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해 동안 '갤러리브레송'에서 진행한 '이 땅의 고수를 찿아서..'


2018년 03월 12일 (월) 03:02:24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2016년부터 매달 두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사진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이광수 교수가 한국현대사진가 열 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를 펴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무하였다는 사실이다. 평론가들이 외국사진가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해가며 거론하였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이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사진을 무기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었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없애고, 패거리도 없애는 대동의 사진세계에서 멋지게 노는

이 땅의 진정한 고수를 찾는 놀이로 시작되었다"고 저자 이광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카메라는 칼이다'저자 이광수교수 Ⓒ정영신


사진을 전공하는 교수와 작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가론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학자로써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역사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듯 각자 자기의 고유한 역사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평생 우리나라 문화와 생활상을 기록해 온 사진가들의 작가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 '카메라는 칼이다'의 사진가들과 저자인 이광수교수,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 Ⓒ정영신


다른나라 사진가론은 줄줄 외면서 우리나라작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해오고 과거의 진실을 어떻게 발견해 왔는지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에 통분했다.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었다면 국내 사진가에 대해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여 이광수 교수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최민식 작가론이다.





이광수 교수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적인 시간이 응축된 사진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내었고, 그의 예리한 집도에 의해 작가들의 심중에 묻힌 비장의 언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이자 사진비평가로.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여년 넘게 사진비평에 혼신을 쏟아왔다.



▲ 강정효작가의 '유해발굴'



이광수 교수는 “작품이 왜 좋은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어떤 사회적, 문화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평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해 작가론을 쓰기시작 했다”고 말했다.



▲ 권철 작가의 '가부키초'


또한 인맥이나 학력등을 배재한 채 50대 이상으로 30년 가까이 고독하게 자기작업만을 고집하는 사진가를 찾아내는 일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이 맡았다. 그야말로 이 땅에 숨겨진 ‘사진’ 고수를 찾아 소개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


김남진 관장은 사진가를 찾아내고, 이광수교수는 매달 50매에 달하는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면서 갤러리 브래송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를 진행한 것이다.



▲ 김문호 작가의 '온더로드'


비평가의 책무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해석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 사진계에 이렇다 할 작가론 한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는 의미가 있는 책으로 사진보는 것을 넘어, 사진을 읽게 함으로써 책에 나온 사진가의 진면목을 독자스스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김보섭 작가의 '청관'


3부로 구성된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에 권철, 신동필, 최영진, 강정효작가, 제2부는 ‘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에 조문호, 김보섭, 문진우, 김문호, 이재갑, 이영욱작가, 마지막 제3부에는 존재와 예술을 그리는 파인 아트작가로 고정남과 이수철작가를 논했다.



▲ 문진우 작가의 '내 마음속의 다큐 한 장'


‘독대’의 권철사진가는 “도꼬다이.... ‘홀로’의 의미가 강해 사진가 권철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고 쓰고, 이어 신동필작가를 논하면서 “신동필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다. 그는 투사로서 민족, 자주, 반미, 통일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리지도, 시비 걸지도 않고 대의를 따라 함께 걸었다”고 평하고, 최영진작가론은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고 있다며, 죽어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고 했다.



▲ 신동필작가의 '또 다른 가족'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를 담은 강정효는 “유채꽃 노란 물결에 배어 있는 농민들의 땀을 읽어 주십사 하는 목소리를 낸다. 강정효는 제주의 모든 것을 담되, 그 안에 사람이 우선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 이수철작가의 '화몽중경'


인본을 이야기하는 조문호작가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라며 조문호에게 이말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를 보여준 김보섭 작가는 “그는 사라져 가는 세계를 당당하고 아름답게 본다. 그 위에서 그가 만든 포토제닉한 이미지는 감성으로서 독자들이 과거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더 크게 열어 젖힌다”고 쓰고 있다.



