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The house of souls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2019_0403 ▶︎ 2019_0416


황인란_영혼의 집-바람을 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60.6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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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순수와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 ● 그림이 무척 서늘하다. 캄캄하고 짙은 배경을 뒤로 물리고 꽃과 나뭇잎이 무성한 풍경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다. 전면에서 인공의 조명이 강렬하고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그 어딘가에 젊은 여자의 측면상이 주로 박혀있다. 비교적 깨끗하고 예쁜 여자의 얼굴은 다소 어둑하게 가라앉아있는 듯하다. 우울하다고나 할까 혹은 알 수 없는 근원적인 비애감 같은 것이 뼈 속까지 스며든 눈빛이다. 하여간 저 얼굴에서는 인간이 몸에서 풍기는 비릿함이 가셔져 있다. 무표정인지 혹은 모든 감정을 죄다 소진시킨 상태를 보여주려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성을 품고 있는 고혹적인 표정이기도 하다. 청순함과 가련함 등의 다소 상투형 수사를 동반하는 표정 말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저와 같은 여성의 얼굴 표정은 비교적 익숙하게 형상화되어 왔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한 여자의 몸 가까이에는 부산하고 급박한 새의 놀림이 배회한다. 그것은 적막을 깨고 정적인 화면에 문득 활력을 심어주는 편이다. 후경으로 밀려난 자연풍경과 그 앞에 자리한 여자의 육체 사이에 유일한 움직임을 만들어 흔들고 있다. 환청처럼 새의 울음과 날개짓 소리, 그로인해 바람이 갈라지는 파동이 들릴 것도 같다. 식물성과 동물성, 지상에 저당 잡힌 존재와 자유로운 비상의 존재, 화려한 꽃의 자태와 기하학적인 옷의 패턴, 뜨거운 색과 차가운 색, 물감과 연필 등 황인란의 화면은 다분히 이원적인 요소들 간의 길항과 긴장감이 팽팽하다. 그것은 순간 흔드는 것은 여자의 눈/눈빛과 그에 어울리는 표정이다. 저 눈빛과 시선은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시선이거나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시선과도 같다. 낮게 내려 깐 눈이거나 슬쩍 감은 듯한 혹은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그런 눈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 눈이거나 외부에 의해 견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빛, 아니면 오로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가늠하기 곤란한 시선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같은 눈!


황인란_영혼의 집-선악의 저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연필을 이용해 공들여 그린 이 지극한 그리기는 우선 그림의 가장 기초적인 소묘에 충실하다. 작가는 재현의 능력과 기술을 유지하면서 이를 아주 납작하게 화면에 밀착시켰다. 원근이나 거리감이 뭉개진 화면은 매우 평면적이 되면서 주로 선묘적인 테크닉에 의한 기량을 만끽시킨다. 캔버스에 아크릴릭으로 물감의 층이 얇게 올라간 후에 그 피부 위를 다시 연필로 규칙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차곡차곡 쌓아가는, 덮어가는 선의 궤적은 정교하면서도 낯설다. 이 둘의 조화는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까? 그런데 이는 작가의 성향에 기인해 보인다. 붓질에 의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해내지 못하는 영역, 충분치 못한 부분을 연필로 촘촘히 마감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다. 사실 연필이 개입되는 특정 부분은 여자의 얼굴과 옷 사이로 드러난 팔과 같은 살이다. 전체 화면은 물감에 의해 점유되고 도포되지만 인간의 살, 여자의 피부만은 물감의 층에 의해 덮여지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가능한 순수함과 깨끗한 상태에서 다른 배경과 차별화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물감이 차마 침범하지 않고 비워둔 영역이고 예리한 연필선의 간결하고 최소한의 접촉에 의해서만 표현을 허용한다.



