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일절엔 동자동 사진 찍느라 고향에서 열리는 '영산삼일민속문화제'는 커녕 '탑골공원'도 못갔다.

봄바람에 치마가 날리는 게 아니라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만 휘날렸다.

 

그 이튿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정동지와 전시 보러 나섰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김동진의 ‘나의 살던 고향’ 부터 들렸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은 조용했다.

 

전시작들은 작가의 고향인 만덕동의 오래전 모습을 살벌한 도심풍경에 빗대어 그리워했다.

자연과 주변 환경만 바뀐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바뀌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라져버린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진가의 고향노래였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며,

고향이란 말조차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추억의 서사다.

 

이 전시는 3월 12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인규씨의 ‘산 넘어 남촌'을 찾아 인사동으로 넘어갔다.

이 전시 역시 고향에 대한 향수로, 전시장 입구에는 ‘갤러리의 봄’이란 또 다른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봄은 실감할 수 없으나, 전시장은 온통 고향을 그리는 봄 노래였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전시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정복수, 김 구, 장경호씨가 있었다.

 

작품들은 고향의 봄을 연상케 하는 소담한 풍경이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이나 초가집과 구릉들이 나열된 공간구성.

거기에 평면적인 입체감을 두리 뭉실하게 드러내어 꿈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한 풍경으로 끌어갔다.

 

단조로운 내용이 오히려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일체의 기교로부터 탈피한 그리기의 원형을 보여 주는듯한 소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원초적 미감의 봄바람 같은 분위기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화면은 조선 민화 같은 담백한 맛을 내는데,

마치 동화를 보는듯한 유치찬란함 그 자체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전시로, 13일까지 열린다.

 

화가 정복수씨의 술 마시러 가자는 꼬임에 끌려 장경호, 김구씨와 ‘사랑채’로 내려왔다.

운전 때문에 막걸리 한 잔만 마시기로 했으나, 한 잔으로 끝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모시고 가야할 차주 눈치 보느라 술인지 맹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개마서원’의 장의균씨 내외와 안원규씨도 합류했다.

 

아직 보아야 할 전시가 남아 있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갤러리담’에서 열리는 한상진씨의 ‘무경계’를 찾아 가다 거리에서 춤평론가 이만주씨를 만나기도 했다.

 

‘갤러리담’에는 전시작가 한상진씨를 비롯하여 최석태씨,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이사장 등 반가운 분도 여럿 있었다.

 

전시된 주요 작품은 먹 드로잉이었다.

작업실 주변이나 길에서 만난 하잘 것 없는 사물들을 형상화했다.

풀포기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렸다.

 

본래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버린,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착의 발로였다.

변해가는 사물이나 풍경처럼 세월을 멈출 수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담은 것 같았다.

무미건조하고 불안한 일상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말로는 지난 전시보다 훨씬 단단해진 미감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이 전시는 3월21일까지 열린다.

 

재미 사진가 김인태선생의 ‘선율’전이 열리는갤러리인사1010’으로 발길을 돌렸다.

 

15년 만에 찾은 김인태씨의 귀국 초대전은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국 대자연의 풍광을 보여주었다.

80년대 중반에 발표한 광활한 사구의 기하학적 구성을 드러낸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번 '선율' 전에 나오는 작품들은 때로 사색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특히 시들어가는 꽃송이를 크로즈업 한 사진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있다.

 

김인태의 ‘선율’전은 14일까지 열린다.

 

마지막으로 박진흥전시를 보러 '갤러리 더원'에 들렸다.

박진흥씨는 박수근화백의 손자이고 박성남화백의 장남이다.

삼대째 그림을 그리지만, 박진흥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해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박진흥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

박진흥씨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이 열리는 ‘갤러리 더원’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시도 보지 못한 채 뒤풀이 장소인 ‘마중’으로 가야 했다.

 

'마중'에서 전시 작가인 박진흥씨는 물론, 부친 박성남화백도 만났다.

오랜 만에 만나 반갑기 그지없으나, 박성남씨의 능글능글한 농담은 변함 없었다.

