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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