황인란_영혼의 집-바람을 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181.4cm_2019


근작은 채색의 농밀함을 동반해 이전보다 회화성이 보다 진하게 감촉된다는 느낌이다. 붓의 터치와 약간의 질감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화에서 차용한 듯한 구성과 상징성이 짙은 도상의 연출로 인해 서사성이 보다 자연스럽고 짙게 내려앉아 있다. ● 작약이나 모란꽃이 무성하고 자지러지게 피어있고 울울한 잎사귀들이 바글거리는 숲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젊은 여자는 그로부터 빠져나와 무관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있거나 외면하고 있다. 머리 근처에서 성가시게 하는 새 역시 여자의 관심을 빼앗지는 못한다. 이 고독하면서도 대단한 자존감을 지닌 젊은 여자는 자기만의 영역 안에서 비타협적인 왕국을 도모한다. 여자의 얼굴 표정이 그것을 방증한다. 착하고 선하면서도 자신의 기준에 충실한 원칙주의자의 얼굴이다. 따라서 여자의 희고 맑은 얼굴은, 연필의 선에 의해 조율된 효과로 자신의 이상을 선언하는 상징성 짙은 텍스트에 해당한다



황인란_영혼의 집-푸른 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90.9cm_2019


어찌보면 황인란의 그림은 다분히 도상적인 그림에 해당한다. 여자, 새, 꽃, 숲이란 몇 가지 기호들이 결합되어 지속적으로 배열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모종의 서사를 직조한다. 저 기호들은 단어가 되고 그림은 문장의 형식을 취한다. 또한 문장과도 같은 그림들은 상징성 짙은 이미지를 거느리면서 출현한다. 그 그림들은 자신의 자화상에 해당되어 늘상 자신의 삶을 추스르는 경계의 지점에서 작동한다. ● 그렇다면 작가의 그리기는 다분히 수행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천적인 작업인 셈이다. 작가는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구해야만 할 인간으로서의 어떤 당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도덕성에 근거한 선함의 추구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한다. 그러니 이 작가의 작업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지 알 것도 같다.



황인란_영혼의 집-세계의 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5.1cm_2019


결국 작가의 그림은 그러한 선함과 아름다움의 실현에 방점이 놓여 있다는 생각이다. 활짝 핀 꽃과 잎들로 무성하고 울창한 정원, 그 어딘가에 위치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과 마냥 조심스러운 자세, 영혼의 상징이자 지상계와 천상계를 떠도는 새들은 화면 안에서 작가가 상정한 순수와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설한다. 이 가설에는 특히 성실하고 극진한 공력이 희생처럼 얹혀져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서 이미 그 종교적인 수행성은 마치 의식처럼 실현되고 있다. 꼼꼼하고 치밀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실적 묘사, 그리고 물감에 만족하지 못하고 연필 터치를 통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 선 하나하나로 이루어야만 하는 경지가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 작가의 성정에서 출현하는 그림이자 자신이 설정한 생의 원칙에서 나오는 그림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점이 황인란 회화의 엄격함과 반듯함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 박영택



황인란_봉인된 시간-침묵의 알레고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_112.1×162.2cm_2018


작가로 산다는 일은 – 오랜 침묵과 긴 노동, 건조한 호흡 등을 요하는 고되고 힘든 과정이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2019년 봄) ■ 황인란



Vol.20190403h |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영원과 하루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2015_0415 ▶ 2015_0428

 

 

황인란_영원과 하루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146×492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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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사색과 신념의 평면 ● 회화에서 투시, 음영, 심도 등을 없애는 게 예술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그것이 19세말과 20세기 초 서구 회화론이었다. 그러다 60년대에 와서는 화면 자체보다 화면을 만드는 안료까지 예술의 진실로 만들었다. 포스트모던을 지나면서 이러한 모든 예술적 전복과 비판은, 사실 좀 지겹기도 하다.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텅빈 제스처 같은 작품들이 컨템포러리의 우량주였던 시대를 지나왔다. 그 자리에 지금 무엇이 있는가. ● 20세기 초 사라진 음영은 황인란의 평면에서 작품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으로 되살아난다. 담이나 건물의 벽면을 배경으로 나뭇잎과 나뭇가지의 그림자, 반쯤 열린 창문과 창틀, 파드득 날갯짓 하는 새, 언어와 기억을 상실한 듯한 인물 등이 그려져 있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제목처럼「영원과 하루」는 고요와 적막의 풍경 혹은 인물화다.

