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임인식선생

임인식(林寅植)(1920~1998)선생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49년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했다.

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하기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에 투입된 한국전쟁 최초의 종군기자다.

 

1959년 인사동 사진전문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예편 후에는 ‘대한사진통신사’도 설립했고,

해방 직후에는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한미사진기’점을 운영했으며

1959년에는 인사동에서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기도 했다는데,

사진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분이다.

 

1953년, 인사동 '청조다방' 앞에서 기념촬영

누구보다 기록을 중요시했던 임인식선생은 고향인 정주에서 포목점과 무역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부터 사진 활동을 했고, 1944년 서울로 이주했단다.

조선경비대 창설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등 정부 주요 행사를 비롯한

당시의 역사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1955년 인사동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에 사진대(隊)가 긴급 편성되었는데,

당시 중위였던 임인식선생께서 사진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참혹한 전쟁 발발부터 정전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주요 국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다.

 

1953년 폭격을 맞은 서울 재동국민학교 앞에서..

그의 임무는 사진대를 이끌고 군이 주둔하는 도시마다 사진관을 접수한 뒤,

필름을 현상해 국내외 언론사를 통해 전황을 전하는 일이었다.

‘밀리터리 포토(Military Photo)’ 명패를 단 지프를 타고 일선에 투입되었는데,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부근에서 촬영한

손이 뒤로 묶여 학살된 미군 사진은 미국 전역을 분노로 뒤집히게 했다.

 

1950년 서울, 소실된 보신각

1950년 8월 경북 월성에서 촬영한 안강·포항전투에 투입되는

교복 입은 학도병들의 출병 사진은 학도병 모습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꼽힌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하던 순간에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순간에도,

정전회담의 순간에도, 항상 그가 있었다.

 

1953년 청계천 범람으로 침수된 종로

19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그는 한국의 ‘매그넘’을 목표로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 통신사인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하였으며,

정부 행사를 포함한 삶의 현장을 촬영해 정부 및 해외 언론에 제공했다.

1953년부터는 육군본부에서 유엔 참전국에 배포한 영문판 사진화보집 ‘육군화보’

제작을 맡아 전쟁을 극복해나가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전하기도 했다.

 

1953년 종로의 전차행렬

사진에 대한 열정은 그로 끝나지 않고 아들 임정의씨와 손자 임준영씨로 이어졌는데,

두 살 위인 숙부 임석제(1918-1994)선생을 더한다면 4대째 사진을 이어 온 명문 사진집안인 셈이다.

아들인 임정의씨는 1973년 ‘코리아헤럴드’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나,

건축가 박수근씨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건축사진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손자 임준영씨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 AAU에서 광고사진을 공부하고,

뉴욕 SVA에서 디지털사진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0년, 폐허가 된 서울시청 인근

임인식선생께서 5, 60년대 산업화 이전의 서울 풍경을 찍었다면,

임정의씨는 8, 90년대 급격하게 변모해 가는 서울을 촬영했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 그리고 디지털사진으로 이어진 사진 집안의 내력이다.

 

1955년, 종로

기록을 중요시하는 임인식선생의 빠짐없이 쓴 일기에는

당시의 카메라 시세를 알 수 있는 자료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일본제품인 럭키카메라를 27원에, 1940년 일본제 세미미놀타 카메라를 32원에,

1941년에 독일제 롤라이코드를 130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집 한 채 가격에 맞먹는다는 라이카3F를 구입해 애지중지했다고 기록되었단다.

 

1954년 서울뚝섬(지금의 건국대 부근) 채소밭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1959년 인사동에 국내 최초의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개관하였고,

한국사진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감사를 맡는 등,

우리나라 사진 문화와 사진 아카이브 개념 정립을 선도하였다는 점이다.

 

1956년, 서울 가희동 도로 포장공사

그러나 선생께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 난 후 은거하다 미국으로 이민하셨다.

1998년 건강에 이상이 생겨 귀국하여 서울에서 타계하셨다.

대개 대표적인 국내 종군사진기자로 임응식, 이경모, 이명동선생 등의 원로 분을 떠올리지만,

그 보다 사진대장이었던 임인식선생이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50년 국군 위문공연

벌써 한국전쟁 일어난지가 70년이 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되세겨본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1950년, 무기를 지고 가는 민간 부역자들
1951년, 1,4후퇴에서 청천강을 건너는 피난민
1950년, 맥아더 장군과 정일권 장군
1950년, 경북 안강, 학도병들이 전선으로 나가며..

종군기자로 참가한 영국 처칠의 아들 랜들프 처칠과 임인식 기자

 




흐르는 세월에 인사동 혼이 다 달아난다.

두 달 전에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심우성선생께서 이승을 떠나셨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신봉승선생 등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 뒤 따라 가신 것이다.



 


인사동엔 여러 층의 예술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무엇보다 문인들의 텃밭이었다.

70년대 관철동에서 인사동으로 건너와 인사동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시인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살아계시지만,

기력이 쇠진하여 인사동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강 민시인의 외로움만 깊어져 간다.

