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너무 바빠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지경이다.

전시 치루느라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는데, 또 다시 전시 아닌 전쟁을 치루어야 할 판이다.

여기 저기 바쁘게 쫓아 다니다보니 반가운 사람도 많이 만났다.

 

어제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으로 교정보러 갔는데, 사진평론 하는 진동선씨가 와 있었다.

둘 다 부산에서 올라 온 처지라 어찌 사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고생하다 살아났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진평론집 출판을 위해 왔다는데,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사진집이 나와 전시까지 준비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16일부터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화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24일부터 나의 '인사동 이야기'도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얼마전 노광래씨가 추진한 ‘인사동 이야기’ 복간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현수막 전시 때 싸 잡아 출판 기념회까지 열 작정이었는데,

한 분이라도 더 찍어 제대로 된 개정판을 만들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사진원고가 지체된데다 책 만드는 ‘눈빛출판사’까지 요즘 일손이 모자란다.

출판사 운영이 어려워 파주로 옮긴 후로 이대표 혼자 살림 살아가며 책을 만들어야하니

날짜 맞추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달 하순경 책이 나온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전시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적자를 무릅쓰고 내주는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사진은 못 팔아도, 책이라도 한 권 팔려는 속셈에서다.

 

문제는 전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시에 들어 갈 경비야 차지하고라도, 요즘 몸이 말이 아니다.

보름동안 전시 치루느라 퍼마신 술병 후유증으로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죽지 못해 움직이는 산송장에 가깝다.

 

그렇다고 정동지 돕는 걸 포기할 수도 없지만, 아는 분들 행사도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나?

근 한달 가까이 돌아 다니며 찍은 사진이 첩첩이 쌓였지만 그대로 처박아 둔 것이다.

이미 시기를 놓쳐 포스팅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반이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이 포스팅도 근 열흘 동안의 사진과 이야기를 짜집기 한 것이다.

 

며칠 전 정동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할 '장날' 사진을 프린트하니 좀 옮겨 달라는 기별이었다.

'스마트협동조합'으로 가보니, 때 마침 김문호씨가 와 있었다.

예술인 등록하는 일이 까다로워 도움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짐부터 옮겨놓고, 서인형이사장과 어울려 전으로 시작해 전으로 끝나는

전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이어졌다.

 

김문호씨는 나를 처음 만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에 계셨던 사진가 최민식선생을 만나러 갔더니, '서울에 있는 조문호를 만나 보라' 했단다.

그래서 이석필, 안해룡, 김봉규, 추연공, 이한구씨등 여러명이 규합하여 ‘사진집단 사실’이란

동아리를 만들었고, 김문호씨와는 충무로에서 같은 사무실을 사용한 인연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튿날은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임’을 운영하는 김선우씨가 녹번동 집으로 찾아왔다.

정동지가 ‘장날’전을 보조할 장터 소품 좀 알아보라 부탁한 모양인데,

어디에서 구했는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골동 가게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어 깜짝 놀란 것이다.

 

옛날 아리랑 성냥각에서 부터 손저울, 됫박, 체 등 귀한 것들만 챙겨왔다.

김선우씨는 안 되는 게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무조건 밀어부치는데는 선수다.

늦도록 노닥거리다 아산으로 돌아갔는데, 자정이 넘어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정영신씨와 가을 나들이 겸 장터 촬영을 떠났다.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가졌으나, 머리는 온통 눈 앞에 닥친 전시 걱정뿐이었다.

전시할 마음을 먹었다가 취소하기를 여러차례 번복하니,

정동지가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께 전화 걸어 전시할 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이제 날자가 정해졌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있는 사진 골라 전시하는 건 어려울 것 없으나, 무슨 말을 하느냐가 문제다.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인사동 정체성도 말하고 싶고, 흘러간 풍류도 되새기고 싶고,

암울한 인사동 현실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 등 온갖 욕심만 난무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내년에 마무리할 ‘인사동 풍류 40년’ 출판전 때 하기로 하고,

며칠 동안 한가지에 집중해 사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지난 5일은 아침부터 연이어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케이비에스 이석재 피디 였는데, 오늘 만날 수 없냐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다른 방면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분량의 연말 특집이라는데, 시달리는 시간보다 빈민들 내세워 잘 난채 하는게 쪽팔려서다.

