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23일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 이재갑 사진전 ‘역사, 사진을 만나다’ 개막식에 갔더니, 전시와 함께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이란 사진집이 나왔더라. 난, 가난한 사진쟁이라 비싼 사진집은 엄두도 못내지만, 전시 때는 10,000원에 팔아 꾸준히 구입해 온 사진집이다. ‘눈빛사진가선시리즈로 나오는 이 책은 내용도 알찬데다 판형이 적어 휴대하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집을 펼쳐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사진집은 베트남전에서 학살된 원주민들의 증오비를 찾아 기록한 책이었다. 한국에는 월남전 참전 기념비가 백여 개나 되지만, 대신 베트남 학살지에 세워 둔 증오비도 숱하게 많았다. 내 나이와 비슷한 세대야 월남전에 직간접으로 관여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부분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원주민들이 한국군을 증오하는 것은 미국이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을 일으키고 끌어들인 것도 그들이지만, 원주민들과 직접 마주치는 마을 수색작전은 대부분 한국군에 맡겼다고 한다. 반공이념이 확고한 국가관과 낯선 환경, 그리고 전쟁이라는 긴장감 속에 전개된 수색작전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 각 지에 세워진 증오비의 대부분이 한국군의 만행에 대한 기록과 죽은 이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이 사건을 천대만대 기억하고 잊지 말자는 내용이라 한다. 물론 참전한 한국군도 오천여명이나 사망하고 만 여명이 고엽제와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죄 없는 원주민들의 억울한 죽음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당시 한국군 학살 유형 가운데 전략촌 학살이라는 것이 있었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촌이란 게릴라가 아닌 순수한 양민들을 전략촌이라 부르는 철조망 안으로 몰아넣고, ‘철조망 밖은 모두 게릴라라는 흑백논리로, 주민을 힘으로 다스리기 위한 강제이주정책이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이 전략촌은 마을이라기보다는 포로수용소처럼 만들어 운영하였다고 한다. 한국군이 원주민을 많이 죽인 유형의 하나였던 전략촌 학살은 비참했다. 한국군이 사상을 당하면 전략촌내에 수용된 열 명을 끄집어내 보복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베트콩들의 심리적 효과를 노려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증오심에 불타게 했던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비실비실한 보충역이라 실전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은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들로부터 한국군의 용맹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민간인을 학살한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한 친구는 베트콩을 많이 죽인 포상으로 특별휴가까지 왔다며 선물을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그 때만해도 격전 속의 전과라고만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많이 죽였다고 포상과 함께 특별휴가까지 보내 준다는 것은 그만큼 학살을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잔인하게 죽였다는 무용담을 입버릇처럼 자랑한 것으로 보아 학살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집에 실린 구수정씨와 유이탄 학살의 생존자인 찐프억의 구술 인터뷰를 보니 더 귀가 막혔다. 한 번 들어보라.

“두려워서였을 거야. 그러니까 사람 그림자만 비쳐도 마구 총질을 해댄게지. 반대로 베트콩들은 침착했어. 그들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명중에 확신이 설 때만 방아쇠를 당겼지. 총알 하나라도 아껴야만 했으니까. 총소리만 들어도 한국군인지 베트콩인지 알 수 있었어. 베트콩 총소리는 ”따콩!“했는데 한국군 총소리는 ‘드드드드득 꽝’하고 들렸지. 미군들은 항상 통역병을 달고 다니며 베트콩 용의자를 가려내 포로로 잡아갔지. 그러나 한국군들은 확인도 않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갓난아이든 가리지 않고 쏘아 죽였어”

“어차피 당할 학살이었다면 차라리 미군에게 당하는 편이 낫지.. 밀하이에는 미국에서 동네마다 학교도 세워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개인 보상도 다 했어. 아, 말해 뭐해. 밀라이 위령제는 미국 참전 군인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고 시민들도 줄줄이 와서 참배하고... 우리가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도 어떻게 한국 사람은 45년 동안 코빼기도 한 번 비치질 않냐고!”

부끄러웠다.
나라가 반 토막으로 갈라지며 생겨 난 이데올로기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우리민족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든 것인가? 제주4,3사건에서 부터 여수반란사건 등 모든 잔인한 학살은 거기서 비롯된 것 아니던가?

늦었지만 과오를 반성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원주민들에게 사죄하자.
그 참상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사진집도 구입하고, 베트남에 갈 기회가 있다면 증오비를 찾아 추모의 꽃송이도 올리자. 우리민족이 그토록 잔인한 민족은 아니잖은가?

글 / 조문호 (사진집에 게재된 이재갑 작업노트와 정훈 해설에서 일부 옮김)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다섯 번째 사진가,
이재갑의 ‘역사, 사진을 만나다“ 전이 지난 23일부터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전시와 함께 ‘눈빛사진가선 24호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집도 출판됐다.

지난 23일 오후6시30분부터 열린 개막식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김남진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씨를 비롯해 구자호, 엄상빈, 정진호, 김문호, 박신흥, 성남훈, 이상엽,

강제욱, 마동욱, 방종모, 하지권, 이경문, 정재열, 노승장, 이은숙, 윤승준, 남 준, 곽명우,

이한구, 오혜련, 이혜숙씨등 많은 사진가 들이 참여해 전시를 축하했다.

개막식에서 사진비평가 이광수, 이규상대표가  말했듯이. 사진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들이 독버섯처럼 피어 있었다.
일제의 잔재와 한국전쟁에 의해 희생된 동족의 처참한 학살현장,
베트남에서 저지른 잔혹행위와 우리민족 치욕의 현장들을 샅샅이 찾아냈다.


이재갑의 사진들은 자극적이거나 이상적으로 치장되지 않고,
조용히 대상을 관조하며 사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사진작업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이면을 조명했다.
정면에 기록된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고 묻힌 침묵의 역사였다.
바로 국가가 감춘 치욕의 역사였다.


또한 사족을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울림이 더 크다.
울분을 삼켜야 했던 사진가의 감정이 보는 이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이건 예술지상주의에 빠진 사진가들에 대한 일대 경종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부터 광대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무대 뒤의 쓸쓸한 풍경을 보여주며 사진판에 등장했다.
모두들 무대의 화려함에 관심 가질 때, 그는 뒤에 숨겨진 것들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적 소수인 혼혈인 역시 냉담하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세상에 항변했다.
경산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현장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과 일본에 흩어진 조선인들의
유산 작업, 베트남의 증오비 등 하나같이 패자의 한을 들춰냈다.

그는 머리로 찍은 게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작업해 왔다. 
상처투성이의 현장과 정면으로 맞서는 아픔 또한 컸을 것이다.
그 트라우마에 벗어나려 시작한 ‘뇌안의 풍경’ 역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건 기록과 기억의 역사를 넘어 개인의 주관적 기억을 담은 역사였다.   

가슴아픈 역사를 담은 대 서사시,  이재갑 ‘역사, 사진을 만나다“ 전은

오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 발행, 12,000원














개막식과 뒤풀이의 이모 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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