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 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 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 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 귀가 막혔다

역사를 중시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사진, / 조문호

 

선물받은 달항아리와 숫기와를 집이 좁아 어디 둘까 걱정했는데, 다 제자리가 있네.

 

울산대학교 맞은편 길가에 '템테이션'이라고 적힌 조그만 간판에
흑인 가수와 소녀가 정답게 춤추는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어두컴컴한 지하계단을 내려가면 마치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소굴처럼
음산한 분위기에서 엉뚱하게도 이화중선의 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중늙은이 혼자 책을 읽다 돋보기 너머로 올려다 본다.

그가 바로 서양화가 황성건(60세)씨다.
청년시절 부터 그림과 음악에 미쳐 집시처럼 떠돌다가 십 팔년 전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한 때 중학교에서 미술선생도 지냈고, 신촌에서 "장미빛 인생"이라는 카페를 운영한 적도 있고,
조경과 실내장식에도 손을 댓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화가다.
지금도 혼자서 손님받고, 음식내고, 계산하는 1인 3역을 하지만
손님이 없다보니 논어에 빠졌다가, 음악에 흥을대다, 결국은 그림을 그린다.

70년도 중반 그를 만나 십여 년을 동거동락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 에덴공원 "난향"벽에 밥 딜런 초상을 그리던 모습, 음악에 취해 조는듯 눈을 감은 모습,
여린 송아지 눈망울처럼 애잔한 눈빛으로 미녀들의 마음을 흔드는 모습들이 아직도 새록 새록하건만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나보다.
서리 내린 머리의 늙은 땡초 행색은 그래도 보아 줄만하나, 술까지 약해져 맥주 몇병에 횡설수설 하다니...
파라만장했던 청춘사업도 이제 물건너 가는것은 이닌지?

어쩌다 한번 들리면 그림 위에 덧칠을 해, 딴 세상을 만들어 사람 기를 죽인다
갈 때마다 다른 분위기의 새 그림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내 머리에 박힌 그림들이 사라지는게 안타까워 사진이라도 찍어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오래전 부터 했다.

30여년동안 떠 돌아 다니며 그가 그린 벽화 수가 헤아릴 수 없을진데,
세상이 진화하여 사라진 벽화들을 복원해 낼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굴에서 유물이 발굴되듯 벽화들이 환생하는 그런 허망한 꿈도 가끔 꾸어본다.

황성건은 장사법도 휘안하다.
아무리 주인 마음이라고 손님을 손님같이 보지 않는다.
세상에! 손님이 안주를 시키면 "귀찮으니 그냥 술만 마시라!"는 주인이 어디 있을까?
매사 그런 식이니 학교 앞인데도, 학생들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가끔 선생들이나 앉아 병나발을 불고있다.

그렇지만 사람 하나는 괜찮다.
행여 울산에 가시는 걸음이 있으면, 못 이긴척 황성건의 유혹에 한번 넘어 가심이 어떨지..

유혹 전화번호 052- 247-40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