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널 뛰기를 하고 있다. 뒷편이 '쌈지'로 바뀐 '영빈가든'

지난 4월3일 ‘푸른사상’ 맹문재씨 사무실에서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이야기가 잠간 언급되었는데

 내용인 즉, 인사동 매력이 사라져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좌로부터 맹문재, 조문호, 방동규선생

그동안 인사동은 끝났다는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사실상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나에 대한 충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인사동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었다.

 

2009 눈오는 날의 인사동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동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환경이 달라졌다고 고향이 고향 아닐 수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변해가는 인사동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록에 좋고 나쁜 것이 있겠는가?

 

1982 실비집에서 나오는 박종수시인과 천상병시인

내가 인사동과 인연을 가진 것은 부산에서 올라 온 81년 무렵이었다.

아무 의지할 곳 없는 낯선 타향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 주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

히말라야 기 받아 잘 나가는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 장사하는 전활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 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2006, 호젓한 아침 무렵의 거리풍경

인사동 지척에 있는 피맛골에 박종수 시인이 운영한 '시인통신'이 있었는데,

시인 조해인, 화가 이목일, 연극배우 이명희, 언론인 이두엽 등

많은 예술가들이 피맛골과 인사동을 넘나들었다.

 

1985, 초창기 맴버들 ,좌로 이윤섭,노광래,박광호,최울가, 고 김종구(앞), 공윤희, 김신용,황외성

그런데, 부산에서 잘 알던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비롯하여

마산에서 상경한 디제이 출신 박한웅 등 여러 사람을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난 것이다.

이처럼, 인사동에 애착을 갖는 것도 인사동이란 장소에 앞서 사람에 대한 정이다.

 

1984, 인사동거리축제에서, 화가 강용대 모습도 보인다

88년 무렵,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옥탑 방을 얻어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작업실이 종종 술집이 되어 노는 것과 일이 구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로 옮기고 부터 여기 저기 떠돌았는데, 한참 후 그 옥탑방을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놀랍게도 방 곳곳에 손 때 묻은 나의 흔적들이 있었다.

끼익끼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와 쓰레기에 섞여 나온 빛바랜 간판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유적 같은 파편들이 인사동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든 것이다.

벗들을 다시 찾아 나서며 찍은 입상사진으로 전시도 했다.

그 이후 정영신씨와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차렸으나 돈 벌이가 되지 않았다.

 

2015, 심우성,이명희,강민,정영신씨, 돌아가신 심우성, 강민 선생은 유달리 인사동을 사랑하셨다.

필자 외에도 인사동 주변에 사무실이나 작업실을 두고 왕래한 분이 여럿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문을 연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 김동수, 

사진가 한정식, 김영수, 정인숙, 안영상, 언론인 임재경, 화가 이존수,

 서지학자 김영복, 시인 송상욱, 서예가 이상명, 천연염색인 이명선 등이다

 

1999 '아트온' 사무실에서,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

80년대 초반에는 문학 유목민들도 인사동으로 대거 옮겨왔다.

명동에서 관철동으로 옮겨 ‘한국기원’에서 지내던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건너 온 것이다.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영국산 파이프를 물고, 술보다는 커피 향을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시인 신경림, 황명걸,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등 일개 소대는 족히 되었을 거다.

그 이후에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무나미씨를 비롯하여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과 원광스님 등 괴짜 스님들도 등장했다.

 

2006 고) 원광스님

천상병 시인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 같은 찻집이 만남의 장소였다.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단골이었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 이후 ‘하가’나 '레떼', '춘원', '누님칼국수‘ 등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서 많은 작가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작가로는 김용태, 여 운, 문영태, 신학철, 박불똥, 황재형, 박성남,

최민화, 장익화, 류연복,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조각가 박상희, 연극연출가 기국서,

음악인 김상현, 시인 서정춘, 소설가 박인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14, 좌로부터 구중서,강민,방동규,추은희,김승환,기국서,신경림,정두리,박정희,장소임,심우성선생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의 ‘시인’, 

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이 생기는 등

문인들의 아지트도 이어졌다.

 

1989 '춘원'에서 열린 문은옥시인 시집 출판기념회, 박중식시인이 삼페인을 들고 있다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되며 김용태, 문영태, 유홍준씨가 주동이 된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1985 안국동 아랍미술관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 박용수사진

88년에는 조성국, 고 은, 김윤수선생이 공동의장을 맡고

신경림선생이 사무총장, 김용태가 실질적인 업무를 맡은

‘민예총’이 창립되며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냈다.

그리고 99년에는 홍순태선생이 회장이고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은

‘민사협’이 창립되어 북인사마당 입구 제과점 2층에 둥지 틀었다.