동자동 사는 동안 여러 매체에서 요청해 온 인터뷰를 번번이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면한 재개발문제에서부터 고통받는 빈민들의 현실을 알려

개선하는 일 또한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동자동사랑방’ 선동수 간사장을 추천했다.

필요하다면 노숙인이나 쪽방 빈민 중에 힘든 사람을 연결시켜 주거나

그동안 찍은 스틸사진은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일단락 지은 것이다.

 

전화 온 바로는 일전에 말한 노숙인 소개도 받고 싶고,

‘노숙인, 길에서 살다’ 책을 샀는데, 사인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빛출판사' 이대표 약속이 내정되어 있어 월요일 오전으로 미루었다.

두 번째는 부산의 함창호씨가 오후 세시경 서울역에 도착한다지만,

그 또한 저녁 시간으로 미루었다.

 

녹번동에 들려 정동지를 태우고 경인선 책거리부터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진동선씨가 이규상대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대표가 파주에서 챙겨 온 교정본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더러 이름과 사진이 바뀐 것도 있으나 초판보다 편집디자인이나 내용이 새롭고 알찼다.

인사동에서 50년 동안 리어카 끈 이방웅씨와

‘그림마당민’에서 잔뼈가 굵은 미술평론가 곽대원씨 사진까지 넘겨주고 마무리했다.

 

마지막 교정은 메일로 하기로 하고, 함창호씨가 기다리는 인사동으로 갔는데,

함창호씨는 짐 내려 놓고 온다며 좀 늦겠다고 했다.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이기정, 한상진씨 등 반가운 분이 여럿 있었다.

골목에 앉아 술 마시다 보니, 벽치기 골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정동용시인을 필두로 박건, 김수길, 백승호, 정영철, 황경애, 이인섭선생까지 줄줄이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인사동 주막 골목의 진미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함창호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눈 뒤, 자리를 옮겨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작업하는 주제는 사라지기 직전의 농촌가옥과 사람이었다.

농민들 사진은 입상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기존 사진과의 차별화가 난제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농촌 옛모습은 곧 사라질 우리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한 때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을 찍어사진집을 출판한바 있지만,

20년이 가까워지니 당시의 풍경은 모두 바뀌었고, 사람도 세상 떠난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찍은 사진이 흑백사진인 반면 함창호씨 사진은 컬러사진이었다.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컬러사진의 리얼리티가 더 강하다.

나 역시 예전에는 흑백사진만 고집했으나, 지금은 컬러사진의 생생함을 더 즐긴다.

함창호씨가 페북에 틈틈이 올리는 사진을 보아 왔는데,

자연이 주는 녹색의 푸르름과 따뜻한 황토색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보다 틀에 갇히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화면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다보면 자기만의 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늦게 사진 세계에 빠져들었다지만, 기존 아마추어 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에 빠져들어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농촌에 대한 그만의 사진세계가 확립되리라 기대되었다.

 

그나저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마시다 보니 주량을 초과해 버렸다.

마침 장경호씨와 함창호씨가 비슷한 연배인데다 둘다 경남고등학교 출신이라

두 사람을 붙여놓고 줄행랑 친 것이다.

 

거지 팔자에 대리기사까지 불러 뒷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워 편하게 돌아왔다.

바쁘게 쫓아 다닌 하루였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 입에 달삭거렸지만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2017_0609 ▶ 2017_0903 / 월요일 휴관



앙드레 케르테츠_몬드리안의 안경과 파이프 Mondrian's Glasses and Pip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6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성곡미술관

협력 / 프랑스문화부_주드폼 국립미술관_디크로마 포토그라피


도슨트 / 02:00pm, 04:00pm / '문화가 있는 날'은 07:00pm 추가 진행


관람료

성인(만 19~64세) 10,000원 / 청소년(만 13~18세) 8,000원

어린이(만 4~12세),국가유공자,장애인,만 65세 이상 6,000원

단체 20인 이상 20% 할인 / 만 4세 미만 어린이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_10:00am~08:00pm*