 

 

                                                              황인란_영원과 하루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97×162cm_2015

 

 

우선 청색 바탕을 기저로 하면서 화면의 전체 배경이 되기도 하는 벽면은 치밀하게 구성된 가로와 세로선, 사선으로 구획된다. 그 위에 그려진 새와 인물, 나무 풍경은 평면적인데 아마 캔버스가 벽면 역할을 부여받음으로 인해 그 위에 새겨진 그림자가 각인된 효과 때문이지 싶다. 또 벽면에 그려진 선들은 한 공간 속에 그려진 개별 사물들을 미묘한 차이의 시간 속에 앉힌다. 실루엣이나 그림자로 표현된 나뭇가지나 나뭇잎 등은 계절과 바람 등 시간이 흐르는 느낌을 준다. 새의 날갯짓은 움직임의 표현으로 인해 그 화면의 주위 공간에 떨림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파장이 멀찍한 인물에게까지 가닿진 않다. 그래서 화면 내에서 인물은 외롭다.

 

                                                        황인란_피안의 세계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112.2×162.2cm_2015

 

 

마치 단조로워 보이는 청색 바탕의 벽면은 여러 겹으로 덧대고 흘린 흔적으로 시간성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작가 자신이 캔버스와 노동하고 투쟁하면서 보낸 시간을 동시에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작품 형식이 되었다. 작품의 이미지들이 풍경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고독이라는 원형적인 심리를 품게 만든 것은 이러한 미적 형식을 버리지 않아서다. 평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구상을 그린 힘겨움은 아마 작가의 신념일 테다. 무상한 것들을 거머쥐어 간직하고, 집중하고 응시하여 화면에 새기고, 다시 그것과 일체가 되어 보는 것, 이는 사색과 신념의 평면이다.

 

                                                             황인란_피안의 세계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80.3×130.3cm_2015

 

 

고독을 꿈꿀 권리"나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고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따금 천국처럼 그것을 꿈꿀 권리가 사람에게는 있을 것이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고독을 꿈꿀 때가 있다. 그러나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두 천사가,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언제나 금하였다. 한 천사는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고, 또 한 천사는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진실로 사는 것은 몇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까뮈,『안과 겉』 에서)

 

                                                                        황인란_영원과 하루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112.1×193cm_2015

 

고독은 어쩌면 영원성과 맞닿아 있다. 고독과 침묵이 조화롭게 배치된 실루엣의 세계로서 황인란의 견고한 평면은 온갖 부조리와 불의, 악다구니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림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구체적인 현실을 대비시켜서만 한정지어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모호함과 혼돈, 형식과 의미가 과잉된 시대에 염증을 느낄 때 우리가 눈을 돌리는 것은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 자체, 사랑 혹은 고독의 시원, 시기와 질투의 본연에 대해 투명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생이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18세기 낭만주의를 소환하는 경우가 그렇다. 변화무쌍하고 아우성의 현실에서, 온통 새롭다 못해 새로움이 지겨움이 된 현대예술에서 원형의 욕망은 영원성과 맞닿고 이는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미적 신념이 된다. ● 도덕과 종교, 정치적 저항이 있듯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예술적 신념 혹은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황인란이 추구하는 침묵과 고독으로 동결된 이미지는 현실의 아우성들로 덧난 악다구니의 하루에 영원이라는 순수한 시간성을 부여하는 거 같다. 순간은 소중함으로 인해 영원하다고 말이다. 사실 우린 모두 청명한 날을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다. ■ 정형탁

 

 

                                                        Vol.20150415h |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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