▲ 이영욱작가의 '자유공원'


카메라불사 카메라 40년의 문진우 작가는 “사진의 작품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로 오래됨에 있다며 찍어놓고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에 오래됨이 생긴다. 누구든, 그 오래된 사진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혼자 바보가 되네’의 김문호 작가는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많고, 사유가 깊은 다큐사진가일수록 그 재현 방식의 이동 폭 이 넓다. 김문호 작가가 그 대표적인 사진가다”고 작가론을 펼쳤다.



▲ 이재갑작가의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의 이재갑작가는 “기록할 수 없는 그렇다고 토해낼 수도 없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 이 기억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작업한다”고 평했다.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의 이영욱 작가는 “이영욱 사진은 기록에 대해 시비를 거는 메타기록이다.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해석에 의한 기록이 아닌, 세계본질에 대한 기록이다”고 쓰고 있다.



▲ 최영진작가의 '서해안'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에 정해진 것은 없다’의 고정남작가는 “답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가치와 의미로 된 규정도 없고, 모두가 있는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나 자신만의 세상을 누벼보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누는 이의 것이기도 하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의 이수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을 바친다”고 논했다.


▲ 조문호작가의 '동자동 노숙인'



카메라는 칼이다’의 저자 이광수교수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사진의 역사가 1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겠는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숨어있는 현대사진가 12명의 작가론을 해석하고 비평한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 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2 -

최영진, '공생(共生)을 묻다' 

전시 : 2016년 2월 19일부터 29일까지 /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사진을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헤아려, 그것을 즐기고  소통하는 곳.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평등한 곳으로 오직 사진으로 이야기한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무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진정한 고수를 찾는 사진놀이다. "

 


[최영진論]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광수 (사진비평가 /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최영진은 20년 가량 작업한 것들을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전시와 책으로 내고 있다. 처음 세 딸과 부인을 소재로 한 '네 여자'를 필두로 갯벌, 밤, 새만금, 서해안, 대공(大空) 등을 소재로 하여 생태와 자연을 말하는 작업을 해왔고, 지금은 서해안, 섬, 새만금을 동시에 작업하면서 산에 대한 작업도 같이 하고 있다.

섬과 바다, 간척지와 땅, 산과 도시 그리고 문명이 엮는 장대한 서사시를 때로는 바다의 시선으로 때로는 땅의 시선으로 때로는 산의 시선으로 보는 작업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도시와 문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다를 보고, 산을 보아 왔다. 그때 산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문명에 의해 대상화 된 존재다. 최영진의 사진은 그런 이분법적, 분별적, 문명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다.

도시에서 산을 바라보지 않고, 산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될까?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일까? 바다가 인간 욕망의 배출구로 소비되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산이 문명을 낳고, 바다가 문명을 낳는 모태인데, 그 모태를 소비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해 사유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지는 작업이다. 


  최영진_네 여자_1997~2000



최영진은 전라도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겐 서해안 갯벌과 바다가 추억의 공간이자, 돌아가고 싶은 귀소(歸巢)다. 지금의 작가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바다 곁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와 갯벌은 곧 자연이다. 달리 설명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자연을 자연의 시각으로 담으니, 그의 작업은 결국 자연에 대한 헌시가 된다.

바다가 산보다 위대한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노자의 생각을 사진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굳이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유한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인위적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예술의 방편을 따를 이유도 없다. 노자의 자연을 사진으로 말하려면 쉬운 사진이 좋다. 그래야 여러 쪽에서 울림이 생긴다. 결정적 순간이라든가, 기존 프레임의 파괴, 예리한 운동성 같은 특별한 (혹은 창조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세밀하게.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도덕경> 56장

사진가 최영진이 자연과 생태의 삶을 주제로 삼아 하는 작업 가운데 말하기 방식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해안'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에 전시하고 <West Sea of Korea>라는 이름으로 낸 책이다. 이 책은 멀리서 본 어느 서해안의 해수욕장 사진 몇 컷으로 시작한다. 아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나온다.

