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예술가 무세중 ‘지랄발광’ 공연
집단 탈 변신 보디페인팅 등 벌여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어”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한바탕 ‘지랄발광’해야 합니다.”


당대 독보적인 전위예술가 무세중(78·사진)씨가 2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인사동 31갤러리에서 도깨비 난장굿판을 벌인다. 이번 굿판의 제목이기도 한 ‘지랄발광’의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뜸 두루마리 족자를 풀어내리며 자작시 ‘천서─단군의 후손들아 들으라’를 읊었다.


“조선 역사에서 탐욕은 죄악이었도다/ 탐욕은 부패를 낳고/ 부패가 은폐를 낳고/ 은폐가 폭력을 낳는다/ 너희 손에 남의 피를 가득 묻히었으니/ 천벌을 맞을 일이로다/ 손을 빌어라 검은 피를 씻어내라/ 살길은 오직 근본을 밝혀야만 한다/ 병든 마음을 수술해야 한다/ 혁명이다 명을 쇄신해야 산다/ 두 손 들어 밝은 태양을 맞이하라/ 본심본 태양 앙명인중 천지일/ 사람이 천하에 제일 으뜸이니라/ 삼인 하나님의 말씀을 삼신 할머니가 전하노라.”


지난 10년 새 두번의 간암 수술을 받은 후유증에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등으로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그를 이처럼 다시금 ‘포효’하게 만든 사건은 바로 ‘세월호’였다. 그는 지난달 14일 <한겨레>에 ‘세월호는 아직도 민족의 가슴에 침몰하고 있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해상사고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이 문제를 풀어 해법을 찾지 못하면 민족의 분단 문제나 민생의 해결도 어려울뿐더러, 정치·경제·산업·문화 전반에 고질적인 암처럼 전이되어 나라가 죽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 부패의 상징이자 탐욕에 대한 경고’라고 짚은 그는 ‘민족 참사의 무게로 받아들여 혁명의 기운으로 근본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들의 슬픔을 눈물로 나누고 굶으며 위로하는 동정도 필요하고 특별법 제정 같은 사법 수단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수많은 억울한 희생의 분노를 풀어주고,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우리 마음을 반성하고 새로 깨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택한 지랄발광의 방법은 바로 ‘탈’이다. 하지만 탈을 얼굴이나 몸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와 부인 무나미씨, 그가 이끄는 대동전위극회 회원들의 몸 전체가 탈로 변신한다. 바로 ‘통미(統美) 보디페인팅’을 공연한다. 통미는 머리·미용·의상·액세서리·소도구와 함께 온몸이 통일된 아름다움을 뜻한다. 통미분장예술연구소의 김선미 감독을 비롯한 분장가들이 참여했다. 굿판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이 땅 터줏대감들의 지킴이들로, 귀신이 아닌, 귀신을 다스리고 은폐의 탈을 퇴치하는 존재들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행동예술에 맞는 공간을 구하지 못해 작은 지하 갤러리를 빌린 공연이어서 30명 남짓이 겨우 함께할 수 있다. 공간만 제공된다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굿판을 펼치겠다는 그는 “누구보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지랄발광을 하고 싶다. 제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함께 손잡고 ‘화’와 ‘독’을 풀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도 살고 우리 민족 모두 살 수 있다”고 당부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Why]

29일까지 '지랄발광' 공연하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전위적 춤사위 반백년
풍물·쇼팽 음악 속 집단통곡… 영하에 오대산 알몸 등반…몸으로 저항과 아픔을 표현

내 예술의 뿌리는 사람
잘난 이 기리는건 傳記 작가… 弱者 편 들어주는 건 내몫, 뿌리 없는 전위는 경거망동

내 운명, 내가 운전한다
원래 姓인 金씨 떼고 巫로… 癌 다시 왔지만 갖고 놀 것… 힘과 위선에 대한 도전 계속


행위예술가 무세중(77)은 십수년 전 경기도 고양시 공터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그곳이 그의 집이다. 지난 23일 오후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잘 못 찾는 먼짓길을 따라가니 삼색 천이 휘감긴 솟대가 객(客)을 맞았다. "어찌 이런 곳에 사시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 멀리 북한산 능선 사이를 가리켰다. "저기 달이 아름답거든."대낮이라 보이지 않는 달, 그에게만 보이는 달을 가리키며 세상을 향해 반백 년간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온 그가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31갤러리에서 새 공연을 저지른다. 이번에는 '지랄발광'이다. 그는 온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도깨비로 나온다.

지난 23일 경기도 고양 자택 앞에서 전위예술가 무세중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공연 '지랄발광'은 29일까지 이어진다. / 김지호 기자

 

 

―공연명이 왜 '지랄발광'인가.

"전통 탈춤은 중간에 '하던 지랄 다 했느냐'고 묻는다. 지랄은 사회의 병폐를 말한다. 도깨비가 나와 지랄을 희화화하다가 발광(發光), 즉 빛을 보여준다. 빛을 내어 서민들이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인 그는 몸의 은유로 1980년대 암울한 시대의 급소를 내리쳤다. 1982년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라는 뜻의 '통막살' 공연 때는 풍물 소리와 쇼팽 음악을 배경으로 배우 20여명이 곡(哭)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억압된 체제에 저항하는 반(反)이데올로기의 맹폭이었다. 1990년 2월에는 영하(零下)의 오대산을 알몸으로 오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본질을 가리는 껍질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울부짖음이었다.

