨이를 논하겠지만 필자는 자유는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개념의 문제이다. 그 자유의 개념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들어가 보자.

 

 


황규태_동무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우리가 가진 가장 나쁜 문화적 습관은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또 지금의 상태대로 꼭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물신적으로 믿는 태도이다. 우리는 문화적 표상들을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한글 자모의 조합을 뒤섞어 놓거나 수학공식에 쓰이는 기호들을 뒤섞어 놓으면 그것을 읽는 이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필연성(neccesity)과 자의성(contingency) 사이의 대립을 본다. 결론부터 말 하면 우리가 애지중지 모시고 있는 문화적 표상들은 전부 자의적이다. 즉 이렇게 되도 좋고 저렇게 되도 좋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노력하여 필연성의 탑을 쌓은 것이다. 그것이 서예든 사진이든 기본적으로는 다 자의적이다. 지금의 상황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푸트 사람들이 계란을 위부터 깨먹을 것이냐 아래부터 깨서 먹을 것이냐를 놓고 싸운 상황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문화에 대한 담론들은 겉으로는 저 작품이 더 나은가 이 작품이 더 나은가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은 필연성과 자의성의 싸움이다. 어차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그것을 자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기구조주의에서 말 하는 해체(deconstruction)이다. 해체란 뜯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표상의 속에 어떤 뼈대가 숨어 있는지 드러내 보여준다는 말이다. 겉으로 튼튼해 보이던 표상이 사실은 겉은 허술하고 속에 뼈대를 안 보이게 숨겨 놓고 있음이 드러나면 그 표상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만다. 어떤 배우가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도 잘 해서 모든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눈물은 안약 몇 방울 넣은 거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해체의 순간이다. 표상이라는 것을 세상에 던져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 세상의 풍파의 처분에 놓이게 된다.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아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파도의 처분에 놓이듯이 말이다. 해체란 그냥 보여주기일 뿐이다. 보여주고 나면 이 세상이 알아서 폐기처분하건 다시 살려내건 할 것이다. 필연성을 해체하여 자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해체주의적 전략이다. 사실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건 꼭 이래야 한다고 하던 필연성의 사슬을 풀고 실은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규태_소원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그런데 예술을 하는 작가란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어떤 필연성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중력의 법칙을 포함하여, 이 세상 어떤 법도 통하지 않는다. 진정한 작가라면 표상의 필연성을 믿지 말고 자의성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즉 자기가 만든 것이든 남이 만든 것이든 꼭 그렇게 돼야만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어떤 다른 식으로도 변 할 수 있는 유동성에 몸을 내맡겨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유동하는 모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열려 있어야 할 예술의 형태인 사진은 가장 경직된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가 사진으로 찍은 모든 것들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아도 존재했을 것이며, 그것이 사라졌다고 아까워 할 것도 아닌 것이다. ● 자유로운 자의성, 그게 황규태의 사진이 즐거운 이유다. 그는 사람들이 사진에서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들을 다 벗어던져 버렸다. 우선 그는 프레임을 버렸다. 프레임은 사진의 포도청이다. 그 안으로 들어오면 구제 받고, 못 들어오면 망각의 바다에 빠져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존 버거는 사진의 눈이 신의 눈을 닮았다고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절대로 자신의 사진의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화화하여, 사진의 프레임에는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이 한국의 사진가들이 믿는 최상의 신화이다. 사진의 프레임이 중요한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가로 세로의 비율이 적절해서 아름답게 보일 때 뿐이다. 즉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잘 맞아서 아름다운데 프레임을 함부로 잘라서 그것을 파괴하면 안 되기 때문에 프레임을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아름다움이 프레임의 아름다움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 ● 그런데 필름 혹은 촬상소자의 비율은 카메라 회사 마다 다 달라서 36×24, 6×6, 6×7, 4×5, 8×10 등 실로 다양하다. 즉 사진의 프레임은 카메라 회사 혹은 필름 회사가 자기들 나름의 원칙에 따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 아닌가? 누구든 사진의 프레임을 자를 수 있다. 그리고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진의 프레임이 이 세상의 시각장을 마구 자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사진의 프레임은 자르면 안 된다고? 서양이나 일본의 카메라 회사들이 마구 자른 프레임을 한국의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사를 더 이상 안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계속 지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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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태_Pixel Tve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45×110cm_2011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걸리적 거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 황규태가 사진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자유로움으로부터 그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가 1960년대에 찍은 못 살던 한국의 모습들은 전통적인 흑백사진의 구도로 돼 있었다. 거기서는 춘향이가 살던 시절의 목가적인 정취가 고전적인 구도로 살아 있었다. 이제 그 프레임을 부숴 버리자 목가적인 구도는 21세기 다운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파편이 돼버렸다. 여인의 고무신은 원근감이 압축되고 톤은 날아가 버려서 더 이상 목가적이지 않다. 그 고무신의 주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줘도 못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고무신이 아니라 픽셀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황규태가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고무신을 붙잡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화소수를 얘기하고 RGB를 얘기하고 USB를 얘기한다. 미래에는 그 사진을 보고 □□□□를 얘기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할 지도 모른다. 사실 1960년대의 고무신은 이미 화소수와 RGB와 USB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무신이 꼭 고무신이어야 하는 낡고 보수적인 의식이 고무신의 해방을 막았을 뿐이다. 황규태가 프레임을 잘라서 한 일이라곤 고무신이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쉬운 일을 하는데 50년이 걸렸다. 