주로 하늘 여백이 넓고 빛이 은은하고 사람들이 아주 작게 나오는 이미지들인데, 흔한 키치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흔한 동양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서양의 추상화적 풍경화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재주의 사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책의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소용돌이가 한 번 인다.

시커먼 하늘 밑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가 나오는데, 누가 봐도 어? 이게 뭐지?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노자가 말하는 현공(玄空)일까? 그리고 곧 이어져 느닷없이 죽은 철새 한 마리 대가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섬뜩하다 못해 소름 끼친다. 그리고서는 또 죽은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가 나오면서 책이 끝난다. 끝 부분의 사진 몇 컷 때문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최영진_ 서해안 새만금,2004~2008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쉽게 간파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이런 작업의 경우, 책이나 전시장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 각 파트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에 주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의 경우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끝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하지만, 난 첫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한다. 첫 부분의 해수욕장 풍경 사진들은 평화스럽고 아늑한 느낌이다. 반면에 끝 부분의 사진들은 죽어서 썩어가는 새와 물고기라 심란하다.

첫 부분 사진들만으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읽을 수가 없는 반면, 끝 부분의 사진들은 그것만으로도 작가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첫 부분 사진들은 독자를 고의로 안심시키는 일종의 기만전술로까지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책 첫 부분의 사진들은 이발소에 걸어놓으면 딱 이발소 사진이고, 응접실에 걸어놓으면 딱 살롱사진이다.

그렇지만 죽은 새와 물고기 사진들과 함께 보면 작가주의에 충실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 하나 하나는 애호가에 의해 구입되어 단독의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묵시록의 메시지는 소거되어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감상 미학이 발생한다. 전적으로 독자가 주체가 되어 사진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닮는다.' - <도덕경> 25장

고대 힌두 현인들은 땅을 품이 넓은 자라 했다. 그리고 그 품이 넓은 자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어머니를 암소로 보았다. 그들에게 땅은 만물에 생(生)을 주고 기(氣)를 주는 암소였다. 그런데 그 대지의 어머니 신 쁘리트위(Prithvi)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 주는데, 인간은 그를 착취한다.

땅은 모든 식물을 낳게 하는 어머니다. 끝없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는 생명의 모태다. 곡식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낳게 하고, 죽으면 그것을 품어 다시 또 다른 생명으로 올려주는 너른 터다.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고, 그것이 윤회하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 땅, 어머니 대지가 곧 사진가 최영진의 갯벌, 라 마르(La mar)다.



 최영진_라 마르, 살아있는 갯벌, 2000~2003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모두 현미경적이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살갗 느낌이다. 어떤 것은 살갗이 튼 자국 같기도 하고, 모세혈관 같기도 하고, 모공 같기도 하다. 숨을 쉬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낸다. 사방이 꽉 막힌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생명을 잉태한 태초의 땅을 느끼고, 위로 열린 하늘 공간으로 나뉜 프레임으로는 코스모스로 가기 전 카오스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갯벌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어디론가 가는 운동을 보여주는 듯, 힘이 넘쳐흐른다. 프레임이 막혀 있든, 열려 있든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꿈틀거리면서, 갯벌 위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없어도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얼마나 작은지 우리의 눈과 인식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작은 존재들이 이루는 전체를 인식할 수는  있다.

어머니의 손길 하나만으로도 어머니의 우주적 사랑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분은 보되,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전체를 보되 부분을 보지 않는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갯벌을 파괴하는 것이란 곧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뭇 생명체를 죽이고 나아가 대지의 순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인(因)과 과(果)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고, 모든 존재는 그 안에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법칙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현대 문명이 지금같이 자연을 대상화 하고, 약탈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만 몰두하고 탐닉에 빠진다면 결국 그만큼 자연은 그 명(命)을 재촉하게 된다. 철저한 되갚음, 응보(應報)의 세계다. 그 자연의 보복을 경외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진가 최영진은 지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어서다.' - <도덕경> 2장