 

작가의 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다시 인사동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시는 13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봄바람 맞으며 전시보러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2021.9.29

보름 동안의 전시를 언제 끝낼지 걱정했으나,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골목 담벼락에 내건 ‘노숙인, 길에서 살다’ 전시 현수막은

비와 ‘유목민’ 취객들이 흘린 막걸리로 노숙인 옷처럼 때가 묻고 얼룩져 버렸다.

 

'유목민' 골목 전시가 끝나면 당사자들도 볼 수 있는 서울역광장으로 옮겨 가야 할텐데,

세탁해도 탈색이 안 될지 모르겠다.

 

그대로 보관한다면 간접 고난의 잔재까지 남는 의미야 있겠지만,

그 현수막은 전시가 끝나면 당사자에게 돌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찍힌 분들에게 사진을 뽑아 주긴 했으나 대개 구겨져 버렸거나 잊어버렸단다.

사진 한 장 보관할 곳 없는 그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손수건처럼

주머니에 접어 넣을 수 있도록 현수막 사진을 잘라 주기로 한 것이다.

 

전시가 시작된 후 매일 같이 전시장 방문한 분들 모습을 기록했으나

술독에 빠져 사진을 정리해 올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페친 분들은 새로 만든 Naver의 ‘인사동 이야기‘ 블로그를 통해 그간의 소식을 알릴 수 있었으나,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가 Daum의 갑질로 정지된 걸 모르는 많은 분들은

오랫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아 신상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안부를 물어오는 분까지 있었다.

 

어쨌든 그간의 소식을 올리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쓰린 속을 부여안고

26일과 27일 이틀간의 사진이나마 정리해 올림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26일은 ‘만종’을 기록하는 사진가 노은향, 이석준, 지은숙, 민성진씨를 비롯하여

이완교, 이정환, 성유나, 심보겸, 김헌수, 권해진, 최치권, 한선영씨등 많은 사진가들이 다녀갔으나

인사동을 돌아다니느라 뵙지 못한 분도 여럿 있었다.

 

연출가 기국서씨와 배우 정재진, 이명희씨 등 연극인들은 일찍부터 ‘유목민’ 골목을 장악했고,

발렌티노김, 한상진, 이태호, 최석태, 정비파, 박상희, 김도수, 변성진, 김기수, 박찬종, 편근희,

장의균씨등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그리고 가족으로는 조창호, 정주영, 김소현이 다녀갔다.

 

27일 문 닫기 직전에는 김태진씨와 아들 햇님이가 찾아왔다.

‘메밀란’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날은 손녀 주려고 처음으로 인사동에서 풍선 피리와 반지 사탕도 샀다.

장난감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손녀 하랑이 재롱에 누적된 피로가 눈녹듯 녹아버리네.

 

자리를 만들어 준 '진인진출판사'대표 김태진씨에게 그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 병원에서 퇴원하여, 정선 떠날 채비로 인사동에 나갔다.

꼭 봐야 할 전시도 있었지만, 전시 DP에 필요한 자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일을 마치고, ‘유목민’ 골목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분이 손을 흔든다.
낭만주먹 방동규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연갑씨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왔는지 모르나, 방선생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항상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으로 돌변하여 뒤통수치는 것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라,

김명성씨에게는 꼭 필요한 충고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불신할 일만은 아니라, 말처럼 쉽지는 않다.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으로 화가 장경호씨와 서길헌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명성씨와 장경호씨는 살이 끼었는지 술 취한 막판에는 꼭 언쟁이 붙어 좀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장경호씨가 조용히 드릴 말이 있다며, 방선생님을 모셔갔다.






좀 있으니, ‘평화만들기’에 있다는 전화가 와 다들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경호씨가 슬그머니 술값을 계산하고 일어나 버렸다.
방선생님도 사모님의 호출을 받아,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는 비전향 장기수 장의균씨가 와 있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강제로 옥살이를 한,

그의 근황을 들어보았는데. 다들 힘들게 살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려 펼쳐보니, 장경호씨 전화였다,
그런데, 시끄러운 음악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나만 오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의 자존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간히도 피곤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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