 

2011 '푸른별 이야기'에서 좌로부터 배평모, 전강호내외, 장경호, 최일순, 전활철, 김용문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 풍류는 문인과 화가만이 아니라 사진가, 연극인, 언론인까지 모여 들였다.

한학자 노촌 이구영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복, 임계재, 김문호 등 여러 명이

‘이문학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낙원동에서 모이기도 했다,

'통인가게' 관우가 주동이 된 '인사모'를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임도 여럿 생겼다.

 

2013 '인사모' 회원들, 왼쪽부터 강윤구, 박일환, '김완규, 민건식 

심우성, 채현국, 민 영, 김동수, 신봉승, 이계익, 이호철, 조준영, 장경호, 윤양섭, 배성일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 무렵 생겨 난 노인자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을 드나들었다.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시인 강고운의 '무다헌'도 있었다.

 

2007 '무다헌'에서 노래하는 이계익선생, 좌측은 송상욱시인

2012년에는 전활철의 ‘유목민’과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다.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2010  '봄날은 간다'사진전에서 아코디온을 켜는 이계익 전장관, 좌측은 연극배우 이명희,민영시인

이제 인사동의 마지막 풍류주막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가 운영하는 ‘풍류사랑’과 전활철의 ’유목민‘ 뿐이다.

 

1987 실비집 골목에서, 좌로부터 박한웅, 조해인시인

세월을 되돌려 옛 사료들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도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 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인화랑’, ‘통문관’, ‘동헌필방’, ‘농협종로지점’,

‘이문설농탕’ 등이 서울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3 인사동거리 / 임인식사진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2018, 이겸노옹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이종운씨가 운영하는 '통문관'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가장 오래되었으나 살아 남았던 '통인가게'나 '통문관'이 같은 통할 통자를 쓰는 것도 흥미롭다.

 

2020 '통인가게' 김완규선생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1988 수도약국 앞에서 휘호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 

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  문제는 소중한 유적들을 일본에 팔아 넘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기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1988 북인사마당 장승터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 등의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국화 작가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박주환씨가 1976년 '동산방'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 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김명성씨가 2012년 개관한 '아라아트' 전경

한 참후에는 화가 최대식씨가 운영한 갤러리 21‘과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한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은 ’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통인가게‘를 이어받은 관우선생의 ’통인옥션갤러리‘도 역량 있는 작가를 꾸준히 초대하며,

정기적으로 판소리마당을 여는 등 인사동 문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1959년 인사동 사진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신희순이 운영한 ‘꽃나라’ 라는 흑백현상소가 생겨나며

김대현, 양은환, 유성준, 정영신, 윤 옥, 김종신, 정용선, 이혜순, 고영준, 하상일, 변홍섭 등

많은 사진인들이 인사동을 더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2018, 인사동 "꽃나라'에 출입하던 사진인들을 오랜만에 인사동에서 만났다. / 정영신사진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이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최건수가 운영하는 ‘인덱스’가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2012 룩스갤러리에서 열린 김영수추모전 개막식, 정범태선생과 곽명우씨가 보인다

99년 창립된 ‘민사협’은 사무실 보증금이 없어

회원인 정원일에게 500만원을 빌렸으나, 아직 갚지 못했다.

회장과 사무국장은 로봇에 불과하고 모든 걸 김영수가 좌지우지해,

다들 탈퇴하거나 한 걸음 물러나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대구지부에서 연명으로 탄원 하는 등 분란도 속출했다.

사무국장은 일찍부터 정인숙이 물려 받았다.

 

1986 고)김영수씨, 인사동 작업실에서

그래도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광복60년 시대와 사람들’,

‘한국현대사진60년’ 등 ‘사협’에서는 엄두도 못낼 굵직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김영수가 세상을 떠나자 '민사협'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젊은 사진가들이 다시 결집했으면 좋겠다.

 

2006 인사동 거리풍경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서며 밤이 되면 식당골목 주변에

검은 세단이 들락거렸으나, 정치인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동에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며

샛길 안쪽에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옥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섰다.

 

2006 많은 인파가 몰리는 주말의 인사동거리

그런데 1987년 ‘인사동 상인회’가 결성되었고,

그 이듬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사동에 관이 개입하여 축제를 벌이자 구경꾼은 몰렸지만

인사동만의 풍류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요일에는 차 없는 거리가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화장품 가게나 중국산 싸구려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7 '인사전동문화보존회'에서 발행한 '인사동이야기' 목차

1997년 ‘인사동 상인회’가 ‘인사전통문화보존회’로 바뀌었다.