최영진은 분노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처리해버린 새만금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분노를 열정으로 쏟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격문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직설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로 넌지시 말한다. 고인돌을 찍은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는 그러한 그의 사진 언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고인돌 위에 끼어 있는 이끼, 돌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틈이 만들어내는 구멍,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 그것들이 빛과 더불어 무시로 그려내는 파노라마 같은 그림, 소나무 밭을 주위에 두고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을 초록으로 만들어버린 오브제 ... 그 어디에도 시간의 흔적이 박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고인돌을 작업한 또 다른 사진가 권태균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권태균의 고인돌 작업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의 사진은 고인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풍경이다. 따뜻한 인간미가 나는 포토저널리즘에 입각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다. 그런데 최영진은 다르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이 있지 않다. 자연에 대한 사유만 있다. 냉정하다. 사람의 역사보다 더 큰 차원의 자연에 대한 지구사적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최영진_돌,생명을 담다_2009~2011


최영진의 사진은 전반적으로 내러티브를 잘 만들지 않는다.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가 그렇고, '라 마르La Mar'가 그렇다. 굳이 말 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사람 사는 모습이 들어가지 않고, 그것을 파괴하는 현장을 이성적 시선으로 분석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유를 나누는 방식이다.

고인돌이 사람들 사는 마을에서 놓여 있는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고인돌을 카멜레온의 보호색을 보여주 듯, 주변의 자연과 더불어 있는 듯 없는 듯 그 경계도 찾기 어렵고, 분별하기도 어려운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은 문화를 낳은 자연을 따르는 방식이다. 갯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내러티브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서쪽 바다, 새만금'에서다. 이는 다른 작품과 달리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래서 내러티브가 있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장편 서사시에 '새만금'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 하나를 취해 끼어 넣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조개를 채취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주인 따라온 개도 보인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에서나 보일 법한 고급 승용차도 보이고, 그 차가 남긴 바퀴 자국도 있다. 서서히 방파제는 쌓이고, 갯벌은 갈라지면서 물은 빠지고 뭇 생명들이 죽어가는 곡소리가 들려온다. 사진가는 갯벌이 어떻게 죽어가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 배를 가르듯이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뻘은 메말라 갈라지고, 그 속에 감추어진 생명체들은 불 속에 타들어가듯이 최후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그의 사진은 기호와 상징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자연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호나 상징은 대상화를 통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자연은 대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어디를 보더라도 그가 말하려는 바, 생태학에서 흔히 말하는 근원, 회귀, 순환, 복잡계 등을 드러내는 기호화 된 이미지는 없다.

사진이 자연을 담고자 한다면, 그 방식은 자연의 속성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결국 그의 사진은 노자의 미학을 – 만약 이런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 사진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노자가 보는 미(美)와 추(醜)를 노자가 말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노자가 말하는 비어 있음과 유기체의 방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공은 여백을 꽉 채우고, 자연은 여백을 만들어낸다. 인공은 부분을 잘라서 인식하고 자연은 부분을 연계시켜 인식한다. 최영진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대지(大地)와 대해(大海), 대공(大空)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상향을 말하고자 한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그의 사진을 보는 내내 'West Sea of Korea'에 나오는 죽어 다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진을 통해 난,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죽은 물고기의 몸이 썩고 말라 부서진 모습이 흡사 꽃이다. 부서진 자연을 말하려 산화해 버린 꽃. 느닷없이 그 이미지가 화가 최병수의 '너의 몸이 꽃이 되어'에 중첩된다.


미군의 폭격에 죽은 아들이 아비의 품 안에서 꽃으로 산화하듯, 파괴된 새만금 갯벌에서 죽은 새 한 마리가 말라버린 죽음의 땅 위에서 꽃으로 산화한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따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안에 추함이 있고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바다가 바다로서, 갯벌이 갯벌로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보지 않았던가, 고인돌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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