틈만 나면 노구를 끌고 인사동을 기웃거리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지팡이에 의지한 모습을 보니, 이년 전의 심우성선생 모습이 연상된다,



 


더 걱정인 것은 한 가닥 인사동 정서나마, 이어받을 후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렇게 인사동 영혼은 빠져나가고, 인사동의 낭만도 사라지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 24일에는 모처럼 강민선생님과 점심 약속을 했다.

페북에서 간간히 인사는 드리지만, 뵌 지가 오래되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꾸물대는 습관으로 또 늦어버렸는데, 그 자리에는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선생,

'답게출판사' 장소임 대표, 사진가 정영신씨가 먼저 와 식사하고 있었다.



 


강민 선생께선 눈도 침침, 귀도 가물가물하다는데,

곰탕에 든 고기를 끄집어내, 술 안주하라며 접시에 담아주었다.

김승환선생께선 벌주로 술병을 든 채, 잔 비우기만을 기다리시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 단숨에 마시는 원 샷은 한 잔에 맛이 가버려, 잘 마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상머리 화제는 강민선생과 장소임씨의 인연으로 옮겨졌다.

30년 전 강민선생께서 금성출판사상무로 재직할 무렵,

장소임씨가 강민선생의 자문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출판사 차릴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강민선생께서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출판사 차려 오늘에 이르렀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신 때마다 오찬을 베풀어 드리는 등, 강 민선생을 각별히 챙겨왔다.



 


장소임씨는 올 해로 답게 출판사창립이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도 가질 것이라 했다.

출판사 이름도 사람답게로 바꿀 생각이라며,

답게 라는 여러 종류의 상호를 등록하여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등 출판사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는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며,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강 민선생께 드린 것이다.



 


물론, 가난한 시인의 용돈을 챙겨주는 일이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 건 도리가 아니다.

드리려면 봉투에 넣어 정중히 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모르게 드리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걸 모를 분이 아니잖은가?

그걸 보니, ‘답게 출판사와의 오랜 악연이 되살아났다.



 


약 십 오년 쯤 된 일이다.

'답게 출판사'에서 천상병선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내 사진을 사용하였지만, 원고료는 커녕 작가의 승인이나 사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 전재한 것이다.





내가 찍은 천상병선생 사진은 8X10규격으로 뽑아 서명까지 하여 목여사께 드렸는데,

그 사진을 출판사 임의로 사용한 것이다.

물론 목여사는 저작권에 관한 관례를 몰라 주었겠지만, 출판사는 당연히 챙겨야 할 문제다.

더구나 사진에 서명까지 되어있는데도 무단 전재한 것은 상식을 넘어 양심 불량인 것이다.

그 당시는 '답게 출판사'나 장소임 대표를 전혀 모를 때였으나,

전해 준 천상병선생 사모님 얼굴보고 참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넘겼더니, 한참 후 또 문제를 만들었다.

일간신문에 책 광고를 내면서 내 사진을 그대로 게재한 것이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어 출판사대표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당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목여사를 시켜 원고료 10만원으로 깔아 뭉갰다.

신문광고용 사진원고료가 얼마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목여사가 아니라그 누가 부탁해도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매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



 


몇 년 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천상병을 말한다는 책을 만든다며 글 쓰 달라는 원고 청탁을 해 왔다.

천상병선생 이야기라 흔쾌히 쓰 주었는데,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그것도 답게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광래씨가 글 쓴 원고료라며 십 만원을 전해 주었으나, 그 책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진이 두장이나 실려 있었다.

사진 원고료는 물론 한 마디 양해도 없었지만, 인사동 궂은 심부름 하는 노광래씨 안면으로 또 그냥 넘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출판사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스스로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 셈이고, 잘못을 그냥 넘겨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진가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시비를 가리는 것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요 모양 요꼴로 만들었다는 뒤늦은 자책에서다.



 


그 이후 천상병기념사업회이사회에서 답게 출판사대표와의 첫 상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는 커녕,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말이 저작권침해지 한마디로 도둑질인 것을 모를 리 없겠으나, 모른 채 하는 것이다.

가난한 다큐 사진가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지만, 돈이나 밝힌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다행히 인사동 터줏대감 강 민선생을 잘 모신다는, 고마움에 입 다물었던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식사하며 천상병선생의 책은 8쇄에 이른 책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니, 저작권을 침해한 잘 못도 잊은 것 같았다.

뒤늦게 나온 책에는 사진의 출처나 밝혔는지 모르겠다.

괜히 답게 출판사’ 일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일어나 김진열씨 목판화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옮겼다.

군중들에 휩싸여 걷는 두 선생의 어깨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4층까지 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 따라 갔더니, 김진하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고. 한 쪽엔 '문화연대' 임정희씨도 있었다.

오르느라 힘은 들어도 좋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 좋은 전시를 공짜로 보여 주는데도 안 오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다음엔 커피 한 잔하는 일만 남았는데, 선생님의 단골집이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벽치기 골목의 유담커피숍으로 갔으나, 그 놈의 개는 왜 그리 짖어댈까?

내가 개처럼 생겨서일까? 아니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낮 술에 주저리주저리 떠벌였는데, 선생님들께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이시여! 제발 세월에 휩쓸려 가지는 마십시요.

부디 건강을 지켜 오래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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