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지우려 해도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단 방안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려 나섰는데,

불난 지 일주일만의 인사동 나들이였다.

 

지난 30일 오후 무렵, 정동지와 전시 보러 나갔다.

 

마침 ‘한국펜화가협회’ 단체전이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지난 1월 전시를 목전에 두고 돌아가신 김영택화백이 생각났다.

 

그 분이 창립한 ‘한국펜화가협회’ 회원전이 벌써 10회를 맞았더라.

 

아직까지 명예회장으로 남아있는 고)김영택화백을 비롯하여

구본옥, 권창용, 김경희, 김나현, 김선옥, 김애선, 김욱성, 김중섭,

김현석, 박영정, 손상신, 신미화, 안승일, 안충기, 윤희철, 이승구,

이지승, 이호진, 임동은, 장병수, 정상용, 조명혜, 허진석씨가 참여한 회원전인데,

경인미술관 1관 1-2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흑백사진을 대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많은 필선들이 살아 움직이듯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양의 먹물과 서양의 펜이 만나 순백의 화폭을 수놓고 있었다.

 

펜화는 다른 그림에 비해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섬세한 펜 자국들을 보자니 내 몸의 주리가 틀리는 것 같았다.

대단한 인내의 소산이었다.

 

사진 같은 정교함이야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룰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감정이나 사유를 집어넣기는 유화에 비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대개의 출품작이 오랜 세월 그려져 온 풍경이나 고건축을 소재로 했다.

 

날씨나 세월의 궤적을 묘사한 박영정씨와 장병수씨 같은

작품 외는 너무 많이 본 펜화라 좀 식상해 보였다.

 

오히려 디자인적인 구성의 김중섭씨와 김현석씨 작품이 돋보였다.

 

기존의 관념을 깨고 작가적 감성을 드러낸 이지승씨 작품도 좋았다.

 

사람을 좋아해 그런지 몰라도 인물 눈동자 묘사로 감정을 드러낸

김경희씨 작품에 애착이 가고, 임동은씨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임동은씨는 코로나 방역에 혼신을 쏟는 정본부장과 방역 요원의 얼굴들을 그렸는데,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메시지가 어떤 멋이나 기교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펜화의 정수보다 작가의 문제의식을 더 중시하는 개인적 편견인지 모르지만...

 

이 전시는 5월 4일까지라 이틀밖에 안 남아 서둘러야 한다.

 

전시장에서 나와 한동안 인사동을 돌아다녔는데,

아는 분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유목민’은 시간이 일러 문이 닫혔고,

돌아가신 강민 선생께서 자주 갔던 ‘포도나무집’은

문 닫은 지 오래되어 마치 폐가 같았다.

 

도처에 문 닫은 술집이나 가게들이 즐비했다.

코로나가 끝나 정상을 되찾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전시 개막식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나고 싶고,

함께 어울려 술도 한 잔 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신혜식의 수락산 소나무

동양의 농익은 먹물과 서양의 금속성 펜이 만나 순백의 화폭위에서 섬세하게 피어난다. 펜으로 그린 그림 펜화. 멀리서 보면 흑백사진을 보는 듯하지만 가까이 가면 수많은 가느다란 선들이 살아 움직이며 하나의 그림언어를 들려준다. 그만큼 펜화는 감상하는 이들에게 작가의 예리한 눈길과 정성이 백지 위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경험을 안겨준다.

펜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펜화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함께 모여 결성한 한국펜화가협회(회장 김영택)가 새 봄을 맞아 정기전을 연다. 2011년 6월 창립전을 가진 후 매년 꾸준히 개최해온 정기전이 올해 5회째를 맞는다. 4월1일부터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 미술관(02-733-4448) 제2전시실에서 열린다.

25명의 작가가 충절과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비롯해 전통 건축물의 속살과 주변의 익숙한 풍경, 얼굴 등 한국적 소재를 0.1mm의 선으로 풀어냈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빈 틈새 없이 꼼꼼하게 빚어내는 작가의 섬세한 눈길과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입체적 형상 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까지 알게 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면서 고고한 자태에 반해 소나무를 고집스럽게 그리고 있는 신혜식 작가는 “장소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자라는 소나무의 생명력을 애정 어린 눈길과 섬세한 손을 통해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담아냈다”면서 펜화의 매력에 대해 “검은 먹선으로 하얀 종이 위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 속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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