자유를 얻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것이다. ● 머리에 짐이 잔뜩 들은 광주리를 이고 걸어오는 모녀의 모습은 모든 디테일이 사라지고 검은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마치 우연히 사진으로 찍혔다가 경찰에 증거로 수집되어 확대된 흉악범의 실루엣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진에서는 흉악범과 천진한 모녀가 동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 사람 사진은 착하고 나쁜 사람 사진은 나쁘다고 잘못 믿어왔다. 우리는 사진에 너무 많은 성격을 부여해 왔고 너무 많은 동일시를 해왔다. 사진에는 입자만, 오늘날에는 픽셀만 있는데 말이다. 그런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또 50년이 걸렸다. 도대체 우리는 왜 단순한 것을 배우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오로지 황규태의 자유로움 만이 그런 사실을 깨닫는 문을 열어줄 뿐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의 감각에서 21세기의 감각을 이끌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이 검은 실루엣은 일면 불길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모습은 불길한 것도 길한 것도 아니다. 검으면 뭔가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동일시가 우리의 눈을 흐렸기 때문에 검은 실루엣이 불길해 보이는 것이다. ● 우리가 황규태 만큼의 자유로움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눈 앞에 뭐가 보이면 그것이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착시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사과가 보이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正일 때 이미 그에 대한 反을 품고 있다. 사람들이 헤겔의 변증법을 잘못 이해하여 正이 反을 만나서 새로운 合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正은 反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正속에 反이 들어 있다가 시간이 흘러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표상은 그것에 반대 되는 것, 그것과 이질적인 것을 품고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만을 본다. 어떤 것이 나비로 보이면 오로지 나비라고만 믿는 것이다. 사진이 문명사에 끼친 최대의 해악은 어떤 사물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 양태로만 존재한다고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즉 하나의 사과는 사과일 뿐이지 절대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표상적으로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사진의 못된 행태인데 우리는 그것에 너무 얽매여 버렸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그 겨울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애초부터 미래에 나타날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못 볼 뿐이다. 자유로운 눈으로 보면 그 변화가 보이는데 우리들 눈이 굳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일 뿐이다. 동일자의 철학은 어떤 사물은 오로지 동일성 즉 아이덴티티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사람이건 사물이건 국가건 그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질적인 것을 배제해 버리는 것이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요즘 시대는 그런 동일자의 철학을 믿지 않는다. 동일자 속에 타자가 숨어 있다고 믿는 시대인 것이다. 사진은 철저히 동일자의 철학에 기반한 표상방식이다. 어떤 사물이 오로지 한 가지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동일자의 타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즈 앞에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3차원의 현실과 사물이 존재해야 하며 렌즈 뒤에는 사진을 발명했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인 인간이 있다. 그런 타자들과의 적대적인 만남을 잘 해소해서 생겨나는 것이 사진이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걸작사진이라고 부르는 얄팍한 표상들이다. 사진이 예술이 되는데 결정적인 한계는 바로 그런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배제해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몇백분의 일초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 그런데 황규태의 카메라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과거 속에서 이미 미래를 봤으며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보았다. 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드라마 주인공이 죽는다고 희노애락 하는데 그는 거기서 작디작은 현미경적 픽셀을 봤다. 그의 시선은 경계를 모르고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그의 눈은 강물의 출렁임에서 컴퓨터 화면상의 패턴을 읽는다. 남들은 오로지 카메라로 찍어야 사진이라고 하는데 그는 스캐너나 복사기도 카메라라고 하며 사진을 만들어낸다. 이런 자유로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격이나 성향이 자유로와서 어디에 묶이지 않고 멋지게 생활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자유로운 프레임이란 프레임을 멋지게 써서 남들이 찍지 않는 각도로 사진을 찍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프레임의 구속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고하고 다루는 태도이다. 1960년대의 고무신에서 21세기의 픽셀을 보는 것, 프레임의 균형과 비례를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찍은 사진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이 황규태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진의 겉과 속을 뒤집어 입는 자유로움이다. 우리는 셔츠 하나라도 뒤집어 입으면 겉으로 레이블과 솔기가 나와서 창피하게 생각한다. 뭐든지 안과 밖의 경계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규태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다. 그의 사진에서는 앞과 뒤, 겉과 속,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없다. 문화의 필연성과 자의성을 가르는 엄격한 경계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Blu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정도를 말 해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중견 이상 사진가들은 다 아류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젊은 사진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대번에 아무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데 황규태를 따르는 아류는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스타일 상의 자유로움이라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머리 스타일을 흉내 내면 되고 이름을 비슷하게 지으면 된다. 그러나 황규태의 자유로움은 근본적으로 프레임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이고 사진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는 래디컬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흉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의 자유로움은 겉으로 보이는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다. 태도나 사상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놓여 있는 매트릭스가 자유로운 것인데 그것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자유로움이다. 호랑이가 근본적으로 지렁이와 다르게 태어났듯이, 황규태는 사진이라는 지평 위에서 근본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보는 존재이다. 거기 그는 홀로 서서 본다. 즉 남들에게 오염돼지 않은 눈으로 홀로 서서 보면서 자유를 획득했다. 우리는 그 자유가 두렵다. 그러나 두려운 일에 발을 디딜 때 진정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아닐까? ■ 이영준

Vol.20130911b |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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