전시종료 30분전 매표 및 입장 마감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성곡미술관은 여름특별전으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앙드레 케르테츠(André Kertész, 1894-1985)의 사진전을 개최한다. 케르테츠는 70여 년의 오랜 활동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 파리, 뉴욕을 옮겨다니며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사조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을 통해 일기를 쓰듯이 자신의 솔직한 감성을 자유롭게 담아냈다. ●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케르테츠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자신의 작업원칙에 충실했으며, 나아가 사진매체의 잠재적 표현 가능성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새로운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신속, 정확한 카메라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치밀한 화면 구성과 흑백의 농담으로 더 깊고, 세밀하게 담아내었다. 케르테츠는 어떤 사조나 그룹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때로는 그들을 앞서나가는 혁신적인 작업을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우리가 해온 것들은 모두 그가 처음으로 했던 것"이라는 말로 칭송했던 케르테츠는 브라사이Brassaï,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등 사진의 거장들을 리드하며, 향년 91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 이번 전시는 그가 일생에 걸쳐 작업한 189점의 작품들을 헝가리(1912-1925), 파리(1925-1936), 뉴욕 시기(1936-1985)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4년 필생의 작품들을 보존하겠다는 열망으로 10만 점의 원판 필름과 1만5천 점의 컬러 슬라이드 소장본을 프랑스 문화부에 기증했다. 본 전시는 그 원판으로 프린트한 모던 프린트로 구성되었다. ● "나는 빛으로 글을 쓴다." / "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해석할 따름이다." / "좋은 사진은 우리 눈에만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두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시각은 항상 이미지와 영혼 사이를 오간다." / "나는 오직 파리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파리에 갔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생활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이 있었고, 그리고 내겐 창조적 힘과 꿈이 있었다." (앙드레 케르테츠)


시기별 작품세계 - Ⅰ. 헝가리 시기(1912-1925) ● 189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앙드레 케르테츠는 1912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한 후 마치 일기를 쓰듯 전원의 목가적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했다. 특히 남동생 예뇌Jenö를 비롯한 가족들, 친구들은 작가의 모델로서 훌륭한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징집된 그는 전장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는데, 드마라틱한 전투 장면보다는 군인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 이 시기부터 케르테츠 사진에는 휴머니즘적 감수성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성의 전조가 동시에 드러난다. 사진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감성에서부터 발원하는 영감을 기반으로, 자신이 애정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풍경들을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고자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다.


앙드레 케르테츠_수영하는 사람 Swimmer Under Water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1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Ⅱ. 파리 시기(1925-1936) ● 1925년, 현대미술의 본거지인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자리를 잡은 케르테츠는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등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구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특히, 만 레이Man Ray, 몬드리안Mondrian, 브랑쿠시Brancusi, 샤갈Chagall, 그리고 콜레트Colette와 짜라Tzara와 같은 예술가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 케르테츠는 파리의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사진 작품을 출판하였고, 주요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필름과 포토Film und Foto』(1929) 국제전에 만 레이와 함께 파리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한다. 1933년 여성의 누드를 뒤틀리게 표현한 「왜곡」 시리즈를 내놓아 보다 전위적인 시각적 실험을 전개했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케르테츠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 예술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모더니즘의 실험적 조형 언어인 '거울 유희', '반사', '그림자와 복제', '전면 구성', 혹은 '야경과 명암의 대비' 등을 자신의 표현기법으로 소화하여 작업에 반영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사진적 아방가르드의 주역이 된다.



앙드레 케르테츠_포크 The Fork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8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깨진 원판 Broken Plat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왜곡 Distortions」(1933) 시리즈 ● 1930년 『뷔VU』 잡지가 카를로 림Carlo Rim 신임 편집장의 초상화를 앙드레 케르테츠에게 주문하자, 그는 편집장을 놀이동산의 '뒤틀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촬영하여 괴물처럼 변형된 놀라운 이미지를 제작한다. 이어서 케르테츠는 1933년 도색 잡지 『미소Le Sourire』의 주문을 받아 한층 더 왜곡된 여성 누드 사진을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실험을 한발 더 전진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왜곡」 시리즈를 케르테츠는 '파리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업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적 작업은 이미 '헝가리 시기'부터 일종의 '광학적 변형' 또는 '그림자의 투영'에 관심을 두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하학적 구도가 돋보이며 빛을 효과적으로 다룬 「수영하는 사람」(1917)과 「포크」(1928)는 「왜곡」시리즈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기이함과 기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여성신체의 신비로움을 깊게 탐닉한 「왜곡」 시리즈는 이미지에 대한 케르테츠의 반 사실적, 반 묘사적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축 쳐진 목과 늘어난 발, 기괴하게 뒤틀린 이미지들은 곡선으로 이뤄진 루벤스Rubens의 풍만한 여성의 몸이나 앵그르Ingres의 지나치게 긴 척추를 가진 여인의 메아리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벨머Bellmer의 절단되고 불구가 된 인형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는 초현실주의가 추적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실험과도 맞닿아 있는데, 당시 케르테츠를 비롯해 만 레이, 브라사이, 카르티에 브레송과 같은 작가들 역시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이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현실을 변형, 왜곡시키는 실험적 이미지들을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왜곡」 시리즈는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참 뒤에 재조명되었는데, 뉴욕 시기의 후반부인 1976년에 이르러서야 12컷의 왜곡 이미지로 구성된 책이 출판되었다