이호재가 보존회 회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이야기’란 회보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 거리로 변모했다.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함께 놀고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에는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계획에

길가 있던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쫓겨 날 처지가 되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8 인사동 쌈지 앞 거리풍경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을 빼 닮았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완전 망했다고 한탄하지만,

세월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세대교체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장에서

그 무렵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인들이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규합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김명성을 비롯한 150여명의 예술인들이 뭉쳤다.

‘아리랑가든’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후 몇 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문화행사를 벌였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

그리고 천상병 시인 20주기가 되는 2013년 4월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인사동 소풍, 천상’이라는 시와 노래, 회고담이 어우러지는 추모행사를 열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은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사진집을 출판해 기념했다.

 

2012, '아라아트' 개관식에서

가난한 예술인들이라 처음부터 대부분의 경비를 이사장인 김명성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가 건평 1,000평이 넘는 대형갤러리 ‘아라아트’를

인사동에 세워 자금난에 시달리자 ‘창예헌’ 활동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도나 중국자본에 넘어감에 따라 '창예헌’ 활동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과

2010년 ‘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이 내가 남긴 인사동 자료다.

 

2007 ‘공화랑’에서 열린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 퍼포먼스

이제 이 글을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유일한 인사동 사진집으로 펴냈던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되어

저자도 없는 귀한 책이 되고 말았다.

 

2010 북스갤러리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낭만과 풍류가 흐르던 옛 인사동은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영글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그 흐릿해 가는 추억을 안주삼는 예술가들만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마저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 여파로 만나기 어려워졌다.

 

2013 여자만 연회에서, 송상욱시인과 김신용시인

유일하게 희망적인 것은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대표가 인사동 문예부흥에 공 들이고,

박재동화백이 갤러리 입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인사동 지킴이로 나섰다는 점이다;

 

2019 '통인가게' 판소리 마당에서 배일동명창이 열창하고 있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전시 제목처럼 인사동, 봄날은 갔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두 원로 시인의 시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2007 쌈지에서 노래부르는 장사익씨

인사동 / 고 은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2016 좌로부터 조준영, (고)강민 시인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인사동 아리랑 / 강 민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2005년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노래하는 고) 이남이씨)

서인사마당 공영주차장이 있는 인사동11길로 들어서면

‘토포하우스’와 ‘관훈미술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아리수’. ‘갤러리 The K’, ‘아라아트’ 등 여러 전시장이 나온다.

 

그 골목에는 ‘부산식당’과 ‘메밀란’, ‘초당’ 등의 술집과 찻집도 있다.

‘초당’ 맞은편에 있는 담쟁이 건물은 오래전 아지트처럼 들락거린 곳이었다.

‘일광칼라’와 ‘꽃나라’ 흑백현상소가 있던 곳인데, 사우들이 자주 들려 어울리기 딱 좋았다.

 

‘꽃나라’현상소가 충무로로 옮기며 자연스레 발길이 끊겼는데,

그 뒤 ‘목인박물관’이 들어서며 전시 보러 간 기억들만 남았다.

한 동안 빈집으로 남아 궁금했는데, 엊그제 지나치다 보니

‘담쟁이집’이라는 간판을 단 찻집이 문을 열었더라.

 

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뒷 건물과 길가의 1층 전시장과 연결되어 공간이 넓었다.

옛 건물을 활용하여 꾸며 놓았는데, 몰랐던 옥상 공간도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공영주차장과 ‘아라아트’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오래된 기와지붕에 천막을 기와로 눌러놓았는데, 마치 판자촌을 보는 것 같았다.

눈에 자주 보이는 곳 같았으면 저렇게 둘까싶다.

 

전염병 때문에 장사가 되지않는데다 알려지지도 않았으니 손님이 많을리가 없다.

손님이 없어 그런지 주인도 종업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커피 한 잔 못 마시고 그냥 나왔지만, 걱정스러웠다.

이제 ‘담쟁이집’의 운명은 커피 맛이 결정할 것 같다.

 

그 맞은편에 있는 ‘아라아트’는 한 층이 100평이 넘는

9개 층 전관에 전시가 한 건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주차공간이래야 자동차 다섯 대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유료 주차 안내판을 붙여 놓았겠는가?

 

중국자본이 점유한 건물이라 쉽게 망하지는 않겠지만, 한 달 관리비만도 상당할 것이다.

때로는 초대전도 열고 때로는 대관료 활인도 해주며 좋은 전시를 계속 유치하여 끌어 모아야 하는데,

정해놓은 대관료만 고집하니 될 수가 있겠는가?

 

돈 좋아하는 중국 사람이라지만, 전략도 융통성도 없었다.

하기야! 버티기만 하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지 내려가진 않을테니까...

인사동 문예부흥을 위해 세운 ‘아라아트’의 몰락에서 인사동의 현실을 본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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