광산 김(金)씨 9남매의 장남으로, 보들레르와 앙드레 지드를 즐겨 읽던 푸른 청년을 전위(前衛)의 파수꾼으로 변모시킨 것은 20대 초반의 국토 대장정이었다. 무전(無錢)으로 전국을 돌며 이 땅의 맥을 찾아가다 '외국 병'을 버리고 우리 것을 섭렵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며 함경북도 끝에서 제주도 끝까지 어디에나 있는 우리 것인 탈춤에 빠져들었다. 전국의 탈춤 춤사위 500가지를 한 몸에 익힌 예인(藝人)은 그 이외에 찾기 어렵다. 민속과 민족을 연구하던 그는 1972년 '씨족의 성은 부질없다'며 원래 성(姓)인 김을 떼어버리고 무세중(巫世衆)이 됐다. 무는 하늘과 땅을 맺는 무당의 무(巫)요, 춤의 무(舞)요, 무위(無爲)의 무(無)이면서, 모든 충돌과 맞서 싸우는 무(武)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에게 전위예술은 해괴한 기행으로 보인다.

"원래 전위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앞을 지키는 것이다. 한 사회가 움직일 때 앞에 나가서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려면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우리의 뿌리는 커피가 아니다. 숭늉이나 생강차다. 뿌리 없이 전위하겠다고 나서면 경거망동이 된다."

―무세중 예술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 그중에서도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잘난 사람은 전기작가가 기리면 된다. 약자를 억압하는 힘과 위선에 도전하는 것이 나의 예술이다."

―명분으로는 좋지만, 그런 예술은 돈이 안 되는데.

"어떻게 예술가가 돈을 버나. 나는 그래서 자식도 안 가졌다. 예술하려면 선택해야 한다. 1990년대에 4~5년간 인사동에 카페를 했다. 잘됐다. 그래서 그만뒀다. 내가 거기에 묶여버릴 것 같았다."

이번 공연도 언제나처럼 무나미(55)와 함께 한다. 1983년 스물네 살이던 무나미는 남산 드라마센터 워크숍에서 무세중을 만나 "아무래도 내가 무 선생님하고 같이 살아야겠다"고 했다. 6개월이 안 돼 결혼했다. 무나미는 무세중의 아내이자 어머니, 제자이자 동지로 31년째 그의 삶에 존재하고 있다. 무세중은 "무나미는 나의 운명"이라고 했다.

―운명을 믿나.

"운명은 존재한다. 내가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다. 하지만 인생은 운명이 반, 의지가 반이다. 의지 없이 운명에 끌려가면 팔자가 된다. 나는 절대로 운명에 밀리지 않는다. 내가 운명을 운전한다."

―'통막살'을 공연하던 30년 전의 전위와 지금의 전위는 무엇이 다른가.

"그 시절에는 전위를 둘러싼 민족의 기운이 강렬했다. 지금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자꾸 사라져간다. 좋은 현상이 아니다."

―전체가 아닌 개인이 중심이 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후세에게 우리가 물려줄 단위가 튼튼해야 다른 단위하고 싸울 수 있다. 단위가 무너지면 정체성이 사라지고 허망해진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렇게나 잘 살면 된다는 강자의 궤변만 남는다. 그러면 사람이 다친다. 세월호를 보라."

무세중씨가 도깨비로 출연하는‘지랄발광’포스터 / 대동전위극회 제공


―전위를 외치는 인생은 외로울 것 같다.

"미치도록 외롭다. 하지만 그런 걸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앞을 가나. 앞을 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다."

―반백 년간 한길을 걸어왔다. 꿈꾸던 예술의 정상에 도달했나.

"도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역사에 충실하고 시간에 충실하면서 성실하게 나아갈 뿐이다. 어차피 이 길은 시간이 걸린다. 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동적 개념으로 후세가 이어가야 하니까."

그는 2003년 8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간의 70%를 절제하는 수술을 했다. 운명과도 싸우는 그에게 암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다음 달에 그는 "병마야, 봐라"는 듯, 또 공연을 했다. 2011년 암은 다시 그에게 쳐들어왔다. 지금도 무찔러가는 중이다.

―공연을 계속할 체력이 되나.

"이번이 나의 마지막 인터뷰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순리다. 하지만 순리에 따르면서 동시에 갖고 놀아야 한다. 순리에 맹종하면 맹추고 맹물이다."

세월은 그의 육신에만 새겨졌을 뿐, 확신을 무력화하지는 못했다. 암과 싸우고, 미칠 듯한 외로움에 맞서며 시대의 위선을 후려쳐온 백발의 전사(戰士)는 오늘도 마당의 솟대를 짚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달을 가리키고 있다. 공연 문의 (02)381-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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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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