앙드레 케르테츠_샹젤리제 Champs-Elysé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Ⅲ. 뉴욕 시기(1936-1985) ● 1936년 케르테츠는 사진 대행사 키스톤Keystone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내 엘리자벳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계약은 1년 남짓 지속된 후 파기되었다.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 등 다수의 잡지사들이 케르테츠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사진은 대중적 이미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7년 뉴욕의 PM갤러리와 1946년 시카고미술관에서의 전시회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의 그의 생활은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적은 수익, 연이은 실패, 「왜곡」 시리즈에 대한 몰이해와 외국인으로서의 장벽 등이 결국 그에게 우울증을 안겨주었다.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케르테츠는 1947년 『하우스 앤 가든House & Garden』지와의 작업을 위해 콘데 나스트Condé Nast 그룹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지만, 주로 인테리어 사진을 제공해주던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상업적 작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1961년 은퇴를 한다. ● 아울러 워싱턴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5번가 12층 아파트에 정착한 1952년 이후 다시 작업의 열정을 되찾기 시작하는데, 아파트의 테라스에 머물며 망원렌즈의 줌을 이용하여 주변의 생활을 포착하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처럼 거리와 장소를 옮겨 다니며 시대적, 사회적 장면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광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특이한 행태와 풍경을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마치 '발견된 오브제'처럼 찾아내었다. 케르테츠에게 뉴욕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의 공명상자와도 같아서, 그 생각들을 사진이라는 메아리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직관적이고 암시적인 그의 스타일은 뉴욕의 황폐한 벽돌 담, 그림자나 철근, 외부 계단의 얽힘 속에 자신의 멜랑콜리를 주입하기에 충분했다. ● 케르테츠의 예술성은 삶의 후반에 들어서며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1959년 『인피니티Infinity』지가 게재한 케르테츠에 관한 기사는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6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순회전이 이어졌다. 또한 이즈음 그는 뉴욕으로 건너오기 전 파리에 남겨 두었던 원판 필름 상자를 찾아왔다.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접하게 된 케르테츠는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어서 발행한 두 권의 책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J'aime Paris』(1974)와 『뉴욕에 대하여Of New York』(1976)는 케르테츠가 파리와 뉴욕의 서로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겪은 갈등을 보여준다. 1977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 케르테츠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부인 엘리자벳이 전시 개막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수 제작한다. 그에 따르면 폴라로이드는 "작품의 내재적 요소를 보다 더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케츠테츠는 1985년 9월 28일 뉴욕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앙드레 케르테츠_길 잃은 구름 Lost Cloud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우울한 튤립 Melancholic Tulip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라이프Life』지 편집장은 1937년 케르테츠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의 작품을 게재하기를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케르테츠의 사진들은 우리를 반성하게 만들고 문자 그대로의 뜻과는 다른, 어떤 의미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중)성곡미술관


전시연계 특별강연회 (장소 / 성곡미술관)

1. 앙드레 케르테츠와 모더니즘 예술운동 | 6월 24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2. 앙드레 케르테츠의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사진 | 7월 8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3. 미국 현대사진에 대한 앙드레 케르테츠 | 7월 15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4. 앙드레 케르테츠의 뉴욕시기의 사진 | 7월 29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5. 포토저널리즘과 앙드레 케르테츠 | 8월 12일 (토) 2-4PM   - 이기명 (『사진예술』 발행인)

6. 스냅사진과 그 대가들 | 8월 19일 (토) 2-4PM   - 최연하 (사진평론가, 독립큐레이터)


* 당일 전시 입장권 소지자 강연회 무료 참석

* 이메일 info@sungkokmuseum.org 로 사전 신청가능

케르테츠 패스 30,000원 



Vol.20170610e |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인사동에서 부